전투식량은 전투 시에 휴대가 용이하도록 포장된 간이 식량을 말하며, 전투나 이동 중 간편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도록 개발된 음식이다. 따라서 전투 중의 허기를 없앨 목적이니 만큼 고칼로리, 고열량 음식임은 당연하다. 요즘에는 그 간편함과 휴대성 때문에 민간분야에서도 많이 팔리고 있다. 낚시나 등산할 때 가져가거나 군 생활의 옛 추억(?)을 떠올리고 싶은 분들도 많이 찾는 듯하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이 ‘전투식량’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은 편이다. 그 이유는 전투식량이 식품공학뿐만 아니라 장기 포장 및 보관 기술이 발달하면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전투 식량”은 프랑스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 탄생했다. 러시아로의 장거리 원정을 앞두고 있던 나폴레옹은 군수보급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휴대가 간편한 식량 개발 기술 공모에 1만2000프랑의 현상금을 걸었다. 이 공모를 통해 제과업자 겸 발명가인 니콜라 아페르(Nicolas Appert, 1749~1841)가 응모한 휴대용 식량이 당첨되었는데, 이는 음식을 와인 병에 담은 후 가열하면서 밀봉해 멸균 진공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양철 캔 안에 음식을 넣는 통조림은 영국의 피터 듀란(Peter Durand)이 발명했다. 하지만 정작 캔 오프너는 1858년에나 등장했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칼로 통조림을 뜯다가 칼날이 상한다거나, 심지어 총으로 쏴버려 내용물이 쏟아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전투식량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경이었으며, 영국군은 납으로 된 캔에 음식을 담아 배급하다가 병사들이 납에 중독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본격적인 전투식량은 미국에서 탄생했다. 미군은 남북전쟁(1861~1865) 시절부터 간단하게 배급하고 보관이 쉬운 음식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식사와 군수보급이 전투력과 직결된다고 판단한 미군은 병영에서 소를 키우다 필요할 때 도살해서 고기를 배급하고, 깨끗하게 씻은 후 말린 야채를 압착한 덩어리로 보관했다가 배분하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오늘날 거의 모든 군대가 도입하고 있는 패키지화된 전투식량, 일명 “레이션(Ration)”은 1차 세계대전부터 체계적으로 연구됐다.

이 시기에 체계적으로 전투식량을 연구한 가장 큰 이유는 참호전 때문에 고정 진지에서 병사들이 오래 버티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식사 보급은 원활하지 못했고, 진지 안에서 오래 버티는 만큼 식수를 비롯한 음식물을 최소한으로 항상 보유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전투식량 패키지를 지급한 미군은 레이션 하나당 230g의 단단한 빵 50개, 콘비프 10캔, 로스트 비프 5캔, 연어 1캔 각 450g, 약 113g짜리 정어리 4캔, 그리고 커피, 소금, 설탕을 동봉했다.

이러한 1차 세계대전 때의 연구를 바탕으로 2차 세계대전 때는 이미 통조림 기술, 식량 장기보존 기술이 크게 발달해 있었다. 미군의 경우 부대 임무에 따라 23가지의 레이션 구성이 존재했지만, 가장 일반적인 구성은 “전투용 개인 식량(Combat Individual Ration)”, 통칭 “씨레이션(C-Ration)”이었다. 씨레이션에는 빵과 고기, 야채와 커피, 설탕, 소금 등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씨레이션 역시 석 달 이상 섭취 시 영양 불균형이 발생하기도 했고, 같은 음식에 질리는 경우도 많았다. 씨레이션은 이후 한국전쟁 때에도 지급됐지만, 과일이나 케이크, 빵 등도 캔에 넣어 함께 지급됐다. 또한, 담배 한 개피나 초콜릿 등도 기호에 맞게 포함됐던 것도 특징이다. 하지만 사실 이 시기에 미군이 배불리 고기를 먹을 수 있던 것은 전투식량보다는 “스팸(SPAM)”의 덕이 컸다. 상온에서 장기보관이 가능하고, 아무때나 까서 돼지고기 살코기를 실컷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식량은 냉전을 거치면서 더욱 많은 연구가 진행됐다. 1958년에 미군이 전투식량으로 채택한 MCI(Meal, Combat, Individual)는 씨레이션을 대체했으며, 한 끼에 약 1200칼로리를 제공하면서 메뉴도 12가지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이 MCI의 특징은 그간 전투 식량들이 “하루 단위” 식사를 제공했던 반면, MCI는 끼니 단위로 포장되어 영양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이후 미군 병참사령부(US Quartermaster Command)는 정글 등에서 휴대가 간편하도록 중량이 가볍고 수분이 없는 음식 개발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실패는 1950년대 말~1960년대를 통해 우주개발 사업이 박차를 가하면서 응용되기에 이르렀으며, 1962년 아폴로 11호(Apollo 11)가 달 탐사를 떠날 때는 냉동건조 치킨, 썰은 감자요리 등이 들어간 “LRP(Long-Range Patrol)”가 지급되었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전투 식량이 된 미군의 MRE(Meal, Ready to Eat: 상표명)는 1970년부터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83년부터 지급이 시작됐다. MRE의 가장 눈부신 발전은 금속제 용기가 사라져 무게가 가벼워졌고, “발열 팩”으로 알려진 FRH(Flameless Ration Heater)가 포함됐다는 점이다. 이 FRH는 플라스틱 팩에 들어있으며, 산화 마그네슘이 물과 만나면 끓어오르는 현상을 이용해 불 없이 요리를 덥힐 수 있게 한 점이 특징이다(대신 엄청난 수증기를 뿜는다).

또한, 메뉴도 채식주의자를 위한 식단을 포함해 12개에서 24개로 늘어났다. 물론 맛이 있냐고 묻는다면, MRE의 별칭 중에는 “적도 거부한 음식(Meals rejected by the enemy)”이라는 게 있을 정도이니 더 말이 필요 없겠다. 심지어 “테러와의 전쟁” 초기에는 장기 파병 군인들의 사고를 막기 위해 미 식약청에서 승인하지 않은 ‘성욕감퇴제’를 넣었다는 소문이 돌아 일부 미군 병사들이 기피했기 때문에 미군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기까지 했었다. 최근에는 3일치 분량이 한 팩으로 들어있는 FSR(First Strike Ration)도 나왔으며 한 끼에 약 2000칼로리 정도를 공급한다.

이러한 전투식량의 발달사 이면에도 심각한 스캔들의 역사가 있다. 미-서 전쟁(Spanish-American War, 1898) 중에 육군에서 터진 일명 “소고기 스캔들”이 그것이다. 전쟁이 시작하고 난 후 대량의 전투식량을 배급하게 된 미 전쟁부(Department of War: 1947년 미 육군부/공군부로 개편)의 러셀 앨저(Russell A. Alger, 1836~1907) 장관은 급한 나머지 시카고의 가장 큰 세 개의 정육 포장 업체와 소고기 공급 계약을 서둘러 체결했다.

이 세 정육 업체는 장관이 급박한 상황이라 납품 소고기의 질을 크게 신경쓰지 못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대부분의 물량이 바다 건너 쿠바에서 전투 중인 원정 부대가 소비할 것임을 인지하고 계약한 것보다 양을 줄인 저급품의 소고기를 납품했다. 이 상황에서 고기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며 취급 부주의로 변질됐고, 결국 이 고기를 먹은 병사들이 집단으로 이질 증세와 식중독 증상을 일으키게 되었다. 특히 이미 쿠바에서 말라리아와 황열병 증세를 겪어 쇠약해져 있던 부상병들은 이 고기를 먹고 사망하기까지 이르렀는데,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 수보다 식중독 증세로 사망한 병사 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황열병 증세와 식중독 증상이 유사하기 때문에 당시 전쟁터의 군의관들은 부패한 저급 소고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직접적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미-서 전쟁이 종전하고 나서 한 달 후에 심각하게 제기됐다. 남북전쟁 참전 용사로 당시 미군 총사령관(Commanding General of the United States: 1903년 육군참모총장직이 상설화되면서 폐지)이던 넬슨 마일스(Nelson A. Miles, 1839~1925) 중장은 이미 식량 보급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개전 직전에 앨저 장관에게 “쿠바나 푸에르토 리코의 현지 목장에서 소를 구입해 그 곳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것이 원거리에서 방부처리한 소고기를 조달하는 것보다 낫다”고 조언을 했었지만 묵살당했다.

그는 이 “술먹인 고기 스캔들(고기의 냄새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을 놓고 의회 조사가 시작되자 야전에 있던 군 수의관이 보낸 편지를 제출했으며, 그 편지에는 “미국에서 온 소고기를 조사한 결과 부족한 냉동보관 시설을 상쇄하기 위해 대량의 화학 방부제가 투여되어 있었고, 냄새는 포름알데히드 처리를 한 인간의 사체와 유사했으며, 처음 요리를 했을 때 맛은 붕산 맛 같은 것이 났다”고 써 있었다. 또한, 마일스 장군은 해당 고기들이 포장도 엉성해 캔을 열었을 때 이미 부패되어 있던 고기가 많았다고 의회에서 증언했다. 결국 이 사건은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됐으며, 마일스 장군은 문제의 고기들이 “소고기 즙을 짜내고 남은 찌꺼기들을 캔에 넣어 포장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은 끝난 뒤였고, 쿠바 전선과 달리 필리핀 전선에서 싸웠던 웨슬리 메릿(Wesley Merritt, 1836~1910) 장군 등은 “(필리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밝혔으며, 병참사령관인 찰스 이건(Charles Eagan, 1841~1919) 준장은 마일스 장군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서 격렬하게 비난을 하다 품위 손상을 사유로 직무 정지를 당했다. 하지만 앨저 장관은 이미 미-서 전쟁 중에 보여준 부족한 리더십 문제와 맞물려 곧 사임 압박을 받게 되었고, 결국 1899년 8월 1일자로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 1843~1901)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 그는 장관직을 사임했다. 이 사건은 미군의 군수 보급 체계를 개혁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대한민국 국군이 처음으로 주먹밥 대신 전투 식량을 지급받은 것은 베트남 전쟁 때의 일로, 최초 미국으로부터 씨레이션(C-Ration)을 지급받았지만 병사들 대부분이 느끼한 서양식 식단에 적응하지 못했고, 주로 밥과 김치 위주의 식단을 원했기 때문에 이를 충족시킨 케이레이션(K-Ration)을 1967년 2월부터 지급했다. 현재 지급되는 레토르트 형태의 식사 팩은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주도로 1990년대에 개발됐으며, 2005년부터는 자체개발 발열팩이 들어간 신형 전투식량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아무래도 휴대성과 영양 공급에만 중점이 맞춰져 맛이 없던 것이 전투식량이었지만, 최근에는 즉석 밥의 등장과 함께 다양한 메뉴들이 출시되면서 맛도 크게 개선되었다. 그래도 대용식은 대용식인 법. 정말 전쟁터의 병사가 원하는 음식은 이런 포장용기 속의 음식이 아니라 갓 만든 따뜻한 식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