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로 불안감 달래고 맞선으로 백년고객 만들어”
참여정부는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며 고민에 빠졌다. 풍수지리 전문가를 자문 위원으로 위촉할지가 논란거리였다. 청와대터가 인체의 목에 해당하는 북악산을 누르고 있어 혈맥을 끊는 격이라는 최창조 교수의 진단은 해방이후 천도론의 효시(1993년)였다. 한국인들은 풍수에 매료됐다.
하지만 공론의 장에서 풍수지리를 논하는 일은 금기였다. 폭넓은 여론 수렴의 모양새를 갖추려는 고육책이 화의 근원이었다. 천도론을 주창하던 최창조 서울대 교수는 학계로부터 비판의 ‘뭇매’를 맞고 대학을 떠났다. 그리고 삼성전자 출신의 풍수컨설턴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출범한 이후 풍수전문가를 자문위원으로 선정한 사례는 제가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학벌(성균관대 경영학)도 괜찮은 편이고, 삼성그룹에서 근무한 경력을 감안해 적어도 사이비는 아니라는 판단을 한 건 아닐까요”(웃음)
고제희 풍수컨설턴트(기업·하나은행)는 참여정부 시절 행정수도 이전 자문위에 참여한 배경을 이같이 회고했다. 기업은행, 하나은행의 풍수 컨설팅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는 그는 요즘 가장 각광받는 풍수 전문가이다. 지난 1986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그의 풍수기행은 호암미술관 시절 빛을 발한다. 고 씨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박문수 어사의 묘소였다.
“천안의 은석산 옆에 있는 조선 시대 박문수 어사의 묘는 장군이 병졸들을 호령하는 ‘장군 대좌형’입니다. 하지만 장군(박문수)은 있는데 병졸이 없는 형국이어서 아쉬움이 남는 터였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묘지가 있는 들판에 아우내 장터를 열었다. 줄줄 새는 지기(地氣)를 보충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풍수를 모르고서는 조상들의 사고(思考)도 엿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업무는 뒷전인 채 저술 작업과 유적 탐사에 열중하다 회사의 눈 밖에 났던 그는 1998년 IMF 때 회사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풍수의 매력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전화위복이다.
음택·양택 종합리포트 제공●풍수 컨설턴트
“기업인들이 매입을 저울 중인 후보 건물을 2~3곳 정도 함께 돌아본 뒤 배산임수라는 풍수의 기본요건, 도로, 가로수의 위치 등에 비춰 득실을 따지는 ‘풍수 리포트’를 만들어 제공합니다.” 기업은행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2006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까지 30명의 부자고객들을 만났다.
화장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드물게는 조상들의 묏자리를 선정해 주는 음택 풍수 서비스 수요도 꾸준하다고 그는 귀띔한다.
“와인파티, 패션쇼를 비롯한 은행권의 부유층 서비스가 사실 고만고만합니다. 펀드상품 판매는 부진하고, 금리하락으로 예금 유치도 쉽지 않다 보니 ‘풍수(風水)’가 부유층 고객들을 파고들 서비스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고 컨설턴트는 은행권에 풍수 특수가 일고 있는 배경을 이같이 진단한다.
은행권의 부유층 고객을 향한 러브콜이 뜨거워지면서 그의 명성도 높아졌다. 고 컨설턴트는 하나은행 ‘웰스 매니지먼트(Wealth Management)팀’과도 계약을 맺었다.
그는 국민은행, SC제일은행 등이 주최한 고객 초청 풍수 강연에 참가하는 등 1년에 100여차례 이상 강연을 한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부동산투자로 막대한 돈을 벌고도 대치동에 있는 허름한 사옥을 좀체 떠나지 않았다. 이 사옥이 ‘길지(吉地)’라는 역술인의 조언을 수용한 결과였다.
국내 중견 화장품업체 오너도 부모의 묘를 옮기려다 풍수지리가의 반대에 부닥쳐 이장을 포기했다. 부자들은 항상 걱정을 달고 산다. 은행권의 풍수 컨설팅 수요 또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고 컨설턴트의 예상이다.
참여정부의 행정수도이전 움직임과 관련해, 반대의사를 밝혔지만 가중치가 작아 자신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비사도 털어놓았다.
부유층 고객들이 궁합 더 따져●맞선 컨설턴트
“우리 아들 장가 좀 보내주세요~” 부모들에게 자식은 늘 애물단지이다. 젊은 시절 구두쇠 노릇을 하며 수백 억대 재산을 모은 한 자산가는 혼기를 훌쩍 넘긴 아들만 생각하면 속이 답답해졌다. 한 은행 PB센터의 커플매니저가 ‘용하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무작정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돈 보따리를 들고 센터를 찾아갔다. 신한은행 PB센터의 가입조건은 현금자산 10억원. 김희경 커플매니징 팀장은 지금도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곤혹스러움과 더불어 자식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는 그녀는 은행권의 유일한 ‘매치메이커’이다.
대한항공 스튜어디스로 근무하다 결혼과 함께 퇴사한 그녀는 결혼정보회사 듀오에 재취업했다 신한은행에 합류했다. 고액 자산가들을 겨냥한 은행들의 경쟁이 가열되던 시기였다. 지금까지 그녀가 결혼을 성사시킨 커플은 모두 16쌍. 발로 뛰면서 일궈낸 성과이다.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한 커플부터 2년 이상이 걸린 부부들까지, (제가) 다리를 놓은 커플을 떠올리면 절로 웃음이 납니다.” 하지만 그녀가 털어놓은 분투기는 눈물겹다. 결혼정보회사와 달리 고객들을 발이 부르트도록 일일이 찾아다녀야 했다. 혼기를 맞은 자녀를 둔 고객들이 많지 않았던 점도 부담거리였다.
그녀가 은행에 커플매니저로 입문한 지 벌써 3년. 김희경 팀장은 요즘 부쩍 할 일이 많아졌다. 동료들의 민원성 전화가 줄을 잇고 있다고 살짝 귀띔을 한다.
금융시장 불안으로 펀드수익률이 급락하고 은행금리도 떨어지면서, 심기가 불편해진 고객들의 미혼 자녀들에게 좋은 배필을 소개시켜달라는 부탁이다. 그녀는 요즘 펀드상품에 투자했다 수익률 하락으로 부심 중인 고객들의 ‘화’를 달래는 ‘심리치료사’까지 담당하고 있다.
세대 연결 가문컨설팅●커플매니저
은행의 주선으로 결혼에 골인한 커플들은 부모 세대에 이어 이 은행의 고객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결혼상담 서비스’는 금융권이 심혈을 기울이는 가문 컨설팅의 화룡점정(畵龍點睛) 격이다.
평범한 가정과 부유층의 배우자 선별 기준에 뚜렷한 차이는 없을까. 사업가 가문답게 합리적일 듯하지만, 예비 사위, 며느리들의 사주와 궁합을 매우 중시하는 편이다. 귀하게 자라 재테크 감각이 떨어지는 아들을 보필해줄 ‘집사형 며느리’를 고집하는 고객들도 종종 눈에 띈다.
33세 이상 된 여성들을 찾는 남성들이 전무한 것도 부유층 세계의 특징이라고 김 팀장은 귀띔했다.
상속·증여세 절세 도우미●세무 컨설턴트
“국세청에서 요즘 은행 PB센터의 세무팀을 유심히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서는 한때 몸담았던 조직에 대한 ‘향수’가 느껴졌다. 권오조 우리은행 세무팀장은 국세청에서 잔뼈가 굵은 ‘세무통’이다. 커플 매니저나 풍수지리가가 음식맛을 내기 위한 양념 격이라면 세무 컨설팅은 ‘소금’에 비유할 수 있다.
쑥쑥 커가던 신흥 시장 펀드상품이 반토막 난 데다, 은행정기 예금금리마저 하락세여서 부자고객들의 자산관리 담당부서는 좌불안석이다. 주요 고객인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도 수요기반을 뒤흔든다. 하지만 권 팀장이 이끄는 세무상담 부서는 고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 12일 역삼동 GS타워 우리은행에서 만난 그는 양쪽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중산층은 물론 부유층 일부도 금융위기로 흔들리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성골 부자’들은 여전히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
“부자 고객들은 요즘 주식이나 펀드 증여에 대한 관심들이 매우 높습니다. 과세 근거가 되는 평가액이 급락한 때문입니다.” 기업들이 모험을 피하고 불요불급한 지출을 줄이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현 정부가 추진 중인 이른바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은 세무 컨설팅 ‘특수(特需)’를 부르고 있다.
부자들이 돈을 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그 혜택이 자연스레 서민층으로 확산된다고 보고 감세를 추진해 온 MB정부의 ‘정책 방향’이 기대감과 더불어 꾸준한 세무 수요를 불러오고 있는 것. 이뿐만이 아니다. 토지 보상금으로 돈벼락을 맞은 각 지역의 잠재 고객 쟁탈전도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전국의 토지보상금 특수를 겨냥해 우리은행 세무팀이 풀가동되고 있다는 것이 권 팀장의 귀띔이다. 경쟁 은행들이 총동원돼 ‘가망 고객’을 집중 공략하다 보니 현지 분위기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관보에 게재된 토지보상금 정보를 파악한 뒤 현지 주민을 상대로 뜨거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고 귀띔한다.
“어제도 현지 주민분들과 전화 통화를 여러 차례 했어요. 세무팀은 요즘 부자고객들의 세무상담에다 토지보상금을 받은 주민 공략까지,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권 팀장이 바라보는 중산층과 부유층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중산층들은 부유층으로 올라서기 위해 재테크에 목을 매는 반면, 부유층들은 여윳돈을 굴리며 상속·증여세 절감 방안에 골몰하는 등 현상유지를 꾀한다고. 중산층은 40세에 아파트를 포함해 40억원 정도를, 부유층은 같은 나이에 100억원 정도는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골프·경영 컨설팅 듀얼 서비스●골프 컨설턴트
박경호 골프 티칭프로는 서울대를 나와 행시에 합격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세계 컨설팅업계의 ‘빅3’인 보스톤컨설팅에서 컨설턴트로 근무한 경험이 있는 그는 말 그대로 팔방미인형 컨설턴트이다. 그가 첫 공직 생활을 하게 된 부서는 농림부. 공직 생활은 순탄했지만, 그리 길게 가지는 않았다.
“왠지 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세계적인 컨설팅 기업 보스턴컨설팅그룹(BCG)으로 옮긴 배경이다. 민간 부문은 공무원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보람도 적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이 부족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고 그는 회고한다.
컨설팅 기업 티플러스(T-Plus)를 거쳐 중앙인사위원회 사무관인 부인과 함께 동반 유학에 나서게 된다. “경영대학원 입학 허가를 기다리며 보스턴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에 맛을 들인 것이 인생 항로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남들은 80타에 들어서야 이른바 골프 피버(fever)가 온다고 하는데, (저는) 120대에 같은 증상을 겪었습니다.” 골퍼가 말 그대로 그에게는 천직이었던 셈이다.
경영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세계적인 골프스쿨 샌디에이고 골프 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는 지난 2006년 티칭 프로 자격증을 따냈다. 박 씨는 최경주를 광고 모델로 영입하는 등 골프 마케팅에 심혈을 기울이는 신한은행의 주목을 받았다.
부유층 고객들을 대상으로 플레이어의 스윙폼은 물론 실력 향상을 저해하는 사소한 습관, 개선 방안까지 짚어주는 것이 강점이다.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한 그는 사안의 본질을 바로 파고드는 역량이 뛰어나다는 평가다.
프로선수 출신들에 비해 고객들의 심리를 정확히 읽고 정확한 용어로 쉽게 설명해 주는 강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요즘 이런 질문을 가끔 받는다고 한다. 골프를 좋아하는데 직종을 바꿔도 되겠냐는 것이다.
“사람이 산다는 게 어려운 선택의 연속입니다. 선택이 어려운 이유는 하나를 버려야 하기 때문인데, 과연 양자택일에서 하나를 버릴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는 골프를 치며 승부에 집착하지 말고 장미꽃 향기를 음미해 보라던 골프 학교 선생님의 조언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신한은행이 박경호 프로를, 기업은행이 최여진 프로를 각각 영입하는 등 금융권의 골프 컨설팅도 프리미엄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