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그것도 학교 강단에서 인생의 절반에 해당하는 30년 이상을 바친 ‘화이트 컬러’ 원로학자가 퇴임 뒤 홀연히 시골로 내려가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쟁기질 하고, 경운기 몰고, 수확물을 거두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비록 유행가 노랫말처럼 초가삼간은 아니지만 아담한 전원주택에서 부인과 함께 ‘흙과 더불어’ 인생 2막을 음미하고 있는 노교수가 계신 경기도 화성을 지난달 하순에 찾아갔다.

승용차가 향한 목적지는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서울에서 승용차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남짓 달리다 서오산IC에서 빠져나와 국도로 20분가량 밟았다. 한데 노교수가 계신 집으로 올라가는 시골마을 초입에 크고 작은 공장들이 즐비해 있는게 아닌가. 잘못 찾아 왔나 싶어 차량 내비게이션을 확인하니 목적지에 닿았다고 서비스가 종료된 시점이었다.

할 수 없이 휴대폰을 빼들었다. “아, 오셨나요?” 카랑카랑한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다고 전했더니 어느 공장 이름을 알려주며 옆길로 쭉 올라오면 길이 막혀 더 갈 수 없는 곳에 위치한 집이라고 바로 자신의 집이라고 자세히 일러주셨다.

입구쪽 공장들을 지나쳐 10분 정도 올라가니 막다른 곳에 단층 구조의 하얀색 별장 같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 집의 주인장은 다름 아닌 지난 2004년 서울을 떠나 화성에 터를 잡고 흙과 자연을 지기(知己) 삼아 노후생활을 하고 있는 차배근(73세) 서울대 명예교수다.

경기도 화성의 자택 앞 밭에서 손수 일군 토란들을 캐내고 있는 차배근 교수와 부인 신문자씨. [이코노믹리뷰 이미화 기자]
서울대 출신으로 언론정보(커뮤니케이션)학 박사로 후학을 양성하며, 숱한 저작을 집필하고 한국언론학회 회장도 역임했던 차 교수가 도심의 편리한 삶을 마다하고, 노후인생 터전으로 선택한 화성의 시골생활이 무척 궁금했다.

“논농사를 450평(약 1500㎡) 남짓 직접 짓는다. 지금은 추수가 다 끝난 때라 수확한 벼들은 집에서 말려서 푸대에 넣어 모두 정미소로 보내 처리했다.”

수확량은 어느 정도일까. “여섯 가마니(80㎏짜리)가 나오는데 대부분 자식들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우리가 먹는다.”

쌀 농사만 할까. 차 교수는 “건강에 도움되는 거라면 다 심는다. 집 부지와 부모님 묘터를 포함해 전체 면적 4000평(1만3200㎡)인데 배추 무 들깨 토란 등 밭작물과 블루베리 매실 등 유실수도 가꾸고 있다.”

부인 신문자 씨(69세)가 직접 수확한 블루베리로 만든 음료를 맛보라고 대접하셔 한 모금 마셔보니 정말 고소했다. 서울대 조소과 출신인 신 씨는 “나도 명색이 조각가”라고 소개하며 인상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차 교수의 자택 오른편에는 부인 신 씨의 조각공방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몸에 좋다는 작물을 다 해 너무 오래 살까봐 오히려 걱정이다”고 농담조로 얘기하던 차 교수는 “2007년 퇴임 뒤 학교 명예교수는 직함만 단 채 농사에만 전념하고 있다. 이젠 시골서 (도시로) 나가는 것도 싫다. 도시에 가면 왜 그리 복잡한지”라며 현재생활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간혹 한국언론학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나들이를 한다는 차 교수에게 요즘 강의 부탁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은퇴 뒤 5년가량 학교에서 강의를 해주었는데 차츰 귀찮아지더라. 대학 조교 생활까지 합쳐 36년간 가르친 것도 지긋지긋한데…(웃음)”라며 농촌 일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사실 차 교수 내외는 화성의 땅을 지난 1984년부터 구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생존해 있던 부친이 이북 실향민 출신이라 묘자리를 한 번 구해보라는 얘기를 듣고 이곳저곳 수소문하다 지인으로부터 현재의 화성 땅을 소개받았다.

“알고 보니 이 지역이 연안 차씨 집성촌이더라. 보기에 좋아서 별장 하나 짓고 살자 했는데 서울서 내려올 때마다 사람들이 땅을 사라고 하는 통에 책 인세로 받은 돈으로 야금야금 사들이다 보니 어느새 4000평가량으로 커져버렸다.”

이 때문에 초기엔 주변으로부터 ‘에구, 저 바보가 왜 쓸모 없는 땅을 자꾸 사지?’라는 흉 보는 소리를 많이 듣기도 했다.

차 교수는 인터뷰 도중에 집 구조와 바깥 재배작물을 직접 보여주겠다며 기자를 일으켜 세웠다.

제일 먼저 소개해준 서재는 원로학자의 식지 않은 학문의 열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소였다. 천장 높이가 10m에 이르는 서재는 사방으로 펼쳐진 서가에 책들이 빼곡이 꽂혀 있었다. 천장 부근에 특별 설계된 차양 사이로 밝고 따사로운 햇살이 서재를 골고루 안온하면서도 환하게 비춰주고 있어 책상에 앉으면 저절로 학업 삼매경에 빠져들 것 같았다.

책상 바로 앞 벽에는 ‘囊螢堂(낭형당)’이라고 쓰인 한자 붓글씨체의 당호가 걸려 있었다.

낭형당이란 이름은 고대 중국 진(晉)나라의 차윤(車胤)이라는 사람이 반딧불로 글을 읽으며 학문을 닦았던 고사에 착안해 ‘괘랑리(자택 지명)에서 반딧불로 공부하는 방’이란 뜻으로 지었다고 설명해줬다.

서재 '낭형당'에서 집필 구상을 하고 있는 차배근 교수. [이코노믹리뷰 이미화 기자]
책상 위에는 최근 재교정 작업을 하고 있는 자신의 오래된 저서 <미국신문사>, 성신여대 부교수인 큰딸과 같이 펴낸 두툼한 <사회과학연구방법>과 같은 책들이 놓여 있어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틈틈이 집필과 공부에 시간을 할애하는 노 교수의 ‘주경야독(晝耕夜讀)’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차 교수 부부는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는데, 큰딸은 아버지를 이어받아 학자(성심여대 부교수)의 길을 택했고, 둘째 딸은 어머니의 피를 닮아 조각가 겸 전업주부로 활동하고 있다.

서재 소개가 끝내고 야외로 안내하는 차 교수의 발걸음이 칠순을 넘긴 나이를 무색케 할 정도 정정하고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주변 밭에는 수확한 들깨 더미가 햇볕을 쬐며 잘 말라가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김장용 배추와 무가 짙푸른 초록 잎사귀를 위로 싱싱하게 드러내 보이며 잘 자라고 있었다.

요즘 일과가 궁금했다. “하루 종일 아주 바빠요. 일어나면 일거리가 많아. 아침에 운동 삼아 산책하고 식사하고 오전에 잠시 책 좀 보다가 오후에는 농사일을 본다. 밤에는 집필하고 책 읽느라 바쁘다.”

옆에서 듣고 있던 부인이 “여기 내려와서는 농사일이 더 많다. 너무 농사꾼 티를 내고 있다”며 학문 정진을 게을리하는(?) 남편에게 핀잔을 줬다.

그래도 “너무 나이 생각을 안하고 일만 해서 걱정이다”이라며 남편에 대한 사랑을 빠트리지 않았다.

집 앞에 조성한 잔디 정원에는 차 교수 내외의 개인적 취향을 드러내는 시설들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전통 솥가마와 화덕, 에스키모 이글루(얼음집)를 닮은 반원형의 벽돌식 미니 사우나실이 한쪽에 들어서 두 딸의 가족들이 내려오면 애용한다고 한다.

또한 밭 옆에 자연 용천수를 이용한 연못이 있어 농사철에는 농업용수 걱정이 없다고 차 교수는 말했다.

정원 옆에 쌀 가마니를 보관하는 창고와 거실이 있는 본채 등 지붕에는 전기충전용 태양광, 온수용 태양열 시설도 갖춰져 나름대로 재생에너지를 활용하려는 노학자의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겨울에는 봄~가을 작물을 캐낸 자리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상추 등 채소를 가꿔 겨우내 식탁에 올리고 있다”고 소개한 차 교수는 “수확한 쌀은 창고의 정미기로 직접 탈곡해 먹기 때문에 실제로 생활비 부담은 많지 않다”고 밝혔다.

농사일이 좋아도 시골 생활은 불편하지 않을까. “우리 집과 농지 일대는 일종의 ‘도심 속 섬’에 해당한다. 주변이 공장, 주택가, 농지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생필품은 차로 한 10분 거리에 있는 대형마트에서 해결한다.”

농사일도 전적으로 차 교수 본인이 100% 도맡아 하진 않는다고 했다. 집 근처에 사는 팔순 노인분이 차 교수를 도와준다고 했다. 부인이 또 옆에서 “남편은 그 영감님 시다(조수)”라고 살짝 고자질했다.

그래도 차 교수는 농사에 필요한 웬만한 농기구들을 구입해 직접 이용하고 있다. 밭 아래에 따로 세운 헛간에는 고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우는 휴립피복기계를 비롯해 경운기, 분무기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농기계 구입비만 5000만원가량 들었고, 작동법을 제품 구입처나 동네 사람들로부터 직접 배워 이제는 본인 스스로 농기계로 밭 갈고, 종자 심는 작업을 척척 해내고 있다.

차 교수의 농촌 생활은 그나마 순조로운 축에 속한다. 나이가 많고 한곳에서 오래 살고 있는 탓에 농촌 공동체는 나름대로 텃세 아닌 텃세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차 교수는 같은 차씨의 집성촌이라는 혈연적 연고와 대학교수라는 사회적 지위가 일정 정도 지역 텃세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다.

또한 차 교수 본인이 2007년 완전 낙향하기 전에도 주말에 꼬박꼬박 내려와 주민과 인사하고 차를 태워주는 등 지역민과 소통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줘 푸대접을 받지 않았다.

이런 차 교수의 인생2막 소문을 듣고 농촌에서 노후생활을 해보겠다고 도움말을 얻으려 찾아오는 도시인들도 있었을 것 같았다.

“종종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서 방문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대부분 남자들이 많은데, 부인 때문에 결심을 접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요. 동행한 부인이 농사일을 직접 보고는 남편이 전적으로 일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여자가 떠맡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도저히 못한다’, ‘시골로 내려갈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죠.”

차 교수는 “그냥 직접 농사하고 먹고사는 데 만족한다. 그렇다고 완전 생계형 농촌살이도 아니다. 매월 받는 400만원가량 교수연금이 있어 농사로 돈 벌어볼 것이라고 바둥대지 않다 보니 그런 것 같다.”

36년간 섰던 대학 강단에서 내려와 편안한 도시생활을 물리치고 ‘농촌행’을 택한 차 교수 부부의 땀 흘려 농사하며 노후를 건강하게 즐기는 모습은 도피성 생계형 귀농이나 노동 없이 노후생활을 단순히 즐기기 위한 귀촌 차원의 인생2막과는 분명 달라 보였다.

zp8497586r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