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택시’로 인생과 행복을 창조했다

백중선 씨는 청년시절 잘나가는 건설업체 사장이 됐지만 사업 실패 후 노숙자로 전락, 한때 자살을 생각할 만큼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어느 날 우연히 이뤄진 어느 부부와의 만남으로 다시 삶의 의지를 불태우며 3년 전부터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그는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60대에 접어든 인생 후반전, 승차하면 행복해지는 ‘사랑의 택시’를 운행하며 세상에 사랑과 행복을 전파하고 있다.

ⓒ이코노믹리뷰 이미화 기자
2010년 1월. 서울 양재동에서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백중선(63)씨는 눈발이 흩날리는 궂은 날씨에 길을 나섰다. 괴로운 마음에 기차를 타고 이곳저곳 떠돌다가 도착한 곳은 부산 영도구 태종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지에 선정될 만큼 울창한 숲과 기암절벽, 탁 트인 바다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내는 이곳에 백 씨가 온 목적은 죽기 위해서였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 하염없이 고뇌하다가 바다에 뛰어들려고 밑을 내려다봤다. 물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바닷물이 어쩜 그렇게 시퍼렇던지, 파도소리는 어쩜 그리 무시무시한지. 불현듯 엄습해오는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내 생을 마감하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는 건가.’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건설회사 사장에서 노숙자로

백 씨는 1950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건축현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한 그는 호랑이해에 태어난 남자답게 끓는 혈기로 일찌감치 청년시절에 건설현장 하도급 공사를 발주하는 회사를 차렸다. 그 뒤로 20년 넘게 건설업에 몸담으면서 수십 명의 직원을 거느린 주식회사의 대표이사가 됐다.

잘나가는 ‘백 사장’의 생활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고급 승용차, 콘도 회원권, 빌라 등 온갖 물질적 풍요를 누렸고 아내와 여유롭게 배낭여행을 즐기곤 했다. 고급 술집은 다 돌아다니며 온 세상이 다 내 것인 양 거칠 것 없이 살았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데서 오는 자신감이 교만으로 이어진 것일까. 시련은 갑자기 찾아왔다.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보증을 선 것에 문제가 생겨 회사는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전 재산을 몽땅 날렸다. 2009년 가을의 일이다.

그 후부터 그는 극도로 쪼들리기 시작했다. 신용불량자로 전락했고 집은 경매에 넘어갔다. 빚만 쌓이는 가운데 날마다 카드회사에서 수십 통씩 채무 독촉 전화가 걸려왔다. 가족은 경제적으로 큰 고통에 시달렸다. 정말 하루하루 사는 게 지옥이 따로 없었다.

“잘나가던 백중선이가 이게 웬 말인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전철을 타고 서울의 전철역을 무작정 떠돌아 다녔어요. 그리고 노숙생활을 하게 됐죠. 시간이 가면 갈수록 희망은 없어 보였어요.” ‘그래, 차라리 죽어버리자. 그럼 가족도 오히려 편해질 거야.’ 그는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온통 ‘어떻게 죽어야 하나’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굶어 죽기, 막걸리에 제초제 타서 마시기, 부산 태종대 바닷물에 몸 던지기 등 자살할 계획까지 세웠다. 자살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틈만 나면 세상을 뜰 방법을 찾았다. 그 위기를 백 씨는 어떻게 극복했을까.

다시 살게 해준 귀인

기차를 타고 강원도 동해 묵호, 부산 등지로 거리를 전전하며 노숙생활을 하던 백 씨가 전남 목포에 머무를 때였다. 목포역 앞에서 노숙을 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유달산 팔각정에서 어느 부부를 만났다. 어쩌다가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게 됐는데 남편이란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란다. 대표이사까지 한 사람이 무책임하게 세상을 뜨면 남은 가족은 어떻게 하느냐고, 정말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러고는 자기 경험담과 함께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고 한다. “나도 부산에서 신발공장 하다가 부도를 맞았어요. 모든 걸 잃고 가족 몰래 짐을 싸서 야반도주하려고 했어요. 마지막으로 자고 있는 아내 모습을 내려다보는데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 아내 얼굴로 똑 떨어지더군요. 아내가 놀라 잠에서 깨고 말았죠. 어디라도 같이 가겠다는 아내의 애원에 우리 둘은 목포로 떠나왔고 이젠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찾았답니다. 그러니 당신도 용기를 갖고 가족을 위해 박스를 줍든지, 경비를 하든지 무엇이든 해보세요.”

부부와 헤어지고서 백 씨는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렀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죽으려고 하는 힘으로 살아볼 생각을 해 봐.’ “사람의 목숨은 마음대로 못하나 보다. 그래, 쉽게 포기하지 말란 뜻이 아닌가. 한 번 다시 살아보자고 결심했죠.”

그는 굳게 다짐을 하고 당장 서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마음속으로 마지막 노숙지에 작별을 고했다. ‘목포여 안녕, 유달산아 잘 있거라. 내가 잘 되면 다시 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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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택시기사 되기

삶의 끝자락에 서 있던 그에게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는 작은 계기가 운명처럼 찾아왔다. 우연히 교통회관 앞을 지나가는데 많은 사람이 모여 웅성대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거예요?” 무리 중 한 사람이 친절하게 답했다. “택시면허 시험을 보는 중인데 쉬는 시간이라 얘기를 나누는 중이예요.”

정년퇴직하고 괜히 섣불리 창업했다가 퇴직금을 날리느니 택시면허를 따서 운전을 하려고 시험을 보러 온 거란다. 택시면허 시험? “아무나 (시험을) 볼 수 있는 거냐?”고 다시 물었더니, 창구에서 택시운전사 자격시험 접수를 하고 관련 시험지를 사서 공부하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 바로 이거야.’

백 씨는 들은 대로 실행에 옮겼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세 번 도전한 끝에 2010년 4월, 당당히 시험에 합격했으며 곧바로 대지운수에 택시기사로 취직했다. 고통으로 얼룩진 세월을 청산하고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그야말로 감격의 순간이었다.

백 씨는 처음 택시회사에 들어가던 때를 회상했다. “택시 1대당 2명의 택시기사가 배정되는데 1명은 주간, 다른 1명은 야간 근무를 맡게 돼요. 6일간 주간이나 야근 근무를 하고 하루 쉬는 식이에요. 그렇게 26일을 일해요. 근무한 지 1년이 지나야 연차가 생기는데 한 달에 3일 이상은 인정이 안 됩니다. 예순이란 나이에 빠듯한 근무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지, 게다가 한 달 평균 수입이 100만원 정도라고 하니 슬쩍 걱정이 되더라고요.”

실제로 힘든 업무와 박한 수입을 견디지 못하고 금방 그만두는 택시기사들이 많다는 얘기를 회사 동료로부터 전해 듣기도 했다. 그러나 백 씨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가족을 위해 오로지 열심히 일에만 매달리겠노라고. 그리고 잘 해나갈 자신이 있다고.

도전, 사랑의 택시

백 씨는 조금 ‘특별한’ 택시를 운행하고 있다. 승차하면 행복해지는 ‘사랑의 택시’가 그것이다. 사랑의 택시는 그가 택시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할머니 손님을 만나면서 탄생했다. 즐거운 표정으로 손님을 편하게 해주려는 그의 마음 씀씀이에 흡족해한 할머니가 ‘사랑의 택시’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이 기분 좋은 택시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받는다는 의미였다. 그때부터 백 씨는 손님들에게 복을 빌어주며, 최고의 친절과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다.

이후 한 젊은 여성 손님의 권유로 그는 ‘사랑의 택시, 묻지 말고 타세요’라는 문구를 써서 택시 조수석 앞에 붙였다. 그가 택시운전을 하며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기사와 승객 사이의 거리’다. “택시를 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승차 거부나 서로 간의 작은 다툼 등은 그나마 나은 편이에요. 택시가 범죄의 현장이 되는 현실은 기사와 고객 간의 불신을 더욱 깊게 만들었어요. 제 택시를 타는 동안만큼은 손님들에게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주려고 노력한답니다.”

백 씨는 늘 밝은 목소리에 푸근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손님들도 그의 진심을 느끼고 하나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인생 상담을 하다 보면 손님들은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한다. ‘승차 거부 없는 택시’, ‘부당 요금 없는 택시’라는 모토도 고객을 감동시키는 요인이다. 백 씨가 유일하게 승차 거부를 하는 때는 교대시간이라고.

이색 서비스도 있다.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는 안전을 위해 여성 손님이 택시를 타면 자택에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손을 흔들어준 다음에야 자리를 뜬다. 이런 식으로 베풀면서 운전을 하다보니 고객 중에는  거스름돈을 받지 않는 사람이 많고, 외국인은 별도의 팁을 건네기도 한다. 택시에 놓고 내린 지갑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자 감동한 고객이 회사로 선물을 보낸 적도 있다.

물론 모든 손님이 그의 서비스 방식에 호응해주진 않는다. 그럴 땐 기분 나빠하거나 섭섭해할 필요 없이 그냥 잊어버리는 게 상책이란다.

아직도 남은 도전

ⓒ이코노믹리뷰 이미화 기자
택시 운전도 일종의 장사나 마찬가지다. 백 씨에 따르면 잘 되는 날은 하루 들어오는 돈이 200만원이 넘고, 안 되는 날엔 2만원도 채우지 못할 때가 있다.

택시 운전은 ‘오늘 성적이 안 좋아도 내일은 좋겠지’라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백 씨의 지론이다.

“돈의 가치는 액수로 가늠할 수 있는 게 아니죠. 100만원, 200만원이란 돈은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시절엔 하루 저녁 술값에 지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 그 돈은 제게 1000만원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택시기사로 살면서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택시 운전은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가져다줬다. 최고점과 최저점을 오르내리는,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경험하고 나니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보겠다는 열망과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가는 손님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사명감이 함께 솟아났다.

백 씨는 다시 태어난 것에 대해서도 늘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자신의 인생 역정과 사랑의 택시를 운전하며 겪었던 다양한 에피소드를 기록한 내용을 모아 <사랑의 택시 인생극장>이라는 책을 냈다. 책을 출간하게 된 것도 사랑의 택시를 타고 유쾌해진 신문기자 손님이 한 출판사 대표를 소개한 게 계기가 됐다.

그도 이제 어엿한 작가다. 사인을 요청하는 손님이 생겼고, 그의 책을 읽고 감동했다는 박원순 서울시장도 만났다. 박 시장으로부터 택시정책위원회에 참석해달라는 요청도 받았단다. 백 씨는 택시기사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 8월부터는 신규 택시 운수종사자를 대상으로 서울시가 실시하는 친절 서비스 제고를 위한 교육을 맡게 됐다.

“삶을 즐기고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다보니 귀인들을 만나게 되고 좋은 일들이 계속 생기는 게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다 아내 덕분이죠.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더욱 힘내서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곤 하죠. 아내는 제 든든한 후원자이자, 영원한 동반자예요. 나를 살린 아내가 행복하고, 우리 가족이 행복하고, 내가 태운 손님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모든 국민을 위한 행복웃음 전도사’를 목표로 오늘도 그는 서울 시내 곳곳을 힘차게 누비며 손님과 행복하게 대화를 나눈다. “손님, 어서 타세요. 언제, 어디로 가시든 묻지 않고 모시는 ‘사랑의 택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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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성공노트

자본금

택시회사에 취직해 택시를 배정받아 기사로 근무하는 형태이므로 별다른 비용이 들지 않음.

준비기간 및 과정

택시운전사자격시험 공부를 하고 세 번 도전한 끝에 시험에 합격함. 2010년 4월, 택시회사인  대지운수에 택시기사로 취직함.

성공 노하우

손님들에게 항상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제공하는 친절 서비스의 일환으로 ‘사랑의 택시’ 운행. ‘승차 거부 없는 택시’, ‘부당 요금 없는 택시’를 모토로 삼아 고객 감동을 이끌어냄. 밤 12시~새벽 4시 안전을 위해 여성 손님의 경우 자택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자리를 뜨는 이색 서비스도 실시. 하루 수입의 편차가 심해도 내일은 잘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마인드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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