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의 마음으로 컴퓨터를 가르칩니다”

무역회사에서 20여 년을 근무하고 마흔아홉 나이에 퇴직한 이경희(56) 씨. 우연히 지역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40~50대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국비 ‘실버 전문 컴퓨터 강사 양성과정’이 개설된다는 광고를 본 것이 계기가 돼 실버 전문 컴퓨터 강사로서 제2의 인생길을 걷게 됐다.

ⓒ이코노믹리뷰 박지현 기자
이경희(56) 씨는 나이 사십 줄에 접어들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가만히 보니 시간에 항상 쫓기는 생활과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 지친 자신의 처지가 딱했다. 숙명여대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무역회사의 수출영업부에서 일한 지 약 20년. 바이어로부터 주문 받고 자재 발주하고 생산 물량과 품질을 체크하기 위해 공장을 뛰어다니고 선적 계획 세우는 게 주업무였다. 정시에 퇴근한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워커홀릭처럼 밤낮없이 일했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러려고 세상을 달려온 것은 아닌데.’ 잘하면 당연한 일이고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업무 환경도 버거웠다. 정이 뚝 떨어질 만큼 힘들어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었다. 2006년 7월, 그녀는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뭘 한들 지금보다는 낫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비우니 보이는 길

퇴직 후 그녀의 첫 계획은 ‘쉬기’와 ‘혼자 있기’였다. “일이 주위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 힘들어요. 매일매일 받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죠. 정신적으로 편해지니까 날아갈 것 같더라고요. 마음껏 여행 다니면서 운동도 했죠.” 그러나 가슴 한구석에선 아직도 일할 수 있는 나이인데 너무 일찍 포기한 것은 아닌가 하는 미련과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러던 중 2011년 4월의 어느 날, 우연히 송파여성인력개발센터(이하 송파센터)에 40~50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실버 전문 컴퓨터 강사 양성과정’이 개설된다는 광고를 보게 됐다. 국비과정이란 말에 솔깃했다. 컴퓨터 강사가 돼보자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그냥 이 기회에 직장 생활하면서 썼던 오피스 프로그램을 한 번 복습해보자는 마음으로 지원했다. 컴퓨터 실력과 가르치는 일이라면 기죽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원래 중등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어요. 직장에 다닐 때 신입사원 교육을 하곤 했는데 족집게 과외처럼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도록 가르친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그때 알았죠. 내가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직장에서 오랜 동안 쌓은 컴퓨터 실력과 사원 교육 노하우를 살리면 왠지 컴퓨터 강사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류전형, 면접을 거쳐 20명의 교육생 중 한 명으로 뽑혔고 3개월간 치열하게 공부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하루 4시간씩 200여 시간. 철저히 자격시험 위주의 수업이었다. 노인심리학 등 실버 전문강사로서 알아야 할 소양 교육도 있었다. 교육과정이 다소 벅차게 느껴졌으나 동료 교육생들과 스터디 모임까지 만들며 오직 실력을 쌓는 데 매진했다. 마침내 이 씨는 한국생산성본부가 실시하는 국가공인 정보기술자격(ITQ) 한글·엑셀·파워포인트 자격증 시험에서 모두 A등급을 땄다.

싹수의 발견

수료를 앞두고 송파센터에서는 경력을 쌓을 겸 자원봉사를 권유했고 그녀는 송파구자원봉사센터 실버전문강사팀에 들어가게 됐다.

기존 자원봉사자를 대상으로 한글2007 시범강의를 진행했다. 컴퓨터 강사로서의 데뷔 무대였다. “처음이라 그런지 너무 떨려서 말까지 더듬었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뜻밖의 반응을 보였어요. 많은 사람 앞에서 하는 강의가 정말 처음이냐, 어디서 강의해본 적 없느냐고 제게 묻더라고요. 이경희 씨는 지금 즐기면서 자신감 있게 강의를 하고 있다고 칭찬하는 거예요. 속으로 제가 더 놀랐죠.”

스스로도 강의하는 그 순간, 그 시간이 재미있게 느껴지긴 했다. 완전히 몰입해 있는 그녀에게 주변에서 ‘천직’인 것 같다는 말을 건넸다. 천직… 진짜 그런 것 같았다. 실버 컴퓨터 강사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어르신들 눈높이에 맞게 가르치는 스킬이 중요하다. 실버 전문강사로 손색이 없다고 판단한 송파센터에서는 이 씨의 일자리 알선에 팔을 걷어붙였고 마침 강사를 구하고 있던 서초구립방배노인복지관에 정식 강사로 취직됐다.

복지관은 그녀에게 인터넷 기초반과 인터넷 활용반 각각 한 반씩, 일주일에 16시간 수업을 맡겼다. “설마 비전공의 경력도 없는 초보 강사를 주 4일 수업하는 강사로 채용하겠어? 기대도 안 했죠.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복지관 측에서는 초보 강사라서 망설였지만 우리가 보증하는 ‘인물’이니 일단 한 번 맡겨보라고, 절대 후회 안 할 거라고 센터가 강력하게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

ⓒ이코노믹리뷰 박지현 기자

완벽주의 강사

2011년 11월 1일, 방배노인종합복지관에서의 첫 강의. 이 씨는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강의 전날, 온통 수업 준비에만 몰두했어요. 복지관에서 서너 시간 걸려 직접 만든 프린트물 컴퓨터 교재와 인터넷을 점검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어요. 그래도 긴장과 설렘은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제가 ‘초짜’라는 걸 수강생들에게 들키지 말자고 다짐했죠.”

19명 정원이 전원 출석해 강의실은 꽉 찼다. 새 강사로 온 이 씨가 어떻게 수업할지 어르신 수강생들은 기대 만발이었다. 그녀는 포털 사이트 회원가입에 대한 교육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같은 인터넷프로토콜(IP) 주소를 가진 다수의 컴퓨터가 포털 사이트에 동시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을 초보 강사인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수강생마다 일일이 지도했으나 대부분 회원가입이 되지 않았다. 어? 왜 안 되지?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어르신들이 크게 트집을 잡지 않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단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진땀이 난다고. 강의 시작 후, 첫 두 달은 상처도 많이 받았다. 자신과 이전 컴퓨터 강사를 자꾸 비교하는 얘기가 귀에 들리는 것이었다. 개중에는 수업이 재미있어 다음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는 수강생들이 있어 용기를 얻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열정적이고 재미있는 ‘이경희 표’ 강의는 입소문을 탔다.

특히 어르신들에게 난해한 컴퓨터 지식을 하나부터 차근차근히 가르쳐주는 세심함에 다들 매료됐다. 이 씨는 “설명 들을 땐 알 듯한데 뒤돌아서면 잃어버리는 게 우리 나이”라며 “젊은 강사들은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고 그냥 넘어가는데 제 강의는 이해할 때까지 ‘무한반복’해가며 단계별로 쪼개서 설명해주니 훨씬 알아듣기 쉽다는 평가를 해줬다”고 말했다.

“‘카리스마’와 ‘리더십’ 있는 지도력이 제 강의 스타일이에요. ‘선생님’이기 때문에 어르신들에게 야단도 쳐요. 그러기로 허락을 받았습니다. 야단맞기 싫어하는 분은 제게 배우기 어렵다고 말씀드려요.” 혼나더라도 이 강사가 가르쳐주면 확실하게 배울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그래서 그녀의 컴퓨터 강좌는 수강신청이 조기에 마감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 씨 강의의 인기 비결은 철저한 수업 준비. 복지관에서의 수업이 끝난 후에도 바로 집에 돌아가는 일이 없다. 강의실에 남아 30분~2시간씩 다음 수업을 준비한다. 수업 시간 30분 전에도 미리 강의실에 나가 수업자료를 복사해 놓고 강의실 컴퓨터를 꼼꼼히 점검하며 수강생을 기다린다. 어르신들에게 하나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쉽게 알려주고 싶어서다. 그녀의 완벽주의 성향도 한몫했다.

이 씨는 컴퓨터 강사의 길을 걷게 되면서 자신과 두 가지를 약속했다. 첫 번째는 ‘수업 준비를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하자’, 두 번째는 ‘모든 수업 교재를 내 손으로 준비하자’였다. 최선을 다하는 준비만이 강의할 때 자신감과 당당함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4시간 수업하려면 보통 7~8시간 동안 강의 준비를 해요. 준비 과정이 때로는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제 스스로도 계속 공부를 하며 알아가니까 즐겁더라고요.”

쉼 없는 공부

ⓒ이코노믹리뷰 박지현 기자
실버 전문 컴퓨터 강사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지 1년 8개월여. 이 씨가 맡는 강좌도 점점 늘고 있다. 노사발전재단에서 중장년 세대 취업 특강을 진행하기도 했으며 현재 방배노인종합복지관에서 일주일 16시간 고정 강의와 함께 송파여성인력개발센터의 국비 재직자계좌과정인 한글마스터 16회 과정을 2~3개월 간격으로 강의하고 있다.

이 씨는 복지관에서 ‘스타 강사’로 불리는 게 아직도 쑥스럽단다.

“제가 컴퓨터 강사라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에요. 무역회사에 다닐 때도 전문 직업인으로서 자부심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큰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인생 후반부에 이렇게 다시 전문 직업인이 됐으니까요. 그렇다고 자만하면 안 되죠. 항상 겸손하며 노력해야 한다고 제 자신에게 주문합니다.”

어르신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힘든 점은 없을까. 이 씨는 “평생을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세상에서 살아온 분들에게 컴퓨터와 인터넷 같은 가상공간, IT 개념을 가르치고 그 세상을 열어 드리는 과정이 녹록지는 않다”고 했다. 이어서 “자신도 시니어라며 시니어 세대의 마음은 시니어가 잘 알지 않겠느냐”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확히 말씀드리기는 곤란한데 복지관과 여성인력개발센터 강의료가 많지는 않아요. 그래도 경제적으로 도움은 됩니다. 보수만 보고 하는 일이 아니에요. 가치 있는 일을 하니 보람이 더 커요. 첫 수업에서 경계하던 어르신들의 눈빛이 점차 ‘무한 신뢰’의 눈빛으로 바뀌는 게 느껴졌어요. 종강 후, 감사의 문자메시지를 받을 때는 뿌듯하고요.”

100세 시대가 예상되는 고령화 사회에서 디지털 시니어족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많아지므로 실력 있는 시니어 전문 컴퓨터 강사 수요가 많아질 거란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령자들의 컴퓨터 및 인터넷 사용 가능 비율은 12.8%에 그쳐 여전히 많은 고령자가 IT 제품과 서비스를 활용하는 데 거부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 씨는 “고령자들은 주로 집 안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바깥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IT기기와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또 IT 교육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했다.

“IT의 발달로 이제는 은행 업무나 쇼핑, 각종 엔터테인먼트 활동 등을 집 안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잖아요. 고령자들도 이러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첨단 정보기기를 다루는 데 익숙해져야 해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등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으면 가족·친지와 소통하는 기회도 많아지고, 건강관리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 습득이 쉬워지거든요.”

새로운 취미나 여가활동을 발굴할 수 있고 각종 커뮤니티 참여 등 사회활동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어 긍정적이라는 게 이 씨의 설명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전국 250여 개 노인복지관을 중심으로 고령자 정보화 교육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어 시니어 컴퓨터 강사 분야는 발전 가능성이 있는 시장으로 전망된다.

시니어들의 IT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스스로도 완벽한 강사로의 변신을 위해 좀 더 공부해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막힘없이 강의할 수 있는 전천후 강사가 되는 게 그녀의 향후 목표다. “자격증은 컴퓨터 강사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나타내주는 지표이기 때문에 꼭 필요해요. 제가 가진 자격증이 3개예요. 강사로서는 많이 갖춘 게 아니라 좀 부끄럽네요. 올해는 자격증 하나 정도 더 취득할 계획이에요.”

실버 전문 컴퓨터 강사가 이제는 ‘천직’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는 그녀. 정년이 없는 일을 찾은 걸까. “글쎄요. 모든 것은 자기 하기에 달렸죠. 결국 정년도 제가 정하는 것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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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성공노트

자본금

중장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송파여성인력개발센터의 국비 ‘실버 전문 컴퓨터 강사 양성과정’(200시간)을 무료 수강. 여성능력개발원 산하의 각 여성인력센터에서 저렴하게 또는 무료로 각종 강사 양성과정을 운영하고 있어 이를 적극 활용할 것을 권함.

준비기간 및 과정

송파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3개월간 40~50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실버 전문 컴퓨터 강사 양성과정’ 수료. 한국생산성본부가 실시하는 국가공인 정보기술자격(ITQ) 한글·엑셀·파워포인트 자격증 시험에서 모두 A등급을 획득. 송파구자원봉사센터 실버전문강사팀에 들어가 자원봉사자를 대상으로 시범강의를 진행해 경력을 쌓은 뒤, 서초구립방배노인복지관에 정식 강사로 취직함.

컴퓨터 강사가 되려면 컴퓨터 관련 자격증은 필수. 컴퓨터를 처음 배워서 시작하기는 어렵고 기본 실력을 갖춰야 함. 대학졸업증명서, 복지관 경력증명서, 컴퓨터 등 관련 자격증을 고용노동부에 제출해 강사 인증을 받아야 국비과정 강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짐.

성공 노하우

같은 시니어로서 시니어 세대에 맞는 눈높이 맞춤 교육 실시와 철저한 수업 준비가 강의 인기 비결. 끊임없이 공부하며 실력을 키우고 수강생과의 유대관계를 적절히 유지해나가야 함. 실력은 물론 강사 개개인의 리더십과 카리스마, 포용력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함. 새로운 일을 배우고 준비하기보다는 이미 잘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으므로 그 일을 찾아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는 게 훨씬 빠르고 성공할 확률도 높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