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관리 소장’ 다시 찾은 내 ‘청춘 명함’

국내 굴지의 대기업 출신인 차승현(55) 씨는 퇴직 후 사업·농사로 인생 2막을 열었으나 좋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도내 일자리센터에서 재취업 교육을 받고 소개받은 업체에 입사하면서 새출발할 수 있었다. 현재 건물 보안 및 시설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보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 일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그는 “눈높이를 낮추면 얼마든지 즐겁고 행복한 ‘인생 후반전’을 시작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코노믹리뷰 박지현 기자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는데 TV에서 흘러나온 어느 카드회사의 광고 카피가 귀에 확 꽂혔다. 요새 막연한 불안감과 함께 똬리를 틀고 있던 고민거리가 한 방에 해결되는 기분이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결같이 드나들던 그곳, 회사 앞에 차승현 씨가 섰다. 40대 중반에 이른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던 일, 사직서를 내러 온 가장의 마음은 비장했다. ‘나는 이제 떠날 때가 됐다. ‘맨땅에 헤딩’하기로 각오하고 무엇이든 도전해 보자.’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2002년 여름, 회사에 입사한 지 정확히 20년째 되는 날이었다.

 

대부분 퇴직자들처럼 처음엔 자영업 시작

1982년 대기업인 삼성에 입사한 차 씨는 세무와 비서 업무 등 요직을 맡아 20년 동안 근무했다.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마흔 넷의 나이에 돌연 퇴사를 결심했다. 정년퇴직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은 시점에서였다.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이만하면 회사에선 할 만큼 했다. 이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죠.”

갑작스런 결정이었기에 퇴직 이후에 대한 준비는 전혀 안 돼 있는 상황이었다. 무엇을 할지 구상도 할 겸 우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었다. 왜 그렇게 잠이 쏟아지는지… 일주일 내내 잠만 잤다. 그간 직장생활에서 얻은 독이 모두 빠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대부분 퇴직자들이 그렇듯 그도 처음에는 자영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 시작한 사업은 ‘기능성 쌀 개발’ 사업. 게르마늄 쌀을 생산해 판매하는 것이었다. 당시 ‘기능성 쌀’이라고 불리던 건, 금과 은을 입힌 ‘금쌀’ ‘은쌀’ 정도였다. 차 씨는 산학협력 대학과 공동으로 기능성 쌀 개발을 진행, 광물질인 게르마늄을 비료로 만들어 토양에 뿌리고 식물성 게르마늄이 함유된 고품질 쌀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2005년 오피스텔 하나를 구해 상호를 걸고 본격적으로 쌀 사업을 하려던 순간, 판로 개척이란 장벽에 부딪혔다. 공급단가가 맞지 않아서였다. “일반미보다 게르마늄 쌀이 2.5배가량 비쌌으니까요. 기능성 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시기에 제가 너무 앞서갔나 봐요. 지금 했더라면 웰빙 바람과 맞물려 잘됐을 아이템인데… 아내 친구들에게 게르마늄 쌀을 일반미 가격에 처분하다시피 주고 사업을 접었죠.”

두 번째 사업은 ‘친환경 벽지 개발’이었다. 차 씨는 일반 실크벽지에 사용하는 화학물질인 폴리염화비닐(PVC) 대신 자연친화적 잉크를 적용한 천연 벽지를 개발해냈다. 각종 유해물질 및 공해로부터 벗어나 건강한 공간을 실현할 수 있다는 데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충북 음성의 한 대기업 연구소에서도 친환경성을 인정받을 만큼 제품성은 훌륭했건만, 이번에도 판로 확보가 걸림돌이었다.

“기존 거래 업체와의 관계를 끊고 신생 업체를 받아주는 곳은 없더라고요. 그래서 지인의 신혼집에 도배용으로 친환경 벽지를 넘겨주는 걸로 친환경 벽지 사업은 또 끝나버렸답니다. 자선사업한 격이죠. 허허.”

 

ⓒ이코노믹리뷰 박지현 기자
 

 

사업 실패, 농사 포기하고 재취업 선택

이후 다시 아내와 시작한 화장품 대리점은 그런대로 잘됐다. “아내가 피부미용사 자격증이 있어 큰 도움이 됐어요. 저도 피부미용사 자격시험에서 필기시험에 합격한 정도의 실력은 됐고요. 둘이서 24시간 얼굴을 맞대고 낮밤 가리지 않으며 일했죠. 6년째 대리점을 잘 운영해 오던 어느 날, 문득 ‘회사를 그만두고 뭔가 해보려던 게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내에게 (화장품 사업을) 그만하겠다고 말했죠.”

차 씨는 사업을 접고 귀농 준비 차원에서 농사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친구가 빌려준 경기도 용인의 약 660㎡(200평) 땅에 14가지 작물을 재배했다. 곡괭이 한번 들어본 적 없던 터라 어떻게 할지 처음엔 막막했다고. 비닐하우스는 어떻게 치는지, 작물은 종류별로 어떻게 심는 건지, 남들 하는 거 보고 물어보면서 직접 해보는 수밖엔 없었다.

한 번은 쪽파를 거꾸로 심는 황당한 실수를 한 적도 있었다. “농작물은 주인 발자국 소리 들으면서 자란다는 말이 있잖아요. 하루 종일 농작물과 함께 생활하면서 지낸 노력 덕분에 첫 농사는 잘됐어요. 그런데 농사일이  체력적으로 너무 힘이 들더라고요. 얼굴은 물론 팔다리까지 새까맣게 타서 돌아다니는 제 모습을 보고 안쓰러웠는지 아내가 농사를 만류했어요.”

그렇게 농사도 포기했다. 퇴직 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그였지만 가족은 차 씨의 뜻을 존중하고 든든한 힘이 돼줬다. 돈 벌어오는 기계처럼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 남편과 아버지에 대한 보답이었다. 하긴 수년간 해외 파견 근무, 귀국해서도 365일 중 200일은 지방출장을 가는 바쁜 생활이었으니 이제라도 차 씨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게 아내와 자식들의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쉴 수만은 없었다. 회사생활하면서 마련한 집 석 채와 얼마간의 퇴직금을 거의 다 날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지만 차 씨는 경제적인 부분보다 뭔가 일을 하고 싶었다. ‘인생 100세 시대’에 50대는 아직 ‘청년’이지 않은가. 일하는 데서 삶의 재미를 찾을 수 있으므로 체력이 다하는 날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차 씨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 준 곳은 경기도일자리센터였다.

지난해 10월, 그는 아내가 일러준 경기도일자리센터의 베이비붐 세대 창업 및 재취업 설명회에 참석했다. 대기업 퇴직자, 공무원, 자영업 종사자 등 40여 명과 이력서 작성법, 면접 롤 플레이, 창업 및 재취업 마인드 정립 등에 대해 5일간 교육을 받았다. 교육 수료 후엔 이곳에서 개개인의 적성을 고려해 구인 요청이 들어온 기업체와 연계해 줬는데, 그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센터가 소개해 준 드림스페이스에 재취업을 하게 됐다.

 

상가건물 관리소장으로 자리 잡은 새 인생

ⓒ이코노믹리뷰 박지현 기자
재취업을 할 때, 차 씨는 회사에 이렇게 물었다. “여긴 몇 살 까지 일할 수 있나요?” “원칙상으로는 60세이지만 계단 올라갈 힘만 있으면 70세까지도 근무가 가능하다”는 회사의 답변에 그는 안심하고 입사할 수 있었단다.

이곳에서 차 씨는 하루 9시간가량 근무하며 건물 보안 및 시설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까짓 상가건물의 관리소장, 아무나 하는 것 아니냐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건물을 관리하면서 느낀 건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에요.”

화제를 감지하는 정온감지기가 오작동해 비상벨이 울려도 무엇을 어떻게 조치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고 수도관이 터져 물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어쩔 줄을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면서 ‘나는 배울 수 있는 사람인가’를 자문했다. “어찌 보면 모르는 게 있다는 것, 새로운 걸 배운다는 것이 공포 내지는 두려움일지 모르겠지만 모르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 역시 경험이고 연륜이 아닌가 싶어요. 인근의 관리소장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 그들을 선생님 삼아 열심히 배워가며 일하고 있습니다.”

차 씨의 한 달 월급은 150만원 정도. 성실하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능력을 인정받았는지 입사 6개월 만에 급여를 올려준다고 하더란다. 그는 “얼마를 벌고 안 벌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간혹 같은 직장 동료나 후배들이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창피하지 않느냐고도 묻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괜찮아. 머리를 안 쓰니까 무척 편해.” 처지가 예전만 못하다고 창피해하면 자기 자신만 위축된다는 것. 차 씨는 “일할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이해한다’는 뜻의 영어단어 ‘언더스탠드(Understand)’를 제시했다.  ‘타인의 아래(Under)에 서야(Stand)한다’는 의미로 해석해 어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이 그 사람의 밑에서 아랫사람이 되라는 얘기였다. 그러려면 주먹을 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먼저 주먹을 펴서 손에 쥔 것을,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줄 때 받을 수 있어요. 자신의 과거에 얽매여 눈높이를 낮추지 못하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어렵습니다.”

차 씨는 “퇴직자들이 경기도 등 지자체에서 실시하는 다양한 베이비붐 세대 지원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새로운 도전에 나섰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또 “직장생활하는 동안 취미든 자기계발이든 여러 가지를 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퇴직 후 열게 될 인생 2막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역시 직장을 다니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게다가 검도, 아이스하키, 승마, 행글라이더, 열기구, 스킨스쿠버, 볼링 등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다방면에서 실력도 수준급이다.

은퇴한 후 현재의 직장을 구하기까지 11년. 차 씨는 멀리 돌아 돌아서 지금 이 자리에 왔다. 인터뷰 말미에 그가 마지막으로 입에 올린 단어는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뜻이에요. 일할 곳이 있고,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할 수 있고, 날마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데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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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성공노트

자본금

회사생활하면서 마련한 집 석 채와 얼마간의 퇴직금을 사업 자금과 농사일에 투입했으나 두 번의 사업 실패 등으로 거의 다 날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맞음.

준비기간 및 과정

아내가 일러준 정보를 입수, 경기도일자리센터에서 진행한 베이비붐 세대 창업 및 재취업 설명회에 참석해 교육을 받음. 이력서 작성법, 면접 롤 플레이, 창업 및 재취업 마인드 정립 등에 대해 5일간 배움. 교육 수료 후 센터에서 소개한 기업체에 재취업, 상가건물 관리소장으로 하루 9시간가량 근무하며 건물 보안 및 시설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음.

성공노하우

道(도)일자리센터에서 실시하는 베이비붐 세대 창업 및 재취업 설명회와 교육을 활용해 재취업에 성공. 방법도 중요하지만 마음가짐이 더 중요함. 처지가 예전만 못하다고 창피해하면 자기 자신만 위축된다는 것. 자신의 과거에 얽매여 눈높이를 낮추지 못하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어려움. 긍정적인 마인드로 무엇이든 배우면서 하겠다는 자세를 가지는 게 필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