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팔을 전문으로 만들던 이 남자, 한때는 잘 나가는 연구원이었다. 그에게 ‘로봇 태권브이 주먹 전문 박사’란 별명이 붙은 건 그래서다. 나이 서른에 생뚱맞게도 패들(노)로 젓는 길쭉하고 작은 배 ‘카누’와 사랑에 빠졌다. 급기야 본업은 제쳐두고 카누 타기, 카누 제작, 카누학교 설립, 카누 물길 조성 등 카누와 관련된 일이라면 두발 벗고 나섰다. 마흔여섯이 된 지금, 그는 카누로 새로운 제2인생을 개척 중이다. 여태껏 전기전자 공학박사였다면 이젠 그를 ‘카누 박사’로 불러야 할 판이다.

지난 7일 오전, 강원도 춘천의 의암호. 호숫가에 우뚝 선 돛단배 모양의 건물로 들어가니 향긋한 나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뚝딱뚝딱” “슥삭슥삭” 카누를 다듬는 학생 서너 명의 눈빛이 진지했다. 카누학교에서 카누기술 및 제작을 가르치는 장목순(46)씨가 카누를 만드는 현장이었다.

나뭇가루 뒤집어쓴 작업복 차림의 그가 취재진을 맞았다. 서글서글한 인상이 딱딱한 연구원이라기보다는 맘씨 좋은 이웃사촌처럼 보였다. 딱딱한 전기전자 이론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이성과 카누를 젓는 부드러운 감수성은 한 사람 안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 것일까. 카누·전원생활로 버무린 두 박자 인생의 ‘명물 박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카누가 왜 좋은 겁니까?”

캐나다서 카누 매력에 빠져 독학으로 제작 나서다
그는 캐나다 연구원 시절부터 카누에 매료됐다. 한국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서른 살, 캐나다 토론토대학으로 건너가 화성탐사선 로봇 팔과 우주로봇 팔 관련 NASA프로젝트에 참여하던 때였다. 평소 캠핑을 즐기던 그는 카누를 좋아하는 지도교수와 주말마다 인근 호수로 카누여행을 떠나면서 푹 빠져들었다.

“카누 안에서 내다보는 바깥 세상은 또 다른 세계에요. 직접 경험해 봐야 아실 텐데…. 밤하늘의 별은 소금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어찌나 아름다운지. 카누 하나만 있으면 호수를 따라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최상의 도구가 바로 카누더라고요.”


도시생활에 깊이 젖어있던 장 박사에겐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국과 달리 부모와 같이 자연을 즐기며 카누잉을 하는 캐나다 아이들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카누를 만나게 된 인연은 그렇게 찾아왔다. 가족과 종종 카누여행을 다니며 언젠가 꼭 카누를 만들어보겠다고 결심한 것도 바로 그때다.

외국 생활 7년째 되던 어느 날. 어느덧 캐나다 사람이 다 된 열살짜리 딸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심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는 곧바로 이민생활을 접고 귀국해 후배와 조명전력제어 회사를 차린 뒤 연구소를 맡았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서의 삶은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부모는 직장생활에 얽매이고 아이는 학교생활로 분주한 바쁜 도시생활.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캐나다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던 경험 때문인지 각박한 도회지 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몹시 힘들었다. 시골에 뿌리 내릴 또 다른 삶의 터전을 본격적으로 찾아 나선 것도 그 때였다. 그 중 눈에 들어온 곳이 강원도 산골짜기, 고성군 토성면 굴삭다리였다. 아내의 동창이 살고 있는 곳이라 자주 놀러 갔다가 자연과 교육환경이 아이에게 도움에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2009년 그는 아예 이곳으로 귀촌했다.

그런데 장 박사네 가족만 내려온 것은 아니다. 자녀 교육 겸 제2인생을 미리 준비한 지인들 네 가족과 공동으로 고성군 일대의 땅 1500평을 마련했다. 각 300여평 부지에 40평형 단층짜리 나무집을 손수 지었다. 대지 2000만원에 인테리어 4000만원, 총 6000만원의 비용이 들었다. 완공까지는 2년이 걸렸다.

“진짜 집 저렴하게 지었죠? 땅 구입, 건축, 시공까지 모두 직접 했기에 가능했어요. 자재도 거의 재활용품을 썼거든요.” 장 박사 집을 포함한 다섯 가족이 공동체를 형성, 하나의 마을을 이뤄 오순도순 지내고 있다.

“집을 짓고 나니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게 카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카누가 일상인 캐나다와 달리 한국에서 카누는 너무나도 생소한 문화였어요. 정보가 부족해 관련 책자를 사서 독학으로 공부하며 카누 한 척을 만들었죠.”

완성된 첫 작품에 고진감래의 기대가 깃들어서일까. 직접 제작한 카누를 저으며 물살을 가르던 뿌듯함과 묘한 카타르시스를 잊을 수가 없단다. 잠시 끊어진 듯했던 카누와의 인연은 그렇게 다시 이어졌다.

장목순씨는 카누를 직접 제작할 수 있는 카누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책만으로 카누를 배우기엔 분명 한계가 있음이 느껴졌다. 곧바로 그는 테드무어라는 카누장인을 찾아 캐나다까지 날아갔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꼬박 한 달 간 카누 공부에 ‘올인’ 하는 열정을 불태워 100% 수제 캐내디언 우든 카누(나무 카누)를 탄생시켰다. 드디어 장목순씨의 새로운 두 번째 인생이 본격적인 서막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국내 최초의 카누제작학교를 만들다
“자연과 함께 하는 즐거운 놀이이자 운동, 가족과 즐길 수 있는 건전한 레저,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운동, 물 위에서 느껴지는 아늑함과 편안함, 땅에서는 볼 수 없는 색다른 풍광들…. 카누의 장점이 이렇게나 많습니다.”

카누 예찬론을 늘어놓으며 은근히 신이 나는 눈치다. 땀 흘려 직접 지은 카누를 타면 기쁨은 두 배가 된다. 장 박사는 여러 사람들과 이런 감성들을 공유하고 싶었다. 지난해 1월 그가 춘천에 카누제작학교를 세운 이유다. 소규모 카누 제작소 및 학교는 국내에 몇 안 된다. 그중에서도 그의 카누학교는 정통 캐나다식 카누를 만들고 판매한다. 원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직접 만들 수 있도록 가르쳐준다. 학교 겸 공장인 셈이다. 공구와 재료는 모두 여기서 제공하므로 몸만 오면 된다.

“(카누 만들기가) 왠지 어려워 보일 것 같다”고 운을 떼자 “절대 그렇지 않다”고 딱 잘라 말한다. “카누 한 척을 제작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며 전문가는 3~4일에 한 대, 초보자라도 열흘에서 2주면 한 대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카누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제대로 타는 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는 게 장 박사의 설명이다. 직진, 후진 등 노 젓는 법 몇 가지만 익히면 쉽게 탈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카누를 제작하고 타는 사람들의 현장 실습을 코치하고 있다.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모두 즐겁죠. 늘 새로운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감동의 물결이 밀려온다고나 할까요.” 장 박사는 다짐했다. 가족 단위로 카누를 타고 한국의 아름다운 호수와 강 곳곳을 누빌 수 있는 새로운 물길을 열리라. 그리고 곧 실행에 옮겼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았다. 하천점유휴가, 수상레저사업권 등 필요한 법적 절차를 마치는 데만 1년이 걸렸다. 지난해 7월 물레길 사업은 그렇게 출발됐다.

카누 대중화위한 물레길 조성에 나서다
물레길. ‘물길을 따라 여행하는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장 박사는 지난 7월 출범한 사단법인 물레길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요즘 걷기 열풍으로 올레길, 둘레길, 나들길 등 전국에 수많은 ‘길’이 생겨나고 있는 데서 착안해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강과 호수에서 가족과 함께 카누, 요트 등의 수상 레포츠를 체험하며 다양한 아웃도어 문화를 즐길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이를 위해 춘천시와 손을 잡고 물레길 관리, 카누 타기 교육, 카누 캠핑, 카누 제작학교생 교육, 사회봉사 등의 일을 하고 있다. 강원도는 물이 맑고 경치가 좋아 유독 카누 타기에 좋은 장소가 많다. 장 박사가 첫 선을 보인 춘천물레길은 카누로 의암호 일대를 돌아보는 여행지로 붕어섬길, 중도길, 의암호수 경유길 등 3개 코스가 개발돼 운영되고 있다.

카누학교·물레길에 그가 들인 비용은 5억원 정도로 적지 않은 금액이다. 카누학교에서 얻는 수익을 가져가느냐고 묻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다시금 물레길에 고스란히 투자한단다.

그리고 사회단체와 연계해 저소득층 자녀, 장애아동, 군 장병 등에게 카누 무료 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만으론 갈증을 느낀 것일까. ‘카누 홍보 돌격대장’ 장박사는 또 사고칠 준비에 나섰다. 산만한 아이들에게 고요하고 집중하는 사고를 가르치는 카누재활치료를 하겠다는 것이다.

성사되면 국내 최초가 아닐 듯 싶다. 또 지자체와 새로운 카누 관광프로그램도 계속 개발할 계획이다. “물레길은 이제 걸음마 단계입니다. 앞으로도 뜻이 맞는 사람들과 ‘물 위의 행복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별별 노력이라도 다 할 겁니다.”

카누에 전기전자 접목 새로운 꿈을 꾸다
시내와 떨어져 산골마을에 사는 유유자적한 삶. 평화롭긴 해도 불편한 점이 없을까. “왜 없겠어요? 얼마 전까지 인터넷, 전화도 안 터졌는 걸요. 주변에 편의시설이 없어 커피 살 데도 없어요. 커피를 워낙 좋아하는데 여기서는 마시는 것도 일이라면 일입니다. 하지만 즐거운 점이 더 많죠.”

지상낙원이 따로 없단다. 이곳에선 이웃과 따뜻한 밥을 나눠 먹는 게 일상이다. 품앗이로 서로 도우며 정이 돈독해지니 다 같은 가족이다. 첫 번째 집 아빠가 등교를 맡아 차를 운전하면 하교 때 귀가하는 아이들을 데려 오는 것은 또 다른 집 엄마가 하는 식. 자녀 교육 면에서도 훨씬 긍정적인 효과가 있단다.

자연학습이 저절로 되고 학과 수업 외에 무료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방과 후 활동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교육비가 따로 안 들어가 도시 보다 생활비가 1/3로 대폭 줄었다. 한 달 생활비가 50만원 밖에 안 든다는 얘기다.무엇보다 주말이면 소양강을 따라 카누캠핑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뱃놀이뿐 아니라 자연 속에서 넉넉한 마음으로 가족이 함께 할 수 있어서다. 여유로움, 어울림, 소박함이 깃든 산골생활에 장 박사는 그저 행복하고 감사할뿐이라고 한다.

낮에는 카누에 미쳐 살고 밤에는 대학교에서 연구원 일을 병행하고 있다. 대학 강의도 한다. 연구를 언제든 그만 둘 수도 있겠지만 요즘처럼 융·복합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시대에 카누에 전기전자를 접목할 수 있는 분야를 연구해볼 생각이란다.

“카누를 돈벌이로만 하면 불행할 거예요. 만드는 재미, 타는 즐거움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면 정말 최고의 행복 아이템이죠.” 만인의 행복을 위해 한국에 카누문화를 심는 것, 카누박사 장목순씨의 또 다른 꿈이자 도전이다.

춘천 카누제작학교는?


카누학교에서 카누 제작을 배우면 카누 만들기나 타기는 물론 카누학교 운영, 수상레저 사업, 목가구 제작 등과 연계한 창업이 가능하다. 카누를 타면서 여행관광업도 모색해 볼 수 있다.
카누 제작 단기수강과정 : 2주(10회 정도), 280만원
카누 제작 주말반과정 : 5주, 280만원
카누 타기 : 3만원 선. 30분 조교 강의와 카누 투어.

전희진 기자 hsm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