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런 노래 제목을 들어본 적이 있다. 실내조경 디자이너로 첫 발을 뗀 이경자(59)씨가 그랬다. 어디서 샘솟는지 지치지 않는 정열이 꽃보다 곱고 화사하다. 그는 열정적 언어로 털어놓았다. 꽃과 나무를 매개로 한 자신의 설레는 두 번째 인생을.

유리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자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 사이로 무시무시한 공구들이 시선을 붙잡았다. 검정색 의상을 입은 예쁜 외모의 여인이 두 손에 든 묵직한 공구.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다. 영화 ‘툼레이더’에서 안젤리나 졸리가 맡았던 주인공 여전사 라라 크로프트가 떠올랐다.

이경자씨를 만난 건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자택에서였다. 화초들로 꾸민 집 앞 골목을 지나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또 다시 이어지는 싱그러운 자연 화단. 솜씨를 보니 역시 꽃과 나무, 인테리어를 디자인하는 전문가다웠다.

10년 가까이 옷 가게 사장이었던 그가 실내조경 디자이너로 홀로서기 할 수 있을 거라고 내다본 이들은 많지 않았다. 워낙 생소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조경은커녕 미술 공부도 해본 적이 없던 그가 어떻게 변신할 수 있었을까.

45살, 인생의 위기를 맞다

이야기는 1997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편의 토목회사에서 몇 년 동안 사무실 살림을 도맡아 하던 마흔 다섯 살 이경자씨는 갑자기 큰 위기를 맞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남편과 함께 운영하던 사업을 정리했다고 적는 편이 옳다. IMF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경영 악화로 어쩔 수 없이 부도를 맞았으니까.

이후 3년간 가족은 정말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서울 강남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부부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소주로만 보낸 생활이 1년. 그는 “답답해서 한숨만 나오고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고 말했다. “자격지심이 들었어요. 내 처지를 우습게 볼 것 같아 친구들도 안 만났죠.”

그래도 두 딸에게는 부모의 어려움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기죽을까봐 내색 한 번 안 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돈을 쓸 줄만 알던 이경자씨의 고난에 대한 첫 기억이다. 남자는 나이 들어서 사업에 한 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선다는 게 사실상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이경자씨 스스로도 결혼 전에 직장 생활을 한 번 안 했는데 다 늙어서 ‘진짜 사회’로 나가려니 덜컥 겁이 났다고.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아이들을 생각하면 이대로 대책 없이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내가 뭘 해도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회고한다.

그 시련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던 그는 ‘극복’의 명수가 됐다. 어떤 일이든 못할 건 없다는 의지와 베짱이 두둑이 생겼다. 그리고 사람은 어려움을 극복해 봐야 큰 그릇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든 집안 사정을 숨기기 말걸 그랬다.

아이들과 그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가며 살아가는 지혜를 깨우치게 했으면 어땠을까 후회가 된다”고 털어놨다. 그는 “날 강하게 만든 건 고생”이라고 말한다. 훗날 실내조경이란 생소한 분야에 뛰어들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를 얻게 된 밑거름이 됐다.

(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55살, 의류 사업 생활전선 뛰어들다

뭘 하면 좋을까.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이디어를 모으던 중 큰 자금을 들이지 않고 서울 신촌 아웃렛 매장에서 옷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본격적인 사업가로서의 시작이었다. 비즈니스 자질을 타고 났나.

어렵지 않았고 오히려 ‘장사란 게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구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찰이 따박따박 수중에 들어오고 특유의 유머와 사교성으로 단골도 꽤 만들었으니 말이다.

단독 매장을 마련하고자 2년 후 방이동으로 옮겨 숙녀복으로 사업을 이어갔다. 하루 평균 매출 100만원. 나름대로 괜찮은 수준이었다. 5년간을 그렇게 꾸준히 운영했다. 그러다가 나라 경제가 어려워졌다. 경기에 민감한 업종인 탓에 매출이 점점 떨어졌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겠다며 2년을 더 버티다가 결국 그는 2007년 옷 사업을 접었다.

다행히도 예전에 남편의 회사 부도 상황 속에서 건진 중장비 하나가 있었는데 월 임대료 100만원으로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다.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더라고요. 이제는 좀 쉬고 싶었어요. 그동안 못 해봤던 여행을 실컷 다니면서 자유의 시간을 만끽했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 1년쯤 지나자 점점 지루하게 느껴졌다. 평생 일을 해왔기 때문일 테다. 그는 자주 삐걱댔고 종종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활력소가 필요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직면한 현실은 참담했다. 나이 50이 넘은 아줌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50대는 이제 식당에서도 안 써준다고요. 그 말이 딱 맞더군요. 다시 가게를 차리기는 싫고 취직은 여의치 않고…. 위험 부담이 크지 않고 나이 제한도 없는 일을 찾아야 했죠.” 그때였다. 컴퓨터 화면 안에서 실내조경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의 마음으로 확 꽂혔다.

59살, 실내조경 디자이너 행복을 되찾다

이경자씨는 “주변 사람들은 내가 실내조경을 한다고 했을 때 의아해 했다”고 말했다. 실내조경에 대한 인식이 아직은 널리 퍼져 있지 않아서다. 하지만 그는 확고했다. “원래 꽃을 참 좋아했어요. 화분들을 사다놓고 꽃에 물을 주는 게 그저 즐거웠죠. 비실비실한 놈을 살려놓으면 또 신기하면서도 기특하더라고요. ‘아, 이거구나’ 싶었죠.”

그의 나이 쉰아홉이었다. 실내조경과 관련한 정보라면 뭐든지 찾아봤다. 그럴수록 한 번도 접해보지 않았던 분야지만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혼자 배우고 터득하며 집수리를 성공적으로 끝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 손재주와 눈썰미도 웬만큼 있는 듯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긍정적인 답을 얻는다. 확신이 든 후 실내조경 학원에서 3개월간 본격적으로 실내조경을 공부했다. 나무와 꽃의 종류 및 특징, 식재와 관리 방법은 물론 고객을 응대하는 법을 배웠다. 실제 현장에 가서 작업을 도우며 현장 일도 몸소 체험했다.

“조경은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60을 앞둔 나이에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공부하고 함께 작업하며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과정이 제게 용기 있는 도전이었어요.” 학원 수강 시간은 일주일에 두 번이었지만 그는 매일 공사 현장에 틀어박혀 지냈다. 재밌기도 하거니와 젊은 사람들을 언제 따라잡겠냐 싶어 의욕을 불태웠다.

남들보다 2~3배는 더 체득하려고 열심이었다. 학원 강사에게 항상 다음 공사 일정을 묻고 따라다니며 ‘노가다’를 엄청나게 뛰었다. “학원 선생님을 비롯해 동료들, 가족, 동네 사람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어요. 사실 ‘나이 먹은 사람이 과연 잘 할 수 있겠어? 며칠이나 버티겠어?’ 이런 시선들이 대부분이었죠. 냉소적인 우려를 ‘대단한데’라는 놀라움과 감탄으로 제가 바꿔놨답니다.”

‘실내조경 디자이너 이경자’의 고속 성장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차츰 인정받으면서 이경자씨 앞으로 일이 떨어졌다. 키가 쑥 자란 나무들을 자르는 리폼부터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화단 배치 작업까지 강사는 믿고 맡겼다.

그 열의와 노력은 학원 수료 이후에도 계속됐다. 갈 수 있는 현장만 있다면 거기엔 한결같이 이경자씨가 있었다. 그는 차근차근 실내조경 디자이너로 입지를 다졌다. 그리고 곧 창업에 나섰다.

따로 사무실을 내지 않고 인터넷 블로그를 통한 1인기업 형태다. 둘째 딸의 도움을 받아 실내조경 설계·시공·A/S를 전문으로 하는 ‘나래울조경’을 차렸다. 20여 가지의 공구 마련비로 200만원 정도가 들었다. 자금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오랫동안 바깥일을 하면서 아이들 곁에 있지 못했던 시간을 이제는 함께 보내기 위해서다.

이경자씨가 실내조경 디자인을 담당한 한식 레스토랑의 화단(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식당서도 안써준다는 위기의 50대에
위험부담 적고 나이제한도 없는 새로운 일을
찾아야했죠. 그때 컴퓨터에 실내조경이란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죠.

인생 후반전, 실외조경까지 넘본다

‘나래울조경’이 오픈한 지 6개월여. 주로 아파트나 빌라, 회사에서 의뢰가 들어온다. 그러면 이경자씨는 고객의 취향과 요구에 따라 디자인을 구상하고 적절한 재료를 직접 구입해 공사를 한다.

구조물은 미리 만들어 설치하고 나무나 꽃 장식품을 디자인에 맞게 배치하면 완성이다. 실내조경 디자인은 평당 100만원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2평가량의 베란다 공사가 대부분. 정자(亭子)와 같은 다른 시설물도 설치하게 되면 약 50만원이 추가된다. 시공 시간은 보통 하루 안에 끝난다.

창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홍보 단계다. “시공 실적이 많지 않고 나를 홍보할 마땅한 자료가 없어 어려움이 있긴 해요. 조경 관련 전시회나 박람회를 자주 다니면서 자료와 아이디어를 얻고 있죠. 열심히 실적을 쌓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가는 중입니다.”

그는 집에서 한 시도 가만있지를 않는다. 실내조경에 관한 별의별 실험들을 진행한다. 디자인은 늘 새로워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그런 노력 덕분일까.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그의 디자인은 입소문으로 알려져 알음알음 의뢰가 끊이지 않고 들어온다. 이제 그는 실외를 넘보기 시작한다. 마당, 옥상 등 외부 조경은 공사 단위가 커지기 때문에 받는 금액도 더 높다. 최근 실외조경 쪽을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단다.

그는 2시간 가까운 인터뷰 내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정과 진지함을 갖고 답했다. “실내조경 일은 제게 행운이자 행복입니다. 땀 범벅이 되고 온몸은 흙먼지를 뒤집어써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아이들이 말하기를, 조경을 하면서 엄마 얼굴에 생기가 난다고 하네요.” 그는 자신의 인생2막 에너지의 비결로 자신감을 꼽았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나를 발전시키는 데 한계를 두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의 나머지 인생은 이 목표 아래에서 흘러갈 듯하다.

“실내조경은 섬세한 조화의 美學”

‘실내조경이 꽃과 나무를 심고 장식하면 되는 거 아냐’라고 한다면 큰 오산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전기코드, 배수판, 부직포 등 들어가는 재료가 많고 복잡하다. 자르고 깎고 뚫고…. 필요한 공구도 종류별 톱, 타카, 전동 드라이버, 드릴 등 20여 가지나 된다. 기본이 꽃과 나무를 심을 틀을 만드는 것인데 목공 작업이 필수다.

처음에 요란하게 돌아가는 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일이 무서웠단다. 이뿐만이 아니다. 무거운 돌과 화분도 몇 개씩 거뜬히 날라야 하니 건강하고 튼튼한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여자가 하기에 힘든 부분이 적지 않지만 꽃을 규모 있게 배치해 심는 섬세함은 강점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도 나무 식재를 얼만큼 체계적으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심느냐다. 실내용 정원이므로 멸균처리된 흙으로 시공하거나 이끼를 덮어 흙을 날리지 않도록 하는 부분도 신경 써야 한다. 생화의 경우 식물이 오래 살 수 있도록 일조량도 조절해줘야 한다. 조화로움의 미학이 돋보이는 것이 바로 조경이란다.

그가 나이 들어서 힘들었던 점 한 가지. “역시 나이는 못 속이나 봐요. 외국어로 된 길고 어려운 꽃 이름이 잘 안 외워지더라고요. 하루에 2개씩만 암기했답니다.”

전희진 기자 hsmil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