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우리 또래는 은퇴 이후 자영업을 많이 하지만 초기자본 회수에 애를 먹죠.
욕심을 버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젊은 날은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다. 그 새 30년 남짓한 세월이 흘러 자식들을 다 키워 놓고 나니 스스로의 앞날이 고민이더라. 퇴직 시기는 가까워지고 직장에서는 젊고 혈기 왕성한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할 것 같은 노파심이 들 때.

남은 인생은 긴데 앞으로 뭘 해야 좋을지 불현 듯 걱정이 앞섰다. 한때는 경제 성장을 주도했던 ‘붐’의 주역이 되려 ‘짐’이 되지 않을까 괜스레 자신감도 없어진다. 이 시대 베이비부머 세대의 전형이다.

그러나 여기, 이러한 고민을 딛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선 이가 있다. 그가 말한다. “걱정하지 말라”고. 당신은 충분히 열심히 살았다. 남은 인생, 어떻게 하면 악착같이 돈을 모을지 고민하기보다 벌어놓은 돈을 이제는 적당히 자신을 위해 쓰고 적당히 수입을 유지하며 진짜 원하는 삶을 살면 행복해질 수 있단다.

그가 먼저 이 전철을 밟고 목적지에 다다른 후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깊은 시름에 한숨 쉬는 이 땅의 동지들에게.

대기업 홍보맨 20년 “앞만 보고 달려”

동부화재 홍보팀의 부장으로 재직하던 53세 원승관씨는 정년을 2년 남겨 두고 회사를 나왔다. 꼬박 20년을 한 그룹에 몸 담았다. 동부화재에 입사하기 전 10년은 타 회사에서 역시 월급쟁이로 일했다.

원씨는 회사를 나올 때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더 많은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고, 스스럼없이 자신의 자리를 내줬다. 직장 생활을 잠시 접고 쉬고 싶은 바람도 굴뚝같았다.

‘3년은 쉬어보자’고 생각했다. 열심히 일해왔으니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원씨의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일을 하지 않으니 몸과 마음이 모두 축 처져 생각보다 즐겁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해야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두 가지의 일을 배우자고 결심했다. 첫째는 조경, 둘째는 자전거 정비였다. ‘배워서 남 주나’란 생각이 들었다. 조경은 말 그대로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이었다. 이 일은 즐거웠지만 당장에 직업으로 삼기에 내키지 않았다.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가 자전거 정비였는데 그는 알고보니 30년간 자전거를 타온 자전거 마니아였다. 타던 자전거가 고장나면 제 손으로 뚝딱뚝딱 고쳐 낼만큼 자전거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마침 서울시가 자전거 도로를 만들고 전국민 자전거 타기 운동을 벌일 때였다. 그는 서울시에서 실시하는 ‘Bike mechanic(자전거 수리공)’ 교육을 받았다. 고급 자전거를 정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교육이었다.

1000만~3000만원대의 고급 자전거를 수리하는 기술은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영역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만큼 희소성이 있었다.

자전거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그는 정비에 재미를 붙였다. 자전거 정비 분야는 국가자격증은 없지만 BCI(Bike clinic institute)라는 자전거 미케닉 양성 기관에서 자전거 정비 교육을 수료하면 자격증을 발급해 준다. 그는 여기서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 취득을 위한 교육 이수 시간은 80시간, 수강료는 100만원이라 만만치 않았다. 원씨는 “국내에 이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이후 원씨는 자전거 정비와 관련된 일을 하자고 마음 먹었다. 그래서 접하게 된 일이 자전거 대여소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처음 듣는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대기업 부장 출신이 자전거 대여소를 관리하는 일을 한다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마음의 평온·건강 함께 잡은 선택

그러나 그의 생활신조는 여기서 드러났다. ‘재미있는 일을 하자’는 각오로 임했다. 당시 서울시에서는 한강 전역에 설치한 12군데의 자전거 대여소 관리인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에 지원했다.

그의 나이 55세가 된 올해 3월부터 한강 뚝섬 지역의 자전거 대여소에 채용돼 일하게 됐다. 지금은 민간 기업이 이 대여소를 운영한다. 한강 유역의 12개 대여소 중 규모가 가장 큰 곳이다.

원씨는 여기서 월급을 받는다. 183대의 자전거를 유료로 시민들에게 빌려주고 대여료를 받는다. 그리고 이 자전거 전부를 관리하는데에 그가 배운 정비 기술이 유용하게 쓰인다. 이촌, 광남 지역에 출장 정비사로 나가기도 한다.

오전에 문을 열지만 이 시간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적어 한가한 편이다. 그러나 오후부터는 시민이 많이 몰려 바쁘다. 주말은 눈코뜰새 없다.

취재하러 간 날도 오후부터 시민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이곳은 주로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많다.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방문한 한 가정 주부는 아이의 키에 맞는 사이즈의 자전거를 원씨와 함께 이리저리 고르고 있었다.

원씨는 이 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고 설명했다. 과거 기업 재직 시절 홍보를 맡아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만나는 사람의 폭이 제한돼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대한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그는 직접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줄 때도 많다. 일흔네살의 할머니가 와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워갔을 때 그는 가장 뿌듯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일을 하다 보니 육체노동으로 몸은 힘들지만 원씨는 “마음이 편하다”고 이야기했다. 홍보 관련 일을 할 때는 조직 안에서 짜여진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며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머리가 맑고 과거보다 오히려 건강해졌음을 느낀다.

원씨의 가족은 아내와 두 명의 자녀. 둘째 딸은 결혼을 했고, 첫째 아들은 인디 밴드 ‘해브어티’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공연 섭외가 많이 들어온다며 아들 원섭군의 자랑을 늘어놓는 그는 이제 정말 걱정이 없어 보였다.

다 성실하게 살았던 인생 2막 덕분이 아닐까. 그는 열심히 다녔던 회사에서 자녀 학비를 지원해줘 높은 학비에 대한 부담을 덜었다고 얘기했다. 지금은 회사를 나온 그에게서 여전히 회사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애사심이 드러났다.

“이제 아내와 둘이 도란도란 살아가는 일만 남았다”며 원씨는 앞으로의 꿈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꿈은 단 하나, 공기 좋은 시골에 작은 집을 지어 아내와 함께 사는 일이다. 그 때가 되면 마당에 꽃도 심고 나무도 심어 몇 년 전 배웠던 조경 기술을 활용할 수 있을 것. 배운 기술을 허투루 쓰지 않는 그의 알짜배기 같은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는 과거에 비해 확연히 수입이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원씨는 지금 하는 일을 돈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인생 2막에 대해 남다른 지론을 갖고 있었다. 남들은 은퇴 후 어떻게 하면 돈을 벌까 궁리하지만 원씨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는 것.

“우리 또래는 주로 은퇴 후 자영업을 많이 하지만 벌어놓은 돈을 초기 자본으로 투자하면 그 자금을 회수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미지수다”라며 “그 대신 욕심 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찾으니 마음이 편하다”고 덧붙였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 욕심을 내려놓으니 경제적으로 아주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소박하고 즐겁게 살게 됐다는 설명이다.

다른 일을 하면 계획만큼 잘 되지 않을 경우 애써 번 돈을 날릴 가능성도 있다. 그는 뒤늦게 사업의 성패 여부에 전전긍긍하며 인생의 즐거움도 놓치고 건강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최선의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매일같이 전망 좋은 한강을 바라보며 삶의 여유를 즐긴다는 그에게서 진정한 ‘인생 2막’의 모습에 대한 답이 그려졌다.

백가혜 기자 lita@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