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명품 퓨전 레시피 성공시대 “마니아층 만들었죠”

김대표는 최근 록밴드 옛 멤버와 함께 홍대앞서 ‘홈 커밍 데이” 공연을 가졌다. 사업에서의 성공이 그의 옛꿈을 되찾는 여유를 선물했다.

젊은 시절에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했다. 부러울 것도 아까울 것도 없는 청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디 록 밴드 보컬로 홍대 앞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며 희열을 느끼는 순간, 인생의 첫 번째 꿈은 이미 실현됐다. 처음에는 음악이 자산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난과 배고픔의 현실이 눈앞에 드리워졌다. 제2의 인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노래가 전부였던 그에게 새 인생에 대한 고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뒤로 넘겨 질끈 묶은 긴 머리에 덥수룩한 턱수염, 범상치 않은 외모는 한 눈에도 그가 평범한 라면가게 사장은 아니라는 인상을 줬다. 김병삼(46) ‘맛좀볼래’ 대표는 젊은 나이에 요식업계 창업에 뛰어들어 단기간에 프랜차이즈 사업체를 보유했다. ‘맛좀볼래’는 한국식 라면 전문점으로 30여 가지의 라면 메뉴 외에도 주먹밥, 돌솥밥 등 50개의 다양한 메뉴 수를 자랑한다. 지난 2002년 3월에 오픈해 그 해 5~6월경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비결은 메뉴의 다양화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한국식 라면을 만들되 다양한 레시피를 사용해 메뉴를 늘렸다. 대다수의 라면 가게가 보유한 기본 메뉴 외에도 북어탕라면, 건새우탕면, 럭셔리 생굴짬뽕라면, 화이트짬뽕라면, 알탕이었더라면, 최루탄라면 등 생소한 메뉴가 많다.

처음 라면 시장에 발을 들였을 때는 전문 자격을 요하지 않고 일반화된 음식이라는 생각에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도나도 요식업 계통에 도전하는 현실에 비추어 보자 곧바로 차별화 전략의 필요성을 느꼈다. 김 대표는 이후 유명하다고 입소문을 탄 라면 전문점은 다 찾아다녔다. 시중에 출시된 봉지라면 제품도 전부 사서 조리해 맛을 분석했다. 처음에는 다양한 맛을 내기 위한 조리법을 얻기 쉽지 않았다. 대기업에 스프를 납품하는 중소기업 업체를 찾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담당자들과 친분을 쌓자 하나둘씩 비법이 손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 대표의 라면 연구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라면은 몸에 좋지 않다’는 인식을 떨쳐내기 위해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MSG를 첨가하지 않고 다양한 맛을 내려니 메뉴에 들어가는 재료의 가짓수도 많아졌다. 이것저것 배합해 맛을 내기 위해 수없이 많은 연구가 필요했다.

‘맛좀볼래’가 입소문을 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최루탄라면’이라는 메뉴였다. 매운 맛의 강도에 따라 1, 2, 3 단계로 구성된 이 라면은 먹을수록 뒷맛이 매운 것이 특징이다. 가게를 찾은 고객들은 처음에 최루탄라면의 강한 맛을 부담스럽게 느꼈다. 그러나 한 번 메뉴를 맛 본 손님들이 두 번, 세 번 찾아오는 횟수가 늘며 최루탄라면이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인천 남동구 구월동 지역에서 자본금 6000만 원을 들여 조그맣게 시작한 사업이 점차 규모가 커져 남구 용현동에 위치한 인하대학교 앞으로 가게를 옮겼다. 대학생 등 20대의 젊은 소비자층을 겨냥해 여러 가지 값싼 메뉴를 선보이자 손님이 늘어 평균 일 매출 130만 원 이상을 기록했다.

일부를 대출로 끌어다 쓴 초기 자본금을 운 좋게도 금세 회수할 수 있었다. 방송 등 전파를 타며 가맹점 문의도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재 가맹점은 13개. 직영점은 2군데다. 최근 인하대 앞에서 남동구 논현동으로 이전한 본점과 고속도로 휴게소점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맛좀볼래’가 입점한 후 라면 매출이 30% 이상 늘었다.

“라면을 고급화하자” 가격 올려

김 대표는 가맹 비용을 일반적인 시세보다 1000만~1500만 원가량 낮은 금액으로 책정했다고 밝혔다.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면 비슷한 심정으로 창업을 준비하는 점주들에게 가맹 비용을 높게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맛좀볼래’가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으며 가맹점이 늘자 김 대표는 이대로 정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맛좀볼래’의 라면을 고급화하자는 뜻을 품은 후 인하대 앞 가게 터를 정리했다. 새로 자리 잡은 논현동 지역은 논현역 개통을 앞 둔 데다 주변의 학교나 아파트 단지로 인해 유동 인구가 많아 김 대표의 관심을 끌었다. 점차 이 일대가 번화해지리라는 전망에 따라 김 대표는 이곳에서 새롭게 ‘라면의 고급화’를 선도하겠다는 생각이다.

메뉴 가격도 인하대점보다 500~1000원가량 높여서 책정했다. 더 좋은 재료로 고급화된 라면 메뉴를 선보이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논현점 ‘맛좀볼래’에는 10대 중·고생들과 혼자 온 20~30대 손님이 대부분이다. 주말에는 가족 단위의 손님도 많이 찾는다. 연중무휴로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운영된다. 향후 목표가 있다면 서울 중심 상권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몇 년 내 실현할 계획이다.

50대가 되기까지 몇 해를 앞둔 김 대표에게는 ‘맛좀볼래’를 확장하는 계획 외에 또 다른 꿈이 있다. 과거 록 밴드를 함께 하던 동료들과 다시 그룹을 구성하는 일이다.
김 대표는 1988년부터 2000년까지 7장의 앨범을 내며 제이G, 토이박스 2개의 그룹에서 보컬로 활동한 이력을 보유했다. 인디 록에 종사하며 당시 홍대 앞에서 마니아층을 많이 확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음악만으로 먹고 살기에는 힘에 부쳤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며 젊은 나이대의 멤버들로 구성된 밴드들이 몸값을 낮춰 공연을 했기에 김 대표가 속한 그룹은 사실상 경쟁력을 잃어갔다. 행사장 측은 젊은 밴드를 선호했다. 비주류 음악을 고집하다보니 꾸준한 돈벌이가 잘 되지 않았다.

김 대표가 먹고 살기 위해 라면 집을 창업하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한동안 꿈을 포기한 채 철가방을 들고 라면 배달을 하는 일은 김 대표에게 녹록치 않았다. 지금은 라면 전문점 사장님이라는 직함이 만족스럽지만 당시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것. 라면가게가 유명해지고 난 뒤 김 대표의 이력에 대해 소문을 들은 한 공중파 방송사는 김 대표의 과거 그룹 멤버들을 모아 공연을 할 것을 제안했다.

‘맛좀볼래’를 창업한 지 4년만의 일이었다. 흔쾌히 수락한 멤버들과 함께 김 대표는 홍대의 한 클럽에서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공연을 했다. 모든 멤버들이 예전의 멜로디와 연주법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이후로 김 대표에게 록 밴드로 활동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는 늘 남아 있다. 라면 사업이 확장되면 젊은 시절의 꿈을 다시 되돌려 멤버들과 재결합할 계획을 품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세시봉 열풍을 접하면 그리움이 더 간절해진다. 인생 3막, 못다한 꿈을 다시 이루리라는 확신에 찬 김 대표는 ‘맛좀볼래’의 상호를 보며 과거와 또 다른 행복을 느낀다. 젊은 시절에는 김 대표가 열창하던 자신의 노래 제목이었지만 지금은 제2의 인생을 열어준 지표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가혜 기자 lita@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