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코노믹리뷰DB)


명예퇴직 선택해도 만만찮은 창업… 그래도 시간에 투자하면 희망은 있다

김재근(73·가명) 회장은 5대 그룹 관계사에 근무하는 전문 경영인이다. 고희(古稀)를 훌쩍 넘은 나이에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그가 타고 다니는 고급 승용차는 한눈에 보기에도 부티가 흐르는 외산 프리미엄 세단이다. 그는 오륙도, 사오정의 추세에 역주행하는 ‘직장인’이다.

김 회장이 70세를 넘어서도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 이면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의 주특기는 소속 그룹의 주요 민원을 해결하는 일이다. 내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물밑에서 이합집산이 한창인 여의도 정치권에 늘 안테나를 드리우고 권력의 향배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여야 국회의원들의 주요 이력, 정강정책, 최근 발언 등도 다 분석해 봤어. 철저히 분석한 연후라야 정치권 흐름이라는 게 보이거든. 그런데 내년에 떠오를 잠룡이 잘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야”

권력 지형의 변화를 파악한 뒤 ‘인맥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적어도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지론. 앞으로 10년 더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 목표라는 김 회장은 행복한 직장인이다. ‘오륙도’ ‘사오정’ ‘십오야’는 적어도 그에게는 납득하기 힘든 단어다.

그가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의 이면에는 독특한 사고(思考)법이 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기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골똘히 솔루션을 깊이 생각해.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돌파구가 늘 보이기 마련이거든.” 그는 ‘매사를 깊이 생각하는 습관부터 기르라’고 조언한다.’

다들 불안한 마음에 학원도 다니고, 또 자격증 취득에도 열을 올리지만, 남들이 다하는 방식을 답습해서야 경쟁에서 한걸음 더 나아질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 불안감으로 대세를 추종할 뿐 정작 사태의 본질은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냐는 반문. 물론 김 회장은 흔한 사례는 아니다.

잘 나가는 경제 관료들도 퇴임하고 나면 찬밥 신세인 경우도 심심치 않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때 경제 사령탑을 지낸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도 야인시절 한때 민간 컨설팅 업체 창업을 고려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분야의 생리를 잘 아는 지인들이 적극 말려 회사 창업을 포기했다는 후문이다.

50대들이 불안한 이면에는 척박한 국내 환경이 있다.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고급 관료 출신조차 창업을 포기하는 시장이 대한민국이다. 베이비부머 세대들 중에서도 증권, 보험, 은행, 컨설팅 분야 등의 경험을 살려 경제연구소를 비롯한 1인 창업에 나서는 이들은 늘고 있다.

한 우물 수십 년 팠지만 남는건 회한

공병호(50) 박사, 구본형(51) 변화경영연구소장의 성공이 이러한 추세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다. 하지만 자신이 평생 해온 일을 밑천삼아 인생 2모작에 나서기가 여의치 않은 것이 직장인들의 현주소다.

마케팅, 경제 예측, CEO 코칭을 비롯한 분야별 부띠끄들이 전문성을 인정받으며 대기업과 선순환의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는 미국, 일본 등과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차이가 있는 것.

주요 기업들이 구조조정으로 몸살을 심하게 앓을 때마다, 창업 시장이 대목을 맞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은행원들이 회사 그만두고 나면 정말 갈 곳이 없어요. 그나마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은 강남의 자산관리 부띠끄로 이동하고요. 나머지는 명예퇴직금을 털어서 밥장사나, 커피장사에 뛰어드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관석 신한은행 재테크 팀장은 자신도 은퇴 후 강연자로 인생 2막을 개척하고 싶지만, 은행 브랜드를 때어내고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고 고백한다. 강연 활동과 더불어 창업 쪽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이러한 점이 한 몫 한다. 하지만 회사가 사파리라면, 창업 시장은 야생에 가깝다.

지난 1997년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은행원 옷을 벗고 밥집을 차린 이들 중에는 사업 실패로 명퇴 자금을 고스란히 날린 이들도 적지 않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때와 달리, 떡볶이 매장을 비롯해 비교적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창업 아이템들이 뜨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사업에 실패하자 목숨을 끊거나, 폐인이 된 선배들이 반면교사다.

여의도 금융가에서 명예퇴직한 이들 중에는 명동 사채업계를 기웃거리는 전직 은행원들도 적지 않다는 후문. 저축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해 급전이 필요한 이들에게 빌려주던 대부업체들이 저축은행이 경영난으로 흔들리자 이 틈새를 파고들고 있는 것.

하지만 거칠기로 소문난 사채 바닥에서 성공하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렇다고 소속 회사에서 위아래 눈치를 봐가며 버티기는 더욱 힘든 상황이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면 누구나 인생 후반전을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현실은 팍팍하다.

최근 최고경영진도 50대 초중반 일색

“인화경영의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 대기업들은 평소 근무평점이 뒤처지는 직원들을 권고사직 형태로 꾸준히 내보냅니다. 은행처럼 대규모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뿐이지, 말처럼 직원들을 끌어안고 가는 그런 분위기는 아닙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종사하는 한 관계자의 말이다. 금융가의 명퇴 인력 선발도 대부분 나이 상한선을 두고 진행한다.

KB국민은행은 명예퇴직 상설화 방안을 검토 중이다. 55세 이상 인력이 주요 대상이다. 현직에 가급적 오래 머물러야 하지만, 경영진이 자꾸 젊어지는 것도 부담거리. 삼성그룹의 신임 사장단의 평균 나이는 51세. 지난해에 비해 두 살 가량이 더 적어진 것.

밑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젊은 세대들이 주는 압박감도 대단하다. 대개 해외유학을 다녀온 후배 직원들은 영어 능력은 기본이며, 인맥도 넓다. 이들에게 이메일이나 전화는 해외의 지인들과 자유로이 소통하는 공론의 장이다. 문제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직면한 이러한 현실이 달라질 가능성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

대한민국은 일본과 더불어 세계에서 노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국가다. 잠재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 전체 인구 대비 근로 인력을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 정부의 숙제다. 베이비부머 세대들을 일자리에 10년 이상 더 묶어 두어야 하지만, 문제는 민간기업들의 일자리 제공 여력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

글로벌 경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국내 기업들이 생산 거점을 해외로 대거 이전하고 있는 점이 부담거리.아시아, 아프리카를 비롯한 신흥시장의 부상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재촉할 전망이다.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입장에서는 비즈니스 모델의 유효기간이 빠른 속도로 짧아지고 있는 점도 부담거리다. 산업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베이비부머 세대가 같은 업종에서 오랫동안 익힌 암묵지(暗默知)도 유효기간이 과거에 비해 짧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말 그대로 가야 할 길은 먼데 해는 뉘엿뉘엿 지는 형국이다. 사무실 창밖 빌딩숲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자주 빠지는 것도 답답함 탓이 크다. 고용 없는 성장의 역풍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맞고 있는 세대가 베이비부머 세대들이다.

자신들이 일자리를 꿋꿋이 지키는 바람에 아들 세대의 실업이 심각하다는 비판도 가슴을 무겁게 한다. 최윤식 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장은 “2050년이며 한국인의 사망 원인 1위는 생계형 자살이 될 가능성 될 가능성이 크다”며 “이 시나리오는 이미 현실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자신은 물론, 자녀들을 위해서도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박영환 기자 yunghp@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