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 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공광규 <소주병>

인간은 나이가 들면 스스로 몸을 비운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이 사회나 사회 구성원에게 다 쏟아내고 빈 몸이 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죽음은 아름다워야 한다.
얼마 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죽음이 그러했다.

오랜 기간 사용해 낡을 대로 낡은 의복과 신발, 그리고 안경이 전부였다. 그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김수환 신드롬’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국민들이 그의 선종을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배우 성룡은 지난해 12월 초 중국의 일간지 〈양성만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생불대래 사불대거(生不帶來 死不帶去)’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듯 죽을 때도 빈손으로 간다는 말이다. 불교에서의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와 같은 의미다. 그러고는 그는 “20억위안(약 4000억원)에 이르는 돈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김 추기경의 마지막처럼 성룡의 말에도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았다. 감동의 저변에는 타의에 의한 억지 기부나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포장이 아니라는 점이 깔려 있다. 스스로 비움의 철학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간은 원래 나이가 들면 스스로 몸을 비우는 존재다. 공광규 시인의 시 <소주병〉도 인간의 비움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시인은 시 첫 구에 술병을 거론한다. 병은 내부에 무엇인가 채워져 있어야 의미를 부여받는다. 술병은 술이 들어 있어야 가치가 있다. 그럼에도 이 시에 따르면 술병의 속이 비워진다.

사람들이 술을 따라 마셨기 때문에? 아니다. 시인은 술병에 내용물이 없어지는 이유를 스스로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 탓이라고 말한다.

이 ‘스스로’가 중요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빈병의 의미를 시인이 재해석한 것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누구나 알고 있는 기존의 모습을 재해석하고 나니 아버지라는 새로운 존재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 연결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도구다.

다만 이 ‘빈다’는 측면에서 나온 새로운 가치 창출이 김수환 추기경이나 성룡의 예와 같이 감동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안타까움이라는 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존재 가치가 사라진 ‘빈 병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 굴러다니’듯 가족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고 빈 몸이 된 아버지의 모습이 그러하다.

더욱이 시인은 바람이 불던 날 ‘문 밖에서 아버지의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을, 즉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이 시대 아버지와 빈 소주병은 이처럼 닮은꼴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시는 두 가지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빈병의 새로운 개념 정립이 이뤄졌다는 점과 빈 소주병과 아버지라는 전혀 다른 이종 접목을 통해 새로운 인지 감각을 찾았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창작 방식은 사양산업을 성장산업으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양산업이라고 하는 건자재 산업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장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목재나 시멘트의 개념을 다시 정립해 유전공학과 결합할 수 있다면 전혀 다른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황인원 시인·문학경영연구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