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發 물가대란’에 실질금리 마이너스… 소비자물가 한은 기준치 넘어

실질금리 마이너스 시대다. 은행에 돈을 넣어 놔도 앉아서 까먹게 된다는 의미다. 자산가치는 뚝뚝 떨어지는데, 농산물 가격 폭등으로 밥상머리 물가는 부쩍 올랐다. 김장을 앞둔 주부들은 ‘금(金)치’ 쟁탈전에 허리가 휠 지경이고, 음식점에서는 상추에 고기를 싸 먹는 대신 고기에 상추를 싸 먹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려 치솟는 물가 그래프를 꺾어 줬으면 좋으련만 이마저 쉬운 일은 아니다. 섣불리 금리를 올렸다간 무시무시한 가계 빚 ‘폭탄’의 뇌관을 건드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외환시장에서의 원화 강세도 한은이 금리 인상 카드를 쉽사리 꺼내들지 못하게 하는 이유다.
 


은행권 돈 넘쳐 되레 인하… 물가는 ‘高高’

하나은행은 10월 들어 1년 만기 정기예금인 ‘369예금’의 금리를 기존 3.6%에서 3.5%로 0.1%포인트 내렸다. 산업은행도 9월 말 1년 만기 프리미어정기예금 금리를 3.6%에서 3.25%로 0.35%포인트나 낮췄다.

기업은행은 9월 한 달 동안 1년짜리 정기예금 금리를 3.7%에서 3.59%로 낮추고, 다시 3.49%로 내려 앉혔다. 외환은행도 1년 정기예금 금리를 3.5%에서 3.45%로 내려 잡았다.

이처럼 은행들이 예금 금리를 앞다퉈 내리는 이유는 은행권에 돈이 넘치기 때문이다. 최근 채권 금리가 급락하며 예금 금리의 기준이 되는 은행채 및 채권들의 금리도 덩달아 하락한 탓이다. 은행들이 고금리 특판을 통해 시중자금을 끌어들인 덕분에 예대율도 99~106%를 기록했다.

실질금리는 사실상 마이너스다. 통계청이 발표한 9월 소비자물가 3.6%를 제하면 사실상 이자 소득으로 남는 게 없는 데다 이자에 대한 소득세(15.4%)까지 내야 한다.
마이너스 실질금리를 불러온 주범은 바로 농산물 발(發) 물가대란이다. 지난해 한 포기 3000원 했던 배추가 이제는 1만5000원이다. 무, 마늘, 대파, 고추도 만만찮게 뛰었다.

한은 기준금리 인상 통한 ‘물가잡기’ 고심

연초부터 이어진 이상기온으로 인해 농산물 값이 상승해도 이전에는 1~2개월 정도 지나면 제 자리로 돌아왔는데 올해는 이상한파, 이상고온, 태풍, 장마가 쉴 틈 없이 이어지다 보니 피해가 더 크고 오래 간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한국은행은 일단 내달 김장철 고랭지 배추와 무가 출하되면 농산물 값 급등세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동반상승한 다른 농산물들의 경우 아직 대책이 없다.

한은의 ‘역할론’이 불거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금리를 올려 물가 상승 속도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9월에는 김중수 총재가 공공연히 물가 상승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며 ‘금리 상승’에 대한 신호를 전달한 바 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미국발 글로벌 경기 둔화 우려가 불거지며 금리 인상은 다시 한 번 미뤄졌다.

그러나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9월 소비자물가가 전년 동월 대비 3.6% 상승, 한은의 기준치인 3%를 훌쩍 넘어서며 더 이상 금리 인상을 미룰 수만은 없게 됐다. 전문가들도 올해가 지날 때까지 한은이 금리 인상을 단행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입을 모은다.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최근 물가상승 속도를 보면 기준금리를 연말까지 한 번 정도 올릴 가능성이 있다”며 10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한은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금리 인상에 대한 당위성이 커지고 있지만 한은이 쉽게 단행하지 못할 만한 속사정도 있다.


경기 둔화 우려 상존 등 ‘암초’도 많아

글로벌 경기 둔화 우려가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미국이 경제 성장을 위해 또 한 번의 양적 완화 정책을 준비하고 있으며 일본도 기준금리를 인하하며 양적 완화 대열에 동참했다. 선진국 경기가 둔화되면 이들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 자연스레 영향을 미친다.

이미 700조 원을 돌파한 가계 빚도 한은의 발목을 잡아끌고 있다. 지난 6월말 현재 가계 빚은 754조9000억 원으로 전분기보다 15조8000억 원 늘었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하면 가계가 부담해야 할 이자만 1조8800억 원 더 는다.

8.29 부동산 거래 활성화 대책에도 불구하고 아직 회복되지 않은 부동산 시장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외환·채권시장의 불안정성 역시 한은을 망설이게 하는 이유다.

한은이 금리를 인상할 경우 채권 차익을 노린 달러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유입, 원/달러 환율이 급락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불안정한 외환시장이 다시 요동칠 뿐 아니라, 국내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도 훼손될 수 있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박사는 “기준금리 인상이 시중금리 인상으로 이어지면 700조 원에 달하는 가계부채에 대한 이자 상환 부담이 커질 수 있다”며 “기준금리는 상징성이 큰 만큼 한은으로서도 함부로 올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특히 이자 부담으로 인해 가계의 소비 여력이 줄어들면 내수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지은 아시아경제 기자 leezn@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