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산 코끼리 밥솥이 일본 여행의 필수 쇼핑 품목이었던 시절이 불과 20여 년 전이었다. 지금은 전자, 조선, 철강 등 여러 분야에서 이미 일본을 앞질렀다. 자동차 산업도 일본 뒤를 바짝 추격하여 “토요타를 능가할 수 있는 기업은 한국의 현대차그룹 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오바마 행정부의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이매뉴얼 시카고 시장이 첨단제조기술 분야에서 미국이 경쟁해야 할 대상으로 독일, 일본, 중국과 함께 우리나라를 지목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제조업의 발전은 참으로 눈부신 성장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세간의 쏟아지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면, 더 이상 지난 날의 괄목할만한 성장에 희희낙락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011년 이후, 이전 대비 3분의 1토막으로 줄어든 제조업 생산증가율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여파로 업종과 규모를 막론한 구조조정이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고 일본을 넘어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야 할 시점에 우리 기업들은 성장 둔화를 극복하지 못한 정체로 위기 아닌 위기를 맞고 있다.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구조조정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위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제조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미래를 대응할 궁극적인 경쟁력을 준비하고, 고기술∙고품질∙고수익의 새로운 성장산업을 이끌 수 있는 구조로 대대적인 개편을 해야 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결국 멈춰선 우리 제조업을 다시 성장가도에 올려놓기 위한 열쇠는 기업의 ‘체질개선’, 곧 새로운 성장을 위한 ‘혁신’에 있다는 것이다.

부품조립 생산업체인 A사는 8개의 독립적인 부서로 나누어 혁신 활동을 전개해왔다. 해외 선진기업들의 성공 공식과도 같았던 TPM(종합생산방식, Total Productive Maintenance; TPM)과 6시그마 활동 등을 각각 부서의 특성과 상황에 따라 진행하며 혁신활동의 성공적인 정착을 확신했다. 그러나 성과를 보인 것도 잠시, 갈수록 성과가 축소되면서 혁신을 위한 또 다른 대안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룹의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신규사업 추진을 담당하고 있는 B사도 마찬가지이다. 소위 혁신적이라고 알려진 다양한 방법론들로 그간의 성장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것 만으로 앞으로의 상황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각 구성원들의 역량과 사업의 현황에 적합한 전략을 구상하고 있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해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성장정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두 사례에서 드러난다. 혁신의 필요성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업들이 혁신에서 조차 ‘정체의 늪’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필자와 자주 만나는 CEO들도 “현재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혁신이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는 것을 익히 알지만, 정작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없다”며 현 사안에 공감하고 있다. 기라성과 같은 수장들 조차 이러한 문제에 현안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는 ‘혁신R&D’의 부재에 있다.

후발주자로 뒤늦게 산업화에 합류한 우리기업들은 일본, 미국 등 선진기업들의 성공적인 혁신모델을 도입하여 모방하는 과정을 통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들의 성과를 따라잡기 바빠, 마치 기술이나 상품을 도입하듯 유행하는 혁신기법을 따라 하는 것이 혁신활동의 전부였다. 이러다 보니 우리 기업만의 체질과 특성, 구성원의 역량에 적합한 체계를 구축할 여지가 없었고, 글로벌 제조강국이라는 위상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성장을 위한 자체적 혁신체계를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혁신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바꾸어야 한다. ‘혁신’이라는 것은 문제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 아닌 근본적인 기업의 체질을 강화시키고 미래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현실직시가 더 나은 발전을 가져오듯 기업도 그러한 과정이 필요하다. 때문에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역량의 강∙약점과 각 구성요소의 균형, 구성원들의 참여와 헌신이 가능한 활동체계와 지속가능성 등을 명확히 판단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크게 세가지 관점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혁신R&D 역량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첫째, 혁신의 기본 요소간 균형이다. 혁신의 기본 요소는 조직 구성원이 가진 혁신마인드, 혁신활동의 방법과 절차, 혁신주체의 능력과 역량, 혁신리더 계층의 지원과 지도체계 및 역량, 경영진의 인정과 격려, 혁신목표의 구체성과 공감도 총 6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각 요인을 면밀히 분석하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침 없이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경영진이 아무리 방향과 목표를 설정해 혁신을 추구한다고 해도 직원들의 마음이 그와 같지 않다면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추진과제와 개선 방법론의 균형이다. 혁신과정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문제 유형과 속성에 따라 각 문제유형에 적합한 개선책을 준비해야 한다. 또한 구성원들이 문제의 유형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개선방법을 활용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체계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기존에는 선진방법을 도입하여 모방하는데 그쳤다면, 이제는 상황의 특성에 적합하게 전략을 요리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혁신역량의 성숙도와 활동수준의 균형이다. 혁신활동을 통해 구성원들의 역량이 성숙할수록 해결할 수 있는 과제의 크기와 범위는 확대된다. 따라서 과제를 도출하고 해결하는 과정과 절차 또한 단계적으로 심화되어야 하며 이 과정에 대한 철저한 이해는 중장기 관점의 혁신 프로그램을 구성할 수 있는 기초기반이 될 수 있다.

새로운 혁신은 더 이상은 선진기업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글로벌 제조강국 대열에 들어선 탓이고, 모방해야 할 성공사례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답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가 가진 내재적 역량을 섬세하게 분석하고, 우리가 가진 문제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며, 변화하고 성숙해 가는 조직구성원들의 역량을 이해 하는 것. 바로 새로운 혁신의 방향, 새로운 혁신활동의 방법론을 찾아내기 위한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