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8자(父子八字) : 조조가 비에게

양이지복 가득영년(養怡之福 可得永年)-기뻐하는 마음을 키우는 게 복이려니 가히 영년을 누릴 수 있다

[한자 풀이] 養 기를 양  怡 기쁠 이  之 어조사 지  福 복 복  可 옳을 가  得 얻을 득  永 길 영  年 해 년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지는 못한다!” 중국 고대역사소설 <삼국지>의 한 주역인 위(魏)나라 조조(曺操, 155~220)가 한 말이다. 조조는 패국(沛國) 초현(譙縣, 지금의 안휘성 호주시) 출신이다. 자(字)는 맹덕(孟德)이고, 아명(兒名)은 아만(阿瞞)이다. 아버지는 조숭이며, 환관 조등의 양자였다.

조조. [자료=이코노믹리뷰 DB]
조조가 내뱉은 말의 원문은 寧敎我負天下人, 休敎天下人負我(영교아부천하인, 휴교천하인부아)다. 여기서 영(寧)은 ‘차라리 ~하는 것이 낫다’로 풀이한다. 교(敎)는 사역(使役)의 뜻이다. 즉 ‘~에게 하다’로 해석할 수 있다. 아(我)는 ‘나’를 지칭하는 한자로, 솔직한 나(吾)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페르소나(Persona)로 가면을 쓰고 상대방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나’로 해석해야 한다. 부(負)는 ‘등지다, 저버리다’라는 뜻인데 ‘배신’을 의미한다. 천하인(天下人)은 말 그대로 ‘세상 사람들’을 의미한다. 휴(休)는 ‘~하지 말라’는 뜻이다.

아부(我負)는 ‘내가 (천하인을) 배신하다’로, 부아(負我)는 ‘(천하인이) 나를 배신하다’로 직역할 수 있다. 따라서 “차라리 내가 세상 사람들을 배신할망정 세상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지는 못한다”라고 원문을 투박하게나마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중복되는 천하인을 빼고 나면 조조가 한 말에서 여덟 글자가 남는다. 즉 팔자는 ‘영교아부 휴교부아(寧敎我負 休敎負我)’가 되는 셈이다.다시 세련되게 말해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지는 못한다!”라고 앙금을 박은 팔자대로 조조는 일생을 살아가고자 했다.

때는 서기 188년, 동탁 때문에 조조는 하루아침에 도망자가 되어 전국에 지명수배자로 쫓기면서 진궁과 함께 여백사의 집에 이르러서 돼지를 잡아 대접하는 것을 조조를 죽이려고 착각하는 데에서 비롯되고 벌어진 정말 어처구니없는 살인을 저지르고 난 다음의 행보부터다.

조조와 진궁이 선택한 팔자 ‘寧敎我負休敎負我’

189년 여기저기 도망치다 고향으로 돌아온 조조는 ‘외부 투자’를 받아서 군마 5000기를 모집했다. 고향의 거부(巨富)인 위자(衛玆)가 도움을 주었다. 이 도움으로 조조는 자신의 기업을 처음 창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탁을 직접 맞상대하기엔 형편없는 자본이었다. 한마디로 역부족이었다.

때마침 190년 원소가 맹주로 추대되는 관동연합군이 결성되었다. 이에 조조는 군마를 직접 이끌고 가서 10만 연합군에 합류했다. 하지만 연합군은 아직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갖추지는 못했다. 연합군의 대주주인 원소, 원술, 한복, 공주, 유대, 장막, 교모, 원유, 포신 등이 동상이몽으로 제각각 따로 놀았기 때문이었다. 동탁을 물리치자는 비전과 목표는 같았지만 구체적으로 싸우는 방법에서 전략과 전술의 꿍꿍이속은 일치하지 않았다. 따로 놀았다. 서로들 이해득실의 주판알을 튕기면서 제멋대로였다.

그래서일까, 산조 일대에서 10만의 관동연합군은 주둔만 할 뿐이었다. 동탁의 대적을 향해 진군하거나 싸우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각자 경쟁자의 눈치만 보았다. 그러면서 복지부동으로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탁이 이끄는 군대의 기세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연합군 중 누구 하나 도읍인 낙양(洛陽)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복지부동하는 대주주들에게 소주주인 조조는 뿔이 났다. 화가 치밀었다. 얼마 안 되는 자신의 군마를 적과 싸우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군영을 옮겼다. 서진했다. 하남(河南) 형양(형양)에 당도했다.

이때 동탁의 부장 서영과 만난 조조는 한바탕 격전을 벌였으나 처참하게 패배를 맛본다. 게다가 그 자신도 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는다. 황급히 도망을 치는 중에 설상가상으로 타고 있던 말도 갑자기 쓰러지고 만다. 이를 보고 사촌동생 조홍이 그에게 말을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불과 서른 여섯의 조조는 죽어 후세에 이름을 크게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사촌동생의 도움이 있었기에 조조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때의 전투로 조조는 군마를 거의 다 잃고 남은 건 500기가 고작이었다. 이 무렵이 조조에게 가장 곤궁한 시절이었다.

다시 말해 189년 낙양에서 도주한 후 192년 연주목으로 새로이 자리를 잡고 둥지를 틀 때까지가 말이다. 조조가 연주목이 되는 당시에 연주의 인구는 100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500에서 100만으로 성장은 조조의 기업으로 엄청난 발전 속도이자 행운이고 나중에 중원 쟁탈의 주역이 되는 밑천으로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자본이 되는 셈이다. 이 자본은 조조의 책사인 진궁의 도움 덕분이었다. 이에 대해 중국의 역사학자 량룽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192년, 그에게도 마침내 기회가 왔다. 청주 황건적이 5만 규모로 세를 불려 연주 일대를 주름잡고 있었다. 연주자사 유대는 자신의 직분에는 충실했지만 책략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그는 “칼날을 피하고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라”는 제북상 포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의욕만 앞세워 사기충천한 황건적과 무리하게 싸우다가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연주 땅은 순식간에 주인을 잃었다. 이때 조조의 책사 진궁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주 땅으로 달려가 조조에 관해 과장해서 떠들어댔다. 황건적이 득세하여 판을 치는 세상에 벌벌 떨며 불안해하던 때에 자신들을 이끌어주겠다고 나선 이가 있으니 연주 사람들에게 조조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조조는 쉽게 연주목이 되었다. 반년 동안의 밤낮없는 줄다리기 전투 끝에 조조는 끝끝내 황건적을 격파했다. 투항한 30여만의 군사를 포함해 연주의 인구는 100여만 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정예를 뽑아 군대를 조직하고 ‘청주병’이라 불렀다. 이리하여 조조는 마침내 자신의 근거지와 군대를 얻고 100만에 가까운 노동력을 확보하여 중원 쟁탈의 밑천을 마련했다. (<조조 읽는 CEO>, 량룽 지음, 이은미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진궁(陳宮)은 일찍이 중모 현령을 지냈다. 임기 중에 동탁의 지시에 따라 조조를 체포한 적이 있으나 조조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몰래 풀어주고 벼슬을 버리면서 조조를 주군으로 삼아 동행했다. 여백사의 집에도 조조와 함께 있었다. 조조가 연주목이 되던 해로부터 194년 이후로는 조조의 곁을 떠났다. 조조가 어질지 못함(서주 대량 학살)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여포를 찾아가 그를 주군으로 섬겼다. 그러다가 198년 조조가 여포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죽고 만다. 안타까운 일이다.

조조가 연주목의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 적 있으니 조조는 진궁의 배신을 용서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궁은 용서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조조의 장점(리더십)보다는 여백사 일가 살인사건 및 서주 대량 학살사건이라는 단점(잔인함)이 도드라지게 크게 보여서일까, 끝끝내 조조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시종일관 당당했다.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스스로 목을 내밀었던 것이다.

사람은 상대방의 장점을 크게 보고 사귀어야 한다. 장점보다 단점을 크게 보면 그와 사귈 수 없고 관계는 깨지고 만다. 조조가 선택한 팔자, 즉 영교아부 휴교부아(寧敎我負 休敎負我)에서 무엇이 장점으로 보이고 또 무엇이 단점으로 보일까. 진궁의 선택 역시도 조조처럼 ‘아부(我負)’였다. 다시 말해 진궁이 조조를 배신한 것이지, 조조가 진궁을 배신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비굴하게 죽지 않고 당당하게 죽는 법이다.

부모의 자식 사랑법 ‘은근’

야단스럽지 않고 꾸준한 것을 일러 ‘은근’이라고 말한다. 은근은 한자로 쓰면 ‘慇懃’이 맞다. 그런데 나는 ‘은근’을 종종 ‘恩勤’으로 고쳐 쓴다. 恩勤이란 말은 <시경> 빈풍에 보인다. 제목은 ‘치효(鴟鴞)’다. 그 첫 구절만 소개한다.

치효치효 鴟鴞鴟鴞     올빼미야 올빼미야,

기취아자 旣取我子    내 새끼 이미 잡아먹었으니

무훼아실 無毁我室    내 둥지는 헐지 마라.

은사근사 恩斯勤斯     알뜰살뜰 길러낸

죽자민사 鬻子閔斯     어린 자식 불쌍해라.

(<시경>, 리가원·허경진 공찬,  청아출판사 펴냄)

밑줄 친 한자만을 모으자. 그러면 팔자가 성립된다. ‘은사근사 죽자민사(恩斯勤斯 鬻子閔斯)’로 말이다. 말하자면 “사랑하고 애써서, 어린 자식을 기르느라 고심했으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 어찌 부모팔자라고 강조하지 않을쏘냐.

이와 같이 부모의 자식 사랑은 너 나 할 것 없이 팔자(恩斯勤斯鬻子閔斯)로 다 설명된다. 부모 치고 자식을 알뜰살뜰 길러내지 않는 사람 없고, 아이를 기르느라 노심초사하지 않는 사람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자식 사랑은 야단스럽지 않고 꾸준하며 알뜰살뜰 자식을 기르느라 고심하니 ‘은근(恩勤)’이라고 고쳐 써도 별 탈 없다. 뜻이 막히지 않고 뻥 뚫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