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공자는 시대적 편의에 따라 타도대상이 되고, 숭배대상이 되기도 했다. 공자는 21세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지나. 과연 그는 복고주의자, 형식주의자에 불과한가. 아니면 2500년을 넘어 동서양에 걸쳐 대영토의 사상왕국을 건설한 시대의 영원한 멘토인가. 그것을 객관적으로 진단하기 위해선 결국 공자의 반대파가 주장하는 논리를 점검하고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일 것이다.

첫째, ‘공자는 수직적 위계질서의 신봉자인가?’이다. 신분 , 계급 등 정해진 위계에 따라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끽소리도 못하고 따르게끔 한 봉건주의의 주창자이다. 오늘날 창의성과 개인주의를 중시하는 민주사회에는 뒤떨어진 이야기다.

공자는 지역, 신분, 빈부에 대한 선입관과 차별을 없앤 당대의 혁신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공자는 신분, 계층, 국적, 나이를 초월해 유교무류(有敎無類)를 표방해  오직 ‘열정과 태도’를 중시해 선발하였다. 이 같은 선발방법은 효과를 거두어 공자의 제자들은 시대의 동량으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공자는 늘 질문을 통해 제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자 했고 함께 토론하고 일방적으로 결론을 내지 않았다. 공자는 제자들을 깨우친다(誨)는 표현을 썼지, 가르친다(敎)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여기에서 보듯이 공자는 자신을 교사라기보다 코치로 생각했고, 제자들을 피동자로 보기보다 오히려 파트너로 동등하게 생각했다. 공자는 제자 개개인의 개성과 성격에 따라 다양한 가르침을 행하는 등 창의성과 다양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민주적 리더였다. 그는 제자들의 마음을 읽어주고 그들의 눈높이와 성품에 따라 교육을 달리하며 성장시켜주었다. 그가 제자들과 나눈 평소 대화를 보면 위트와 여유가 넘친다. 그는 제자의 말을 놀리기도 하며, 때론 제자의 반발에 얼른 말을 거두고 사과하는 등 유머와 포용의 금도가 넉넉한 스승이었다. 공자는 자신이 실수한 것을 알면 언제라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등 개방적으로 행동한 것은 오늘날 리더들이 되새기고 익혀야 할 필살의 내공이다.

둘째, 공자가 주창하는 인(仁)을 갖춘 군자 리더십은 참 좋은 도덕률일지는 몰라도 현실에는 적합하지 않다. 사람의 선하고 도덕적인 면만을 전제한 성선설은 오늘날엔 적용하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나만 군자가 되면 뭐하는가. 상대가 군자가 아닌데…’ 조직에선 기강해이로 이어지기 쉽고, 비즈니스에서는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공자는 책상물림의 백면서생이 아니었다. 그는  뜬구름만 잡는 이론이나 이야기를 늘어놓는 현학파나,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중에게 인기를 구하는 영합주의자, 어리숙하니 속아 넘어가는 호구나 허당이 인과 덕을 갖춘 군자의 진면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들은 덕을 해치는 사이비로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또 허당으로 이용당하거나 호구가 돼 퍼주기만 하는 것은 진정한 인의 경지가 아니라고 분명히 경계를 지었다.

공자는 대사구의 벼슬에 오른 뒤 최고의 지략과 전술을 이용해 위기의 노나라를 구한다. 외교 면에선 제나라의 음모를 미리 예측하고 준비해 상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언변, 화끈한 외교담판으로 전쟁 시 잃어버렸던 성을 되찾는다. 노나라에서 수행한 직무도 내무장관이나 교육부장관이 아닌 법무장관이었다. 내치에선 권력에 의한 강제보다교화(敎化)를 존중함으로써 도의적인 사회를 다시 일으키려는 덕치를 실현해 보였다. 한편으론 혹세무민에 앞장서는 인물 소정묘를 사형에 처하는 엄정한 면모도 보였다. 인은 공감과 소통의 리더십이다. 당근과 채찍을 넘어서는 ‘공감과 사랑’으로 이끌어야 성과가 난다는 것은 오늘날  지식경영사회에서 가장 요구되는 기본명제이다. 공자가 말하는 인을 갖춘 군자형 리더는  결코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한 허당, 호구가 아니다. 공감하고 존중하되 오히려 ‘하면 안 되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엄정한 기준을 세워 실행하고 교육으로 교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준을 세우고 강하게 적용하되 그에 앞선 것은 교화와 리더의 솔선수범이라고 보았다. 이 두 가지 선행조건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형벌을 가해선 안 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윗사람이 교화 없이, 또 자기 도리를 지키지 못하면서 아랫사람에게만 죄를 추궁해 처벌하는 것은 리더로서 직무유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셋째, 공자의 말은 이론지향이어서 실행, 성과와는 거리가 먼 뜬구름 잡는 이야기다. ‘숫자가 인격’인 시대에 한마디로 실용적이지 않다.

공자는 실행과 실용을 중시한 리더였다. 공자에게 배움이란 지식뿐 아니라 실행을 함께 의미했다. 지(知)와 행(行) 양자 중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면 당연히 실행이 우선임을 분명히 했다. 공자는 “학생들은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와서는 웃어른을 공경하며, 조심스럽고 미덥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며, 이렇게 하고도 남은 힘이 있다면 글을 배우라”고 말한다. 덕은 행동을 행하는 근본이고, 학식, 이론이란 그 가지라고 본 것이다. 둘 다 해야 하지만, 이론만 배우느라 실행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본바탕을 잃게 된다고 경계하였다. 단 실행과 학문을 병행해야 하는 것은 성현의 법을 살피지 못하고, 일의 당연함을 알지 못해 자신의 고집대로 행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또 공자가 ‘제자들’에게 <시경>을 배울 것을 강조한 데에서도 실용과 실행 논리의 근거를 살펴볼 수 있다. 공자는 “시를 열심히 배우고도 정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외교대신으로 나가 현안을 홀로 처리하지 못하면 시 공부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데서 볼 수 있듯 학문을 위한 학문, 공부를 위한 공부는 의미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학문에 있어 실용주의자고, 효용주의자였다.

사마천의 <공자세가>에 의하면 실제로 공자가 중도란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다른 고을에서 벤치마킹을 하러 올 정도로 질서가 잡혔고, 여러 가지 윤리와 예의의 기틀이 잡혀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자기 것이 아니면 줍지 않고 허례허식을 하지 않게 되었다.

넷째, 공자의 말은 좋은 말의 집대성이긴 하지만, 책상물림의 이상론에 치우쳐 ‘현장’ 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숫자가 인격’인 성과지상주의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 공자는 철학자이고 좋은 교사였을지 모르지만 현장을 이끈 리더는 아니었다.

공자는 현장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자 했고, 늘 밑바닥 현장 이야기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형 리더였다. 그는 젊어서는 당대 사회에서 명망 있는 인사가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국경을 넘어가서라도 찾아가 배움을 청했고, 현장의 풍속에서도 배움을 익히고자 했다. 그가 <시경>을 편집한 것도 결국 민중의 소리를 귀담아듣고 그속에서 답을 찾고자 해서였다. 기록에 의하면 공자는 사구가 된 뒤 옥송의 판결을 내리기에 앞서 언제나 사람들의 의견을 물었다 한다.

공자는 자신이 아는 것이든, 모르는 것이든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상대의 의견과 실무자, 전문가, 민중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자 하는 현장형 리더였다. 이처럼 늘 질문과 경청을 하는 공자를 무시하는 뒷담화에 대해 공자는 “그처럼 질문하고 귀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예절”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실무, 담당 의견의 중요성을 인식한 현장형 리더였다.

다섯째, 공자는 명분만을 중시한 형식주의자로서 오늘날과 맞지 않는다.

공자는 고집불통의 명분론자, 형식주의자가 아니었다. ‘권도(權道: 상황에 따라 달리 발휘하는 도)’를 주장하고, 세속과 원칙의 기준에 따라 어느 것이 본질과 내재된 의미에 충실한가를 중시했다. 그것에 따른 형식은 얼마든지 융통성을 부여했다. 공자가 중시한 것은 표면의 형식이 아니라 내재한 가치, 추구하는 목적이었다.  21세기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대의명분, 바꾸어 말하면 가치와 사명이 중요한 시대다. 제품의 차별성이 점점 좁혀져가고 있는 21세기, 가장 확실한 경쟁력은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는 가치관이다. 영혼을 움직이는 사명의식이다.  과거 산업화 시대엔 조직의 가치, 존재목적, 논리와 이성이 문제가 되지도 않았고 제품에 반영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뼛속까지 인이 박힌 목적의식, 사명감이 없고선 고객을 감동시키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