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뉴월은 재첩 철이다. 재첩은 아주 작은 조개다. 회나 덮밥, 부침으로 만들어 먹고, 국으로 끓여도 맛있다. 건강에도 좋다. 이맘때 특히 향이 뛰어나고 살이 오른다. 이 시기가 지나면 곧바로 산란기다.

그런데 최근에는 개체 수가 줄어드는 추세다. 수질오염 탓이다. 재첩이 매년 40톤 이상씩 채집되던 양양읍 조산리 남대천 하구에도 수량이 급격히 줄었다. 40톤이면 재첩으로만 2억원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규모다. 이곳 주민들은 “하루 100kg이 넘는 재첩을 채취해 높은 소득을 올렸는데 요즘에는 1kg도 채취하기 어려워 생계까지 막막하다”고 넋두리를 했다. 섬진강 유역도 마찬가지다. 재첩이 특산물인 이곳은 전국 재첩 어획량의 90%를 차지한다. 국립수산과학원 관계자는 “2004년 625톤이 어획된 이후 계속 감소 추세”라고 했다. 어획량이 떨어지니 자연스레 희소가치가 올라간다. 재첩을 그득 잡았는데 옆 사람이 빼앗아 가면 이렇게 말해라.

“그거 제 첩입니다.” 다산 정약용이 살아있다면, 아마 이 말을 했을 게다. 최근 다산의 ‘첩’이 발굴됐다. 사람 첩 말고 ‘계첩(戒牒)’ 말이다. 다산은 18세기(1790년) 한양의 명례방(現 명동)에 있던 자신의 집을 살롱 삼아 동년배의 남인 관료들을 모았다. 그리고 ‘죽란시사’라는 문예창작모임을 결성했다. 첩에는 죽란시사의 명단과 규약집이 실려 있다.

한편 다산에게는 사람 첩도 있었다.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한 지 12년째 되던 1812년. 그는 ‘홍임’이란 자의 어머니와 살림을 차렸다. 이후 1818년 해배돼 서울로 돌아올 때도 홍임 모녀를 데리고 왔다. 참고로 다산은 본처와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이후 기록은 없지만 그는 홍임 모녀를 위해 ‘남당사’ 열여섯 수를 썼다고 전해진다.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 ‘서가이(徐加伊)’는 박구(朴苟)의 첩이었다. 본처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는데, 첩인 서가이는 잘도 낳았다. 박구가 죽자, 본처는 서가이를 다시 종으로 부리려 했고, 서가이는 명령에 불응한 채 대들었다. 그러다 결국 매질을 당해 죽었다. 기록에 따르면 본처가 서가이를 미워했던 이유는 단순 ‘질투’만은 아니었다. 재산 분배 탓도 있었다. 당시 <경국대전> ‘사천(私賤)’ 조는 “천첩 자녀의 경우, 부모의 재산중 십분의 일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해 놨다.

부인도, 종도 아니었던 첩. 한편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해내며 살았던 ‘첩’도 있었다. 낮엔 대학 강사, 밤엔 간첩으로 활동하던 이 모 씨다. 그는 17년간 각종 군사기밀을 북한에 넘겨주고 공작금을 받았다. 검찰에 따르면 이 씨는 1992년 인도 델리대학 재학 중 북 ‘35호실’ 공작원 리진우에게 포섭됐다. 이후 1997년 7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중국, 캄보디아, 싱가포르, 태국 등에서 9차례에 걸쳐 군 작전교범, 군사시설 위치 등을 리진우에게 전달했다. 공작금으로는 5만600달러(약 5200만원)를 받았다. 그러던 지난 2009년 국가보안법상 간첩, 편의제공·금품수수, 특수 잠입·탈출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한 방에 훅 간 셈. 한방에서 한 첩은 어느 정도 분량일까. 한약은 하루 분량이 2첩이다. 아침에 한 첩 달이고, 점심에 한 첩, 그리고 저녁에는 아침 점심에 달였던 약재를 합해서 또 한 번 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첩이 하루 분량이다.

‘한방의료기관의 한약 관리 및 가격 현황에 대한 연구(2011)’에 따르면 한약재를 구입하기 위해 한방병원은 매월 평균 2838만원, 한의원은 164만원을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한의원 및 한방병원 4200개소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연구에 의하면 이 중 한의원의 매월 한약재 구입 비용은 2006년에 비해 32%가 줄었는데 이는 한의원 경영이 어려워졌다는 걸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