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기회…당당한 문화유산 지닌 주주국가로의 인식 필요

지난 7월7일 휴넷이 주최하고 아시아미디어그룹이 후원하는 CEO 월례 조찬모임에서 유홍준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전 문화재청장)가 ‘리더가 알아야 할 한국 미술사’를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를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주>

유홍준 교수가 쓴 <나의문화유산답사기>는 출간 당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단순히 문화유산을 감상하는 법을 넘어 국민에게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사회 전반에 우리 문화재에 대한 정체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날 강연의 요지는 우리의 뿌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토대로 동아시아의 문화 중심국으로 우뚝 서자는 내용이었다. “한국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당당한 문화유산을 가진 주주국가입니다. 이제는 동아시아 문화권을 이끌어 가야 할 때며,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은 총칼을 앞세워 약탈과 학살을 일삼은 원죄가 있고, 중국은 아직 한국보다 5년 이상 뒤처져 있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동아시아 문화 중심국으로 가장 적합한 곳이 한국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따지고 보면 현재의 한류 열풍도 다 이러한 특성에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를 주름 잡을 기회가 왔어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어 문제라고 그는 꼬집었다. “모든 사고에서부터 정부의 문화방침 등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문화 인식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유 교수는 무엇보다 “국제적인 시각으로 자국 문화를 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동해의 영문 표기, 신라시대 금관과 고분 등 고대 유물에 대한 배경 지식을 통해 우리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올바른지를 역설했다.

“히스토리 아닌 ‘스토리’ 읽자”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는 “히스토리를 읽지 말고 스토리를 읽어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일례로 그가 들려준 신라의 고분과 금관에 얽힌 스토리는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발굴의 이유부터 유물의 명칭까지 스토리가 끼지 않은 곳은 없었다.

1921년 9월, 경주 노서동에서 돌무지덧널무덤이 발견되는데 이 고분이 바로 금관총이다. 금관을 비롯해 순금 팔찌, 금제 허리띠, 유리그릇 등 장식품이 쏟아져 나오자 세상이 깜짝 놀랐고, 이 고분에는 금관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일제는 노서동과 노동동 일대의 신라 고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서봉총, 금령총 등의 발굴로 이어진다.

“9세기 중엽의 이슬람 기행문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에는 ‘신라라는 나라는 금이 풍부하다. 그러나 그 너머 동쪽(일본)에는 뭐가 있는지 모른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신라의 영향력과 교역 범위를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신라 금관은 도굴을 포함해 현재까지 모두 6점이 출토됐다. 그중 대다수는 출(出)자로 나무 모양이 형상화되어 있고 옆 부분에 사슴 뿔 모양의 삐져나온 장식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나무와 사슴을 신성시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러한 특성에서 우리 민족의 뿌리가 스키타이·알타이족에 있다는 사실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스토리를 읽다보면 이 금관들은 왕관이 아니라는 점도 알 수 있다. 유 교수는 “서봉총은 여자의 무덤이고, 금관총은 15살 전후 아이의 무덤이죠. 그렇다고 일상용으로 썼다고 보기에는 무게가 너무 가볍습니다. 결국 제사를 주관한 제관(祭官)이 썼던 것이라고 추리하는 게 가장 타당하죠”라고 설명했다.

‘서봉총’의 이름에 얽힌 스토리 역시 상당히 흥미롭다. 일제의 경우 기관차고를 지으려는데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흙과 돌이 필요했다. 돌무지덧널무덤의 특성상 무덤을 파면 자동적으로 흙과 자갈이 나오는 것을 경험한 일제는 본격적으로 무덤을 파헤치는 작업에 들어갔다.

마침 당시에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프 6세가 신혼여행으로 금강산을 둘러보고 이 발굴 현장에 와 있다가 거기서 금 허리띠를 직접 꺼내보도록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서전(瑞典)에서 ‘서’자와 금관의 장식으로 쓰인 봉황의 ‘봉’자를 따서 ‘서봉총’이라고 명명됐다는 것이다.

“콤플렉스 아닌 자부심 키울 때”
그는 또 한국인은 좁은 영토, 그리고 중국과 같이 자국의 고유한 문화를 지니지 못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꼬집었다. “과거 우리나라가 원나라의 사위 나라로서 수모를 겪었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습니다. 고려인들은 칭기즈칸, 쿠빌라이칸 등이 맘대로 하지 못할 만큼 용맹하고 끈질긴 민족이었습니다. 장장 27년을 싸워도 안 되니 대원제국의 사위 나라로 ‘대접’을 하게 된 것이죠.”

아울러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이는 한류에 제대로 대응해 나갈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한 예로 경주 안압지에 대해 우리가 배운 것은 신라 왕실이 이곳에서 파티를 즐기다 망했다는 얘기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곳의 탄생 배경과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다.

또한 우리는 가야가 고분에 23명을 순장할 만큼 왕권이 강력했으나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는 못했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것은 “23명이나 순장할 정도로 인권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해야 옳다는 것이다.

“특히 놀라거나 분노할 만한 것은 영어로 된 한국미술사 책이 단 한 권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글로 된 한국미술사도 두세 권에 불과한데, 그나마도 일반인들이 엎드려서 편하게 읽기 힘든 전문서적이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처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한국미술사 책을 갖지 못한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에 그는〈Story of Korean Art〉라는 책을 낼 것이라고 한다. “1차 목표는 소파에 기대 읽을 수 있는 한국미술사를 발간하는 데 있습니다. 머지않아 나올 예정인데, 국가 차원에서 그걸 읽지 않으면 주민등록증 발급을 안 해줘서라도 필독서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라는 그의 농담에서 한국 전통 문화의 전도사이자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으로서의 자부심과 열정이 묻어났다.

이상혁 기자 pressh@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