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박사에서 흙집 전도사 된 고제순 씨

강원도 원주 백운산 자락 산골. 이곳에 14년째 흙집을 지으며 사는 남자가 있다. 고제순 씨다. 대학에 출강하던 고 씨는 30대 후반 무렵, 본업을 접고 가족과 함께 매지리 마을로 와 백운산 자락에 삶의 터전을 닦았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흙집 짓기에 푹 빠졌다. 흙집의 매력을 혼자만 느끼기 아까워 남들에게 전파하다 보니 입소문을 타 찾는 사람이 꽤 많이 늘었다. 덕분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어느새 귀농·귀촌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 됐다.

 

흙집 전도사 고제순 씨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하나가 되는 산중 수행으로서 손수 집 짓는 과정을 즐긴다. 앞으로 그의 꿈은 행복마을 촌장이 되는 것이다. ⓒ이코노믹리뷰 박재성 기자

제가 너무 통속적인 걸까요. ‘귀농’이나 ‘귀촌’ 하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책 <월든>이나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이 아니라 가수 남진 씨의 ‘님과 함께’가 먼저 떠오르거든요. 이윤만 추구하는 경제활동에서 벗어나 자연의 순환과 소생에 가치를 두고 자급자족하는 대안적 삶을 실천했던 소로나 니어링 부부가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제게는 왠지 ‘따라 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처럼 보여서겠죠.

귀농·귀촌인들의 이야기를 취재하는 것도 어쩌면 제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을 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 때문인지 모릅니다. 퇴직 후 흙집 짓기에 앞장서고 있는 귀농·귀촌인 고제순 씨(55세)에게 듣고 싶었습니다. ‘철학박사’란 타이틀을 과감히 내려놓고 30대 후반에 귀농을 결심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어떻게 흙집학교까지 시작할 엄두를 냈는지. 소로, 니어링 부부와 비슷한 길을 가는 듯 보이는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지난달 24일 그의 흙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우리 가족이 살 집은 ‘흙집’

“처음부터 흙집을 짓겠다는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었어요. 공기 좋은 곳에서 소박하고 건강하게 살고 싶어 귀농을 했죠. 건강한 삶이 가능한 생태적인 주거 공간에 대해 고민하면서 집짓기 공부를 시작했는데 흙집이 최적의 대안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고 씨는 흙집 짓기를 시작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가 살고 있는 흥업면 매지3리 736은 회촌마을의 꼭대기쯤으로 강원도 원주 백운산 자락 산골에 있다. 원주는 그의 고향이기도 하거니와 계곡이 많고 탁 트인 경치, 깨끗한 생태계가 살아 숨 쉬는 곳이기에 이곳을 ‘제2의 둥지’로 택했다. 1990년대 중반, 처음엔 원주 시내 아파트로 이사해 살면서 마련한 매지리 땅에 따로 농사를 지었다. 어느 정도 적응되면 매지리로 집을 옮길 계획이었다.

문제는 집을 누가 짓느냐는 것이었다. 직접 지을 것인가, 건축업자에게 맡길 것인가. “어느 순간 자연의 모든 생명체가 자기 보금자리를 스스로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새와 벌도 손수 자기 집을 짓는데 하물며 인간인 내가 못할쏘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불끈 용기가 나더라고요. 물론 건축비도 절감해야 했고요.”

그렇다면 어떤 집을 짓지? 그는 신문에서 보고 알게 된 통나무 학교에 나가 손수 집 짓는 방법을 배웠다. 그런데 서양식 통나무집은 커다란 나무로 지어서인지 집 안에 있으면 뭔가 내리누르는 듯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살림집으로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 한옥에 눈을 돌렸다. 참 멋진 친환경 가옥이긴 한데 건축비가 많이 들고 고난도 제작 기술을 요하니 한옥도 패스. 초보자가 도전하려면 쉽게 지을 수 있는 집이어야 하는데…. “다른 전통가옥에 대한 책과 자료를 수집하면서 알게 된 기와집, 초가집, 귀틀집, 너와집 등이 모두 흙집이더라고요. 시골에서 마을사람들이 품앗이로 흙과 나무, 돌로 뚝딱 만들 수 있는 그런 집. 이거다 싶었죠.”

또 그가 흙집에 특별히 애정을 갖게 된 데는 <콘크리트 주택에서는 9년 일찍 죽는다>라는 책의 영향이 컸다. 건강에도 좋지만 수명이 다하면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고 다시 흙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생태적 주거공간이라는 점도 끌렸다.

고 씨는 집과 농토를 오가는 3년 동안 흙집을 짓기 위해 준비했다. 돈이 생길 때마다 틈틈이 공구나 흙벽돌 찍는 기계를 사고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이 비닐하우스에서 집을 지을 때 필요한 흙벽돌을 만들어 말리고 나무도 미리 사서 말렸다. 식구들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주택 설계도도 만들었다. 2000년 5월, 드디어 그는 흙집 짓기에 돌입했다.

 

철학박사가 시골로 오기까지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93년 귀국해 2년간 시간강사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뭔가 잘못 살고 있구나’라는 회의가 밀려왔다. ‘지금 내 삶은 행복한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니, 전혀 행복하지 않아.’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오랜 시간을 정신노동에 치우친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행복하려면 몸과 마음, 영혼의 움직임이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말이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어요. 만성피로증후군. 아토피, 천식을 달고 살았으니까요.”

그래서 고 씨는 건강과 관련 있는 영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바로 식(食), 주(住), 의(醫)에 관한 것이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 영역이 먹는 것, 사는 곳, 몸을 돌보는 것이에요. 결국 이 세 가지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불행해진 거죠. 이들 영역에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이제껏 헛공부하고 헛살았다 싶었어요. 오랜 시간 정신노동의 대가로 얻은 학위이건만, 내가 넓은 지식과 경험을 두루 갖춘 박사(博士)가 아니라 자기 전공 분야만 잘 아는 협사(俠士)라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었죠.”

그는 몸을 돌보기 위한 차원에서 먼저 무비료·무농약·무제초를 추구하는 자연농법을 배우고 자연의학을 공부했다. 그렇지만 남에게 의존적인 삶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제대로 하려면 기존의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했다. 그 바람직한 대안으로 고 씨는 귀농을 택했다. 이 같은 남편의 파격적인 결정을 다행히 아내는 흔쾌히 따라줬다. 농사 문외한인 데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유치원생이던 두 아이의 교육이 걱정됐을 텐데 오히려 남편에게 힘을 북돋아줬다고.

원주로 귀농해서는 그동안 모아놓은 돈과 은행에서 대출받은 자금을 합해 매지리에 약 4960m²(1500여 평)의 농토를 구입하고 옥수수, 밀, 고추 등의 작물을 재배했다. 자연과 더불어 살며 자급자족하는 제2의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이코노믹리뷰 박재성 기자

 

흙집 손수 짓고 흙집학교도 세워

손수 집짓기에 돌입한 지 7개월쯤 지난 2000년 11월, 고 씨 가족은 ‘고제순 표’ 흙집에 입주했다. 완공된 건 아니었지만 그는 직접 지은 집을 보며 벅찬 감동에 사로잡혔다. 건축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이 이 집을 지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의 성과가 이 정도라면 앞으로 어떤 일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의 집은 아직도 미완성 상태로 해를 거듭하면서 계속 업데이트 중이란다.

통창으로 햇빛이 쏟아지는 따사로운 거실, 거실 한쪽에 설치된 벽난로, 아이들이 원한 2층 다락방을 실제로 둘러보니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심리적 안정감을 줬다. 180m²(약 50평) 규모의 본채 옆 작은 사랑채도 아주 근사하다. 사랑채는 책을 읽거나 조용히 명상하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랑채 주변엔 메주를 띄우려고 만든 황토방과 김치 등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다. 곧 있으면 꽃과 나무, 나물로 가득 채워질 집 앞마당은 또 얼마나 멋진 공간이 될 것인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하는 그 노래가 떠오를 만큼 한 번쯤은 살고 싶은 집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지인들이 우리 집을 구경하러 와서 하는 얘기가, 흙집 짓는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학교를 만들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제가 전문가도 아니고 경험도 별로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손사래를 쳤죠.” 흙집에서 4년째 지내던 어느 날, 번뜩 그간의 공부와 경험 및 지식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직접 살아 보니 흙집의 진가를 알겠더란다.

“도시의 아파트에서 살 때 늘 시달렸던 만성피로증후군, 아토피, 천식 증세가 싹 사라졌어요. 충분히 자고 일어나도 항상 머리가 아프고 찌뿌듯했는데 황토구들방에서 자고 나면 몸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어요. 흙집에서 산 이후로 여태껏 병원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이 좋은 흙집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목표가 저절로 생기더라고요.” 대부분 전문 건축업자나 교수, 연구원은 콘크리트 건축 전문이니, 부족한 경험이지만 자신이라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 씨는 2004년 8월, 딸의 도움을 받아 ‘흙집학교’ 인터넷 카페를 개설했다. 관심은 기대 이상이었다. 카페를 열자마자 1기 수강생 모집에 10여 명이 재빨리 신청 등록을 마쳤다. 때마침 추석 연휴에 모 TV 방송사 밤 9시 뉴스에 소개되면서 그의 흙집학교는 더 빨리 알려졌다. 자신이 살 집을 흙으로 손수 짓는다는 콘셉트가 시청자에겐 신선한 의도로 비쳐졌으리라.

 

흙집 짓기 즐기며 행복마을 촌장 되고파

같은 해 그는 집 근처에 오프라인 흙집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에서 그는 독창적으로 연구개발한 가장 이상적인 흙집 짓기 공법과 기술, 설계 등을 교육생들에게 온전히 공개하고 전수한다. 교육과정은 20명 정원의 기초반과 심화반으로 구성된다. 심화반의 경우 7박 8일 동안 숙식을 함께하면서 흙집 짓기를 배우는데 누구나 일주일 정도면 익힐 수 있다. 고 씨가 흙집학교를 운영한 지 10여 년. 지금까지 총 1700여 명의 수강생을 배출했다. 대부분 건강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 흙집학교를 찾아오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 약 20~30%는 손수 흙집을 지은 것으로 추산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고 씨의 흙집학교 이름은 ‘흙처럼 아쉬람’(www.mudashram.com). 아쉬람은 인도어로 수행자가 거주하는 작은 움막, 수행처를 의미한다. 철학자답게 집짓기에도 자신만의 철학이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집을 짓는 과정은 나무 서까래와 기둥 등 기초설계를 직접 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하나가 되는 장이에요. 몰두의 순간, 잡념과 걱정은 사라지고 ‘지금 여기에 사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산중 수행이 따로 없어요.”

그는 집을 뚝딱 완성하는 것보다 흙벽돌을 직접 찍어내고 나무를 나르며 손수 집을 짓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 고 씨의 살림집 옆에는 학생들이 실습으로 지은 흙집이 자그마한 마을을 이뤘다. 그의 궁극적인 꿈은 행복마을 촌장이 되는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 50+

귀농해 정착하기까지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가끔 밤에 친구들이 술 한잔 하자고 불러낼 때를 제외하곤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어요. 산골에 살다 보니 제 차를 타고 내려와 시내로 이동해야 하는데 술을 마시면 차를 움직일 수 없으니까 집에 돌아올 수 없거든요. 40여 가구가 모여 사는 회촌마을은 주민 대부분이 소작농이에요. 좁은 농지를 공들여 경작하며 공동체 의식이 있고, 다행히 마을주민들은 제게 호의적이어서 요즘 외지인 출신의 귀농·귀촌인들이 겪는다는 텃새나 갈등 같은 건 없었죠.”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하나요

“자급자족하면 생활비가 많이 들지 않아요. 먹을거리는 수렵채취와 텃밭농사로 해결해서 식비는 거의 들지 않죠. 30만원(기초반), 70만원(심화반)을 받는 흙집학교 수강료가 도움이 되고요.”

흙집을 짓는 데 드는 비용은

“건축비가 집의 품질을 결정합니다. 사람들은 싸고 좋은 집을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집은 존재하지 않아요. 싸면 부실해지고 비싸면 품질 높은 집이 될 수밖에 없죠. 튼튼함, 실용성, 심미성, 건강 요소를 모두 갖춘 집을 지으려면 제 경험상 3.3m²당 500만원 정도가 들어요. 서울의 아파트 가격과 비교하면 그리 큰돈은 아니에요. 건축비를 더 줄이기 위해선 인건비를 절감할 수밖에요. 손수 집을 지으면 50%에 달하는 인건비를 아낄 수 있죠. 콘크리트 건물은 수명이 길어야 30~40년인 반면 흙집 같은 자연 소재 집은 습기만 잘 차단하면 수십 년·수백 년도 갈 수 있어 경제적이기까지 하죠. 여기에 근력 강화, 창조적 성취감, 자신감 등은 보너스예요.”

귀농·귀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조언한다면

“도시의 삶에 맞춰졌던 생각과 가치관을 바꾸지 않고 몸만 시골로 공간이동을 한다면 십중팔구 귀농·귀촌 생활을 만족스럽게, 행복하게 하지 못해요. 도시적인 생각을 자연과 합일되는 방향으로 바꾸세요. ‘공동체’ 의식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택한 새로운 터전을 귀농·귀촌 지역주민들과 함께 풍요롭게 만드는 길이야말로 자신이 꿈꿨던 새 삶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방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