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사장은 사람 좋기로 유명한 분이다. 그분은 관혼상제에는 빠지지 않고 가는 ‘인간미 물씬한 리더’로 정평이 나 있다. 막상 그분 속내를 들어보니 고민이 많았다. 여기 갔는데 저기 안 갈 수도 없고, 다 가자니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모된다는 것이었다. 고육지책의 결과, 그분이 생각해낸 것은 기준의 수립이었다. 친구, 인척 등에는 사모님과 분담하고, 종이 청첩장을 보낸 사람에게만 적어도 직접 갈 것을 고려한다는 것 등이었다.

혹시라도 ‘좀 잘나가더니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세속의 성공’보다는 ‘인연’의 기준을 분명히 하는 등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하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같은 부조가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베풂과 도움은 인간관계에서 중요하면서도 민감한 요소다. 해도 욕 얻어먹고, 안 해도 욕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공자는 이에 대해서 어떤 해법을 갖고 있었을까.

공자는 자애로웠지만 그렇다고 기분에 따라 퍼주거나, 원칙 없이, 또는 일률적으로 자로 잰 듯이 모두 똑같이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을 어떻게 얼마나 도울지 베풂에서 분명한 기준과 원칙을 갖고 있었다. 복지에 적용하자면 보편적 복지보다는 선택적 복지를 하되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는 게 공자의 지론이었다. 또 기준을 세웠으면 남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그 기준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옹야’ 편에 나오는 공서화와 원헌에 대한 사례, 그리고 안회의 장례 관련 이야기를 통해 공자의 베풂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살펴볼 수 있다. 요컨대 기분파보다 기준파가 되라는 게 공자의 사례 철학이었다.

#. 부자 제자 자화: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쓰지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들지 않는다

공자가 제자인 자화(子華)를 멀리 제나라로 심부름을 보냈다. 염유가 그에 대한 사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공자께 여쭈었다. 공자는 “1부(釜:6말 4되)쯤 보내려무나”라고 말한다. 염유는 조금 작다고 생각해 재차 더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1유(庾:16말)를 보내라”고 말한다. 염유는 그것도 적다 싶어 자기 마음대로 5병(秉:16섬, 5병이면 80섬. 대략 5병은 1부의 125배)을 보낸다. 염유가 이같이 통크게 부조한 것을 알고 나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제나라로 떠나는 자화를 보니까 살진 말을 타고, 고급 가죽옷을 입었더구나. ‘군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쓰지,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속담도 있단다.”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에서 제(齊)나라까지는 먼 거리인데 공서화가 사신을 간 것이다. 자화(子華)의 이름은 공서적이며 자화는 공서적의 자(子)다.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2살이나 어린 제자다. 거동과 용모가 빼어나고 외교와 예법에 능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강대국 제나라에 가는 사자로 뽑혔다. 당시에는, 누가 공무로 어디 먼 길을 떠나면, 남은 가족들에게 얼마간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자에게 공서화가 떠난 후 홀로 남은 그의 어머니에게 사례비를 보내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여쭌 것이다. 이에 공자는 1 부를 주라고 했다. 이게 작다고 느껴져 염유는 재차 더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는데도 공자는 1유 정도로 불린 게 고작이었다. 염유는 (물어봤자 소용이 없을 것같아) 재차 더 줄 것을 여쭙지 않고 자의로 당초에 공자가 말한 곡식량의 125배에 해당하는 5병을 임의로 보낸다.

과연 공자는 인색한 걸까? <논어>에선 바로 공서화의 이야기 뒤에 연달아 등장해 대조를 이룬다.

#가난한 제자 원사: 내가 주는 것을 사양하지 말고 받아 이웃에게 나눠주라

공자가 가난한 제자, 원사(原思)를 집사로 삼아 재무와 농정을 담당케 했다. 곡식 900의 월급을 주자, 원사가 사양했다. 공자는 이에 “사양하지 말거라. 네 이웃 사람들과 향당에 나눠주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한다.

원사는 따로 원헌(原憲)이라고도 불렸는데 제자들 가운데 가장 궁핍한 처지였다. <장자>에도 원사는 “쌀겨를 끓여 먹을 만큼 가난한” 인물로 나온다. 원사에 관해 <사기열전>에는 이렇게 소개돼 있다. 위나라의 재상이 된 자공이 여러 수행원을 거느리고 외딴곳에 살고 있는 원헌을 방문하였다. 원헌은 누더기옷을 걸치고 나왔다. 자공이 “그대는 병이 들었는가?” 하고 물어보자 원헌은 “무엇을 말하는가? 병(病)이란 도를 배우고서 그것을 행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가난하지만 병이 든 것은 아니다”라고 하여 자공이 크게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공자는 노나라 정공 9년부터 11년까지 3년간 사구(司寇, 오늘날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란 꽤 높은 벼슬살이를 했다. 그때 이 제자를 자기 가신으로 삼아 영지의 관리를 맡겼다. 900이라고만 하고 단위가 얼마인지 나오지 않아 이게 얼마나 되는 액수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 이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라 따로 표기하지 않은 것 같다. 스승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원사는 녹봉을 사양했다.

#. 사랑하는 제자 안회의 죽음: 곽을 만들기 위해 수레를 팔 수는 없다

‘어진 베풂’의 원칙을 가진 공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연을 하나 더 살펴보자. 공자는 안회를 칭찬해 “안씨 집 가신이라도 하겠다”고 종종 말하곤 했다. 그런가 하면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의 경계에 갇혔을 때 안회가 잠시 안 보이다가 나타나자 공자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에 제자 안회는 “선생님이 계신데 어찌 감히 앞서 죽겠습니까?”라고 화답할 정도였다. 안회가 죽었을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라고 할 정도로 상심하고 슬퍼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공자와 제자 안회는 사제 간을 넘어 사상적-감정적 동지였다. 그런 동지가, 스승보다 앞서 죽을 수는 없다고 말하던 애제자 안회가 고생 끝에 먼저 요절한 것이다. 안회의 아버지 안로가 공자에게 마차를 팔아 안회의 곽(槨. 관 바깥에 대는 널)을 만들게 해달라고 감히 요청한 것도 바로 이 같은 ‘끈끈한 유대’를 감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거절했다.

“부모는 자식이 재주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모두 똑같은 자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내 아들 리(鯉)가 죽었을 때에도 관만 있고 곽은 없었다. 내가 걸어다니면서까지 수레를 팔아 그에게 곽을 만들어주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대부의 뒤를 좇아 조정 출입을 하는 위치에 있었던 까닭에 조정의 체모를 위해서라도 걸어 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공자의 이 같은 행동이 ‘인색’함이 아니라 분명한 기준과 원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공자 자신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자 했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공자의 병이 위중해지자 자로는 (장차 성대한 장례를 대비해) 제자들로 하여금 가신이 되게 하였다. 병이 좀 나았을 때 공자는 이렇게 말하며 자로를 꾸짖는다. 공자의 위신을 높여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체면으로 제자들을 가신으로 위장해 기준을 넘어선 것을 준열히 꾸짖는다.

베풂에 있어 ‘원칙’과 ‘인색’의 갈림은 남과 나를 같은 자로 들이댈 때 설득력을 발휘한다. 은혜와 유익을 베푸는 데서도 공평되고 일관된 기준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베풂도 선택이고 용기다. 분에 넘치는 베풂, 자신을 깎아내리고 원칙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는 희생적이고 과도한 베풂은 오히려 관계를 해친다. 아무리 좋은 관계였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보답, 감사의 형태나 표현방식은 다양하고 제공하는 사람 입장에서 결정권을 갖고 있다.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명료하고 일관되게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다.

리더들이여. 기분파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기준파가 되는 것이다. 관대하고 인자한 리더란 평판보다 중요한 것은 베풂의 기준과 공유다. 무엇을 베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떤 경우에 어느 정도로 베풀지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기준과 분명한 원칙이다. 많이 주느냐, 적게 주느냐, 베푸는 인심파냐, 쩨쩨한 구두쇠냐보다 중요한 것은 베풂의 원칙과 기준이다. 기분파보다 기준파가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