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라 하면 흔히 타인과의 소통만 생각하기 쉽지만 가장 기본은 자기와의 소통이다. 내가 언제 화가 나는지, 그 신호는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조절하는지 아는 것이야말로 남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바탕이 된다. 나를 모르고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힘들다. 당신은 언제 화가 나고, 화가 나는 것의 신호는 어떻게 인지하는가.

작은 분노가 패가망신, 심지어는 나라를 기울게 한 실례가 있다. 애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 것이 아니라 닭싸움이 귀족싸움이 돼 군주까지 망명케 한 실화다.

노나라의 대귀족 후소백과 실권자 계씨 집안의 닭싸움이 귀족 간 권력투쟁으로 번져 왕이 망명까지 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후소백과 계씨 집안은 서로 이웃 간으로 행사 때마다 닭싸움을 벌였는데 종종 자존심 싸움으로 변질됐다. 내기 판돈도 점점 커졌다. 두 가문은 춘절 대회전을 위해 싸움닭을 철저히 조련하고 무장시켰다. 계씨 집안은 싸움닭 날개 안에 겨자를 바르고 머리에 투구를 씌웠다. 후씨가에선 닭발에 쇠발톱을 끼웠다. 결전의 날, 공격을 벌이던 후씨 집안의 닭이 겨자 때문에 눈이 따가워 미친 듯이 날뛰었다. 싸움은 계씨 집안 닭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정신없이 날뛰던 후씨 집안 닭의 날카로운 쇠발톱이 어쩌다가 계씨 집안 닭의 목을 꿰뚫었다. 자존심이 상한 계씨 집안 사람들이  ‘쇠발톱은 반칙’이라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후씨 집안 사람들도 가만 있지 않았다. ‘겨자는 반칙이 아닌가?’ 감정싸움으로 번지자 계씨 집안 사람들이 계평자를 슬쩍 자극했다. “후씨 집안 사람들이 평소에도 우리를 우습게 여깁니다.” 오만한 계평자는 일방적으로 후씨 집안 닭의 반칙패를 선언한 뒤 내기 돈을 받아간다며 이웃하고 있던 후소백의 땅까지 빼앗아버렸다. 늙은 후소백은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한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후소백은 당장의 분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노소공에게 가서 계씨의 험담을 늘어놓곤 토벌을 청했다. 계씨의 오만하고 참람한 권력 행사를 ‘눈엣가시’로 괘씸하게 여긴 노소공은 후소백의 분노 섞인 호소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전력이 딸린 후소백은 계씨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죽었다. 문제는 자신의 죽음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토벌명령을 내린 소공에까지 피해를 끼쳐 군주를 망명케 한 것이다. 결국 소공은 계씨의 보복이 두려워서 제나라, 진나라를 전전하다 타지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 공자는 35세에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갔는데 바로 노소공이 계손씨에게 쫓겨나 망명했기 때문이었다. 후소백은 나이 어린 라이벌 귀족 계평자에 대한 ‘개인적 화’를 당장에 참지 못해 결국 자신, 자신의 집안은 물론 군주까지 망명케 했다. . 역사에 ‘만일’이 없지만 후소백이 분노를 관리할 수 있었다면 역사의 나침반은 다르게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공자가 ‘군자의 조건’에서 수신의 덕목으로 입이 닳도록 강조한 것은 감정조절, 특히 분노 관리다. 밖으로 폭발하는 분노든, 내연(內燃)하는 원망이든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군자가 될 수 있다. 火가 禍가 되지 않게 해 和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것이 군자의 경지다. 공자의 언급을 살펴보자.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학이-)

온(慍)은 성내다란 뜻이긴 하지만, 노(怒)의 하위개념으로 울분을 마음속에 담아둔다의 의미가 강하다. 다른 말로 마음속으로 서운하게 여기는 ‘울화’쯤의 뜻이다.

-백이와 숙제는 구악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드물었다.(伯夷叔齊不念舊惡, 怨是用希 求仁得仁 -공야장-)

백이와 숙제는 형제지간이다. 백이가 형이고 숙제가 아우다. 이들은 고죽국 임금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서로 왕위를 양보하며 대를 이으려고 하지 않았다. 기원전 1100년 무렵, 은주(殷周)혁명이 일어나 주(周)의 무왕(武王)이 무력으로 은나라 주왕(紂王)을 타도하려고 하던 때였다. 이들 형제는 무왕의 행위가 옳지 못하다고 하여 무왕의 말을 붙들고 충고를 하였다. 그러나 천하는 주나라 아래로 들어가버렸다. 백이와 숙제는 새 왕조인 주나라의 곡식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 달아나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비를 캐어 먹으며 연명하다가 굶어 죽었다. 원시용희(怨是用希)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주자는 “깨끗함의 표본인 이 두 사람은 나쁜 일을 미워하기는 했지만 상대의 나쁜 일을 기억에 남겨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남들로부터 원망을 받은 일 또한 드물었다”로 보아 원(怨)을 원망받은 것으로 보았다.

공자가 인정한 수제자 안회의 인물평에서 높이 평가한 것 중 하나가 “분노를 옮긴 적이 없다(不遷怒)”는 것이었다. 주자는 안회가 극기(克己) 공부를 했기 때문에 ‘불천노(不遷怒) 불이과(不貳過)’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스승의 평을 받을 수 있었다고 풀이했다. 결국 학문이란 공부 그 자체보다 먼저 인간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공자의 심중이 드러난 인물평이다.

공자는 작은 모욕에 발끈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며, 만용과 의협심으로 인해 큰 재앙이 미치지 못하게 할 것을 경계하라고 누차 당부한다. 번지와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번지가 덕을 쌓는 일등에 대해서 묻자 공자는 여러 대답 끝에 “하루아침의 분노로 자신의 몸을 잊어버려 그 재앙이 부모에게 미치게 말 것”을 강조한다. 작은 일을 참지 못해 화를 내 큰 일을 해치는 것은 대장부의 용기가 아니라 필부의 용기다. 순간의 분노를 못 참아 일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못난 일이란 일이라며 용기와 어리석음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참을 忍을 파자해보면 마음 心+칼날 刃이다. 날카로운 칼날을 그대로 드러내면 분노이지만 칼날을 날카롭게 갈아서 마음의 칼집에 넣어놓으면 인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선 인(忍)은 능력이라 풀이한다. 군자의 조건에서 분노를 참는 忍은 단순한 도덕성을 넘어 강력한 역량이다. 당장의 억울함과 울분을 참고 새기는 것을 동양에서 리더의 덕목으로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분노를 관리하란 것은 회피하란 것도, 매몰되란 것도 아니다. 분노의 액셀러레이터도, 급 브레이크도 밟지 말라. 그저 기어를 바꿔주라. 필자가 리더들에게 감정관리를 강의하거나 코칭할 때 마법의 주문처럼 외우게 하는 것이 있다. 구성원들을 야단칠 때 앞자락에 “자네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이런 행동을 하다니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네. 무슨 일이 있나?”라는 멘트를 반드시 깔라고 조언한다.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가. 뚜껑이 열리는가. 먼저 감정을 인지하고 잠시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라. 그리고 해석을, 관점의 패러다임을 자동차 기어처럼 전환해보라. 분노관리엔 4단계 요법이 필요하다.

1단계는 자문자답을 통한 분노인식이다. 내가 화가 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남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2단계. 냉정의 회복이다.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림으로써 적대적 생각이 끓어오르는 것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주의를 돌리는 일이 강력한 기분전환이 된다. 깊게 생각하기보다 다른 것을 생각해보라. 만일 부하를 야단칠 일이 있다면 우선 화를 식힌 후 시간차 공격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3단계 목적 상기다. 단순한 ‘화풀이’가 아니라, 화를 내는 목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사랑의 매와 감정적 매는 다르듯 감정분출도 마찬가지다. 화의 강도가 아니라 목적이 더 문제다. 그러기 위해선 감정이 아닌 사실 중심으로 말하고, 과거가 아닌 미래를 이야기해야 한다.

4단계, 분노 크레도(credo)를 만들라. 크레도를 만들어 컴퓨터 옆이나 책상, 전화기 옆 등에 가시화시켜 놓는 것이다. 예컨대 구성원을 야단칠 상황이라면 ‘샛길로 빠지지 않는다’ ‘한 번 야단친 것은 소급해 야단치지 않는다’ ‘육두문자는 사용하지 않는다’ 등을 지키는 것도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