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상대의 부탁과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면 왠지 모를 미안함에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하지만 자신의 주관 없이 늘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합리적인 행동이 아니다. 원칙과 기준에 의거해 거절할 수 있는 힘이 곧 합리적인 이타주의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이다. 자신이 정해놓은 원칙의 경계선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인을 베푼다는 것은 부탁과 요구에 치인다는 것과 다르다.

거절을 잘하는 것은 응낙을 잘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논어>에서 공자의 행동을 살펴보면 거절의 달인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는 인자하고 관용적인 리더였지만 때론 거절로 ‘학문’을 분발토록 자극하기도 했고 ‘도-가치관’을 같이할 수 없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권력자의 영입 제안도 사양했다.

<논어>에서 거절 장면의 압권은 계씨집 가신의 실력자였던 양화의 ‘애기돼지찜 선물’을 둘러싼 밀당전이다. 당시 공자의 나이 48세로 명성은 이미 높았다. 양화는 자신의 세력 강화에 공자의 지명도를 활용코자 여러 번 만나고자 했다. 양화는 모시던 주군인 계환자에게 강제로 맹세를 시켜 노나라 실권을 장악한 뒤 공포정치를 실시하던 당대의 일인자로 모두가 벌벌 떠는 인물이었다. 공자는 양화가 주군에게 하극상하는 무도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만남 자체를 아예 피했다.

당시의 예절 중에는 선물을 받으면 준 사람에게 반드시 인사를 해야 하는 풍속이 있었다. 양화는 이를 이용, 삶은 새끼 돼지찜을 공자에게 선물로 보내 하례인사를 오게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있다’고 공자는 양화가 없는 틈만 타(누구에게 미리 망을 보게 했는지도 모른다) 양화에게 선물하례인사를 가는 것으로 양화를 피하면서도 끝내 만남을 사양했다. 그런데 어느 날 길에서 ‘운 나쁘게도’ 양화와 맞부닥쳤다. 양화는 훌륭한 보배이면서 난세를 그냥 두는 게 옳은 것이냐고 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의식, 이번처럼 영입 기회가 또다시 오지는 않을 거란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공자를 회유한다. 공자는 이에 물끄러미 “과연 그렇소. 내가 장차 출사하도록 하겠소”라고 대답했다. 공자는 자신이 벼슬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은 앞에서도 누차 표한 바 있었다. 당연히 앞으로 벼슬을 하겠다는 이야기였지, 양화의 밑에서 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공자는 끝내 양화의 가신이 되길 거부했다. 사필귀정이라고 양화는 하극상으로 자신의 주군인 계손씨를 겁박해 권력을 빼앗았지만 다시 뒤집혀 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2. 위영공의 병법 가르침 요청을 거절한 공자

“(위)衛 영공이 군사전략이나 병법에 대해 공자께 묻자 공자는 ‘저는 예법에 관한 일은 일찍이 배운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관한 건 배우지 못했습니다’ 하고는 이튿날 해가 밝기가 무섭게 쌩하고 위나라를 뜬다. 공자가 진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거절의 변이지 사실은 아니다. 이는 관련 기록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무인 출신이었다. 젊었을 때 천 근이나 되는 문짝을 번쩍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셌고, 삼군 중 으뜸가는 용맹한 장수로 인정받았을 정도였다. 실제로 공자는 문뿐만 아니라 무도 겸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제자들에게 이를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해왔을 때 공자의 제자 염구로 하여금 방어케 해 제나라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염구는 전쟁 후 “공자에게 학문뿐 아니라 무예도 따로 배웠다. “선생님은 문무에 겸하여 통달하다”는 것이 관련 기록에 보인다. 이를 보더라도 공자는 진법에 능했던 것이다. 다만 위영공에게 “예법만 알고 진법은 모른다”고 한 것은 완곡한 거절의 변으로, 위영공이 공자의 비전을 포용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에 거절한 것이다. 비록 위영공은 제후였지만 공자는 ‘신하가 모실 만한 군주를 선택할 수 있다’는 , 즉 ‘새가 나무를 택하지, 나무가 새를 택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3. 제자 유비에게 거절로 가르침을 준 공자

공자의 제자 중에 유비란 인물이 있었다. 그가 공자를 뵈려 했지만 공자는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유비는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에게 사상례를 배웠다고 하는데 아마 공자는 그에게 못마땅한 바가 있었던 것 같다).

말을 전하는 사람이 문을 나서자마자 공자는 비파를 손에 잡고 노래를 부른다. 바로 유비가 듣게 하기 위해서였다. 손님을 접대하는 사람이 문을 나서 그가 거절의 말을 전했을 것으로 생각될 무렵에 비파를 잡아당겨 노래를 불러 유비가 듣도록 한 것이다. 실제로는 병이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하여 ‘오늘 내가 그대를 만나주지 않은 것은 거절당한 원인이 그대에게 있다는 사정을 완곡히 알려주어 반성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을 경우, 그를 거절하고 만나주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깨닫게 한 것이다.

맹자는 일찍이 ‘가르치는 데에도 방법이 많은데’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서 가르쳐주지 않는 가르침, 이를 일러 불설지교(不屑之敎. 좋게 여기지 않는 가르침)라고 했다.

공자는 仁을 베푸는 것이 악행이나 추구하는 도와 가치가 다른데도 감싸 안고 포용하는 무골호인이 되란 것과 동의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같은 무리수는 오히려 위선으로 역효과를 낳는다고 생각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나 제후에게나 자신이 대답하기 마땅치 않은 문제에 대해선 ‘모른다’는 말 등으로 거절 의사를 분명히 표했다. 또 자신과 가치관이 맞지 않는 경우에도 거절했다. 새가 나무를 택하지 나무가 새를 택할 수 없다는 ‘선택’의 논리다. 만일 거절하기 곤란하다고 자신이 이행할 수도 없는 일을 쉽게 승낙해버린다면 오히려 상황은 더 곤혹스러워질 것이 분명하다.

공자의 일화로 살펴본 ‘군자’는 말하자면 합리적 이타주의자다. 그는 ‘인’을 행해야 한다고 해 아무에게나 늘 친절하고 무조건 예스를 남발하지 않는다. 상대가 자신과 도를 같이할 만한 인물이 아닌 것이 분명하면 그는 전략을 달리했다. 상대에 따라 태도를 바꿔 상대가 협력적인 사람일 때는 협력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사람일 경우엔 적대적인 방식을 택했다. 공자가 知人(사람 알아보는 안목)을 강조한 것도 이 같은 맥락과 연관시킬 수 있다. 무조건 검증 없이 믿고 따르는 것은 허당이지 군자가 아니다. 합리적 이타주의자는 늘 퍼주고 받아들이는 것을 ‘관용’으로 알고 기본적으로 상대를 신뢰하지만 상대의 행동이나 평판이 ‘도를 같이하지 못할 인물’로 드러나면 언제든 전략을 바꾼다.

호구나 허당이 아닌 합리적 이타주의자가 되기 위해선 이 같은 좌고우면의 상황 파악 지혜가 필수다. 이기심과 이타심의 균형, 관용의 기준과 방법을 세우고, 관용의 대상을 선택할 줄 아는 안목이다. 이것이 합리적 이타주의자가 되기 위한 괄호안 전제다. 이것을 모르고 무턱대고 베풀면 ‘뭐 주고 뺨 맞는’ 호구형 리더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위의 이야기에서도 드러나지만 공자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공자는 기본적으로 ‘원수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밀라’는 식의 퍼주기식 베풀기, 햇빛전략에 동의하지 않았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친절을 베풀지 거절할지 결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인을 행하는 이타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자신의 주관’ 없이 늘 상대의 부탁과 요구를 다 들어주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거절할 수 있는 힘과 기회를 제대로 행사할 줄 알아야 합리적 이타주의자가 될 수 있다. ‘원칙과 기준’에 의거해 거절한다는 것이 이기주의자와 동의어는 아니다. 자신이 정해놓은 원칙의 경계선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인을 베푼다는 것은 부탁과 요구에 치인다는 것과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