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금융 산업 새 판 짜기에 돌입했다. 민주당 정부가 내세운 선봉장은 폴 볼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전 의장. 그가 들고 나온 ‘볼커룰(Volcker Rule)’이 요즘 미 정가는 물론 우리나라 금융가에서도 초미의 관심사다.

‘볼커룰’은 최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은행규제방안을 일컫는 말이다.
지난 1970년대, 미국을 태워버릴 기세였던 인플레이션의 불길을 끈 경제 소방수인 폴 볼커는 자타가 공인하는 노련한 경제전문가이다.

존 F. 케네디와 린든 존슨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행정부의 온정주의적 복지노선이 초래한 스태그플레이션의 망령을 잠재운 승부사이다.

레이건 행정부와 알력을 빚다가 결국 공화당 소속의 ‘그린스펀’에게 연준의 의장직을 물려준 뒤 잊혀져가던 이 거물 정책 전문가가 금융시스템 개혁에 팔을 걷어 부치며 관심을 끌고 있다.

글로벌 금융산업 지도를 뒤흔들 수 있는 강력한 규제 내용을 골자로 하는 볼커룰은 정치적 타협을 배격하고 늘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해 온 이 원칙주의자의 작품답게 파격적 내용을 담고 있다.

주요 내용을 보면 시장점유율 10%를 넘기는 매머드급 인수합병(M&A)을 불허한 대목이 눈에 띈다. 은행 지주회사 내 모든 계열사의 트레이딩 계정 거래와 더불어 헤지·사모펀드 거래를 금지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고객의 예금을 투자 위험이 높은 금융 상품에 투입하는 것도 불허한다. 복잡해 보이지만, 이 금융 규제안의 두 가지 큰 축은 바로 ‘은행 개혁’과 ‘투기 규제’다.
재작년 금융 위기를 부른 글로벌 금융시장의 고질적 병폐에 대한 반성이 그 출발점이다.

성장 지상주의에 사로잡힌 주요 은행들은 ‘대규모 차입(leverage)’을 일으켜 투자 위험이 높은 금융 상품을 사들였으며, 개인들도 집을 담보로 대출 받아 흥청망청 돈을 쓰는 등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 행태로 ‘부의 효과’를 한껏 즐겼다.

금융 회사의 매머드급 인수합병(M&A) 붐은 위기를 인접 분야로 실어 날랐다.
과잉 유동성도 도마에 올랐다. 금융권은 대출 채권을 ‘페니메’나 모기지 회사들에 매각해 회수한 유동성을 밑천으로 다시 담보 대출을 하며 위기를 부채질했다.

볼커룰은 미 금융시스템에 내재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난 1929년 대공황 직후 피폐해진 미국 사회의 금융시스템을 닦고 조인 ‘글래스 스티걸’ 법안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정부 각국에 미칠 파급 효과에 주목
국내 금융회사의 최고 경영자들은 ‘볼커안’의 후폭풍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내 금융회사의 수장들이 내달 초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리는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에 참석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재무장관 회담도 볼커룰을 비롯한 미 오바마 행정부 금융규제안의 파고를 저울질할 치열한 정보전의 무대가 될 전망이다.

볼커룰은 금융회사의 시장성 수신에 세금을 부과하는 오바마 택스(Obama Tax)와 더불어 대한민국을 비롯한 국내 금융사 최고경영자들의 전략적 행동 반경을 위축시킬 개연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해외 자본의 흐름이라는 것이 해외에 기반을 둔 다국적 은행들의 신용을 공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금융규제안이 미국에만 발효된다면 그 실효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김경수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장은 볼커룰로 대표되는 금융규제안이 미국은 물론 대한민국을 비롯한 각국에 미칠 파급 효과에 주목한다.

서병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도 “미국 정부는 볼커룰의 국제적 도입을 주장하고 있으며 주요 20개국(G20) 회원국은 이러한 주장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금융시스템이 지난 1990년대 이후 밀접하게 맞물리며 유기적으로 작동하고 있어서, 한 국가의 금융시스템을 뜯어고치는 것만으로 뿌리 깊은 문제를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 측의 논리다.

유럽의 변방 국가인 아일랜드에서 터진 화산 사태가 유럽 전역의 항공 운항을 얼어붙게 만든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는 것이다. 물론 볼커룰이 미 의회를 원안대로 통과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그 후폭풍은 매우 클 것으로 관측된다.

‘볼커룰의 인수합병(M&A) 10%규정’은 우리금융지주, 하나금융지주, 외환은행, 산업은행을 비롯한 대한민국 금융산업의 주요 플레이어들의 주도권 다툼이 치열한 ‘메가뱅크’시나리오도 뒤흔들 잠재력이 있다.

더 큰 문제는 볼커룰이 미국, 유럽의 금융회사들이 헤게모니를 쥔 국제 금융시장의 질서를 영속화하는 ‘트로이의 목마’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국내 주요 금융 회사의 수장들이 미국에서 불어오는 규제 강화 움직임에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아직 덩지도 키우고 포트폴리오도 다변화해야 하는 후발주자들의 손발을 결과적으로 묶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

대한민국 금융권의 대표주자들은 글로벌 금융사들에 비해 규모의 경제를 꾀하기에 덩치가 아직 작다. 소비자 리서치 역량도 한수 아래다.

지역별 시장 포트폴리오도 일부 국가에 치우쳐 있다. 유럽의 은행들은 유럽연합은 물론 식민지이던 아프리카에 탄탄한 거점을 확보하고 있으며, 산탄데르를 비롯한 스페인 국적의 은행 또한 타깃 고객인 ‘히스패닉’들을 꿰뚫고 있다.

최근 수장들이 일제히 연임에 성공하며 글로벌 금융회사 도약의 깃발을 내건 국내 금융회사들로서는 위기감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유럽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들이 지구촌의 온난화 현상에 제동을 걸기 위해 온실가스 배출 감축 의무를 강제하자, 브라질, 러시아, 중국, 인도 등 후발 주자들이 ‘불공정성’을 이유로 강력히 반발해온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김경수 한국은행 금융연구원장은 “우리(금융회사들)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단계다. 위험을 줄이겠다는 것이 (특정국가) 금융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며 최근 규제 강화의 흐름을 경계했다.

G20, 볼커룰 파장 가늠할 주요 무대
폴 볼커는 레이건 행정부에서 중앙은행 총재직을 수행하며 숱한 갈등을 겪었다. 전방위적인 금리 인하 압박을 물리치는 일은 그로서도 버거웠다.

소속 정당인 민주당의 의원들도 그를 혐오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같은 민주당원인 그가 고금리 정책을 줄기차게 고수하며 결국 카터 당시 대통령의 재집권 시나리오를 허물어뜨렸다는 비판도 늘 따라다녔다.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낸 폴 볼커가 다시 시장의 전면으로 부상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소요됐다. 그린스펀이 미국 거품경제의 주범으로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이 경제학자에게는 1990년대 미국 경제 호황의 터전을 닦은 ‘마에스트로라’는 상찬도 따라다닌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이번 금융개혁안은 이처럼 소신이 뚜렷하며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경제 전문가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만든 작품이라는 점에서 결코 예사롭지 않다는 지적도 꼬리를 문다.

이런 점에서 이번 G20 정상회담은 미국의 금융규제안을 둘러싸고 국가 간 첨예한 이해가 부딪치는 주요 무대가 될 전망이다.

산업은행은 지난 2월 태국 7위권 은행인 시암시티은행(SGIB) 인수를 추진했다가 볼커룰 문제가 제기되면서 포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