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5일 이병철 회장의 100주기 기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는 이건희 회장.


왕의 귀환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이르면 올해 2분기 정도라고 생각했던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 3월24일 ‘위기 경영’을 앞세워 23개월 만에 컴백했다.

삼성전자 측은 이날 서울 서초동 사옥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건희 회장이 오늘 삼성전자 회장으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고 밝혔다.

이인용 삼성그룹 부사장(커뮤니케이션팀장)은 “사장단협의회가 지난 2월17일과 24일 이건희 회장 경영 복귀 문제를 논의한 끝에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글로벌 사업 기회를 선점하기 위해 이 회장의 경륜과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복귀 요청 건의문을 작성해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지난 2월24일 이 회장에게 전달해 한 달 여 고심한 끝에 어제(23일) 최종 수락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의 복귀는 어느 정도 예상됐었다. 지난해 말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명분으로 전격 특별사면된 이 회장은 올 초 올림픽위원회(IOC) 위원과 접촉하고 밴쿠버 동계올림픽과 IOC 총회에 참석하는 등 올림픽 유치를 위해 분주하게 뛰어 다녔다.

공식 행보를 시작하면서 삼성 주변 기류도 완전히 바뀌었다. 조심스럽게 복귀할 것이라는 수준에서 경영 복귀 자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단지 시간이 문제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삼성전자의 대주주이자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모든 법적 논란을 털어버리면서 여론 외에는 부담 요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면 후 첫 공식 일정이 1월 삼성전자가 전략 제품을 국제무대에 선보이는 ‘CES 2010’였으며 이어 지난 달 열린 이병철 삼성 창업주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 등에서 삼성 경영과 미래 전망에 대해 거침없는 답변을 했던 점도 조기 복귀설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라는 관측이다.

이 회장은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전시회 CES2010에서 경영 복귀를 암시하면서도 “아직 멀었다”고 선을 그었다.

지난 2월 열린 이병철 선대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도 “삼성은 아직 강하다”는 말로 복귀 시점이 늦춰질 것을 시사했다. 이 때문에 이번 복귀는 예상보다 빠른 복귀라는 점에서 다소 의외다.

최악 상황 가정 아래 조직에 긴장감
이 회장 복귀는 형식적으로는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건의문을 전달하고 이를 수락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복귀는 예정돼 있었으며 단지 시점만을 남겨 놓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룹 내부도 최고경영진을 중심으로 이 전 회장 복귀 문제를 오래 전부터 고민해온 것으로 보인다. 당초 재계 일각에서는 이 회장이 복귀하더라도 일선에서 한발 물러난 명예회장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 왔다.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공식 직급에 ‘명예’라는 꼬리표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삼성그룹 회장’이 아닌 ‘삼성전자 회장’으로 돌아왔다.

삼성이 처한 위기 극복을 정면으로 돌파해 왔던 이 회장이 또다른 승부수를 띄웠다는 평가를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그는 1987년 그룹 총수 취임 이후 삼성이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정면으로 돌파해 왔다. 이 회장의 전격 컴백도 그만의 승부수라는 시각이다.

이 회장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방식으로 삼성 임직원들을 독려해왔다.

1993년 ‘신경영’을 주창할 때도 이 회장은 그랬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는 물론, 반도체시장을 평정하며 삼성이 비상(飛翔)을 시작한 2000년대 중반에도 그는 위기를 외쳤다.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바꿔 삼성전자를 세계 전자업계의 리더로 키워냈다.

이 회장은 삼성이 고비에 처했을 때마다 승부사로 변신했다. 그의 무기는 세간의 예상을 뒤엎는 ‘충격요법’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전체 조직의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목표를 철저하게 각인시켜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발언으로 널리 알려진 1993년 신경영 선언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선언을 앞두고 소니, 마쓰시타, 필립스,지멘스 등 세계 일류기업들의 제품과 삼성 제품을 같이 진열하는 ‘비교 전시회’를 열었다. 이 회장은 책상 위에 놓인 삼성 제품을 일일이 망치로 내려치면서 “모든 제품들을 새로 만들라”고 사장들에게 호통쳤다.
삼성 내부에서 가장 강조하는 단어는 ‘위기의식’이다. 이 회장은 “모든 것이 가장 잘 돌아가는 지금이 가장 큰 위기 상황”이란 말로 직원들을 독려해왔다.

조윤성 기자 cool@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