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저절로 불려나오는 기억이 있다. 정확히 2년 전, 12월 31일 토요일을 나는 일본 나리타공항에 발이 묶여서 보냈다. 공항 대기실 바닥에 캐리어 두 개, 보스턴백 하나, 백팩 하나를 주르르 펼쳐놓고 ‘헤쳐모여’를 반복하느라 속은 타들어가고 이마는 땀으로 범벅이 됐다. 따로따로 떼놓고 보자면 대수롭지 않은 실수와 패착이 결합해 이루어진 악재였다. 일본의 중고 책값에 눈이 뒤집혀서 앞뒤 분간하지 못하고 책을 주워 담은 게 실수였고, 항공사 수화물 무게 규정에 얼마간 융통성은 있으리라고 예상한 낙관주의가 패착이었다.

‘23kg’이라고 찍힌 디지털저울을 바라보며 “3킬로 오버했는데, 이 정도는 봐주실 수 있죠?” 하고 비굴하게 웃는 나에게, 항공사 여직원은 깍듯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대형 항공사라면 모르지만 저희 같은 저가 항공사에선 곤란해요, 고객님.”

허를 찔린 듯 아팠다. 이런 식의 대답이 가장 신속하고도 효과적으로 고객의 기를 꺾어 ‘진상 짓’을 차단하는 방법이라고 ‘고객 대응 매뉴얼’에라도 적혀 있을 법했다. 나의 호소를 들어줄 수 없어서 안타깝다는 듯이, 여직원은 짐짓 애교스러운 울상을 지어 보였지만 ‘언중유골’이라고 거기엔 단단한 뼈마디가 느껴졌다. ‘염가 항공권을 구매한 주제에 고가 서비스를 바라다니, 염치도 없으시군요.’ 나의 텔레파시에 수신된 메시지는 이거였다.

결국 캐리어 두 개를 수화물로 부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공항 대기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짐 싸기에 돌입했다. 혹시나 해서 알아본 항공사의 추가 수화물 취급 수수료가 1kg당 무려 1900엔, 당시 환율로는 우리 돈에 3만원에 육박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돈을 다 내면 이 책들을 굳이 일본에서 이고 지고 갈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가방 속을 탈탈 털어 비우고, 옷으로 밑바닥을 채우고, 그 위를 책으로 덮고, 지퍼를 닫은 후, 휴대용 저울로 무게를 쟀다. 원하는 무게가 나올 때까지 무한반복. 다른 여행객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사투를 벌인 결과 30분 만에 내가 원하는 무게가 나왔다. 캐리어 하나와 보스턴백 하나를 합해 ‘20.5kg’을 만들었다. 나머지 짐은 거추장스러워서 일단 코인라커에 넣어두고는, 항공사 탑승 카운터로 의기양양하게 걸음을 옮겼다.

결과는 어땠냐고? 뭐, 부치긴 부쳤다. 다만 휴대용 저울이라는 한계 탓인지 무게가 ‘21.2kg’이 나와서, 가방에서 책 한 권을 빼는 해프닝은 있었다(하, 독하다!). 어쨌든 미션 하나를 완수했으니, 마음은 홀가분했다. 어서 출국심사를 마치고 우동이라고 한 그릇 먹어야지, 싶어 서두르는 내게 카운터 여직원은 기계적인 어조로 물었다. “기내로 갖고 들어가시는 짐에 칼이나 가위, 100ml 넘는 액체류 같은 건 없으시죠?” “그럼요!”

칼은 없고, 가위는 부쳤고, 액체류는 100ml가 안 되는 것들로만 비닐팩에 넣었으니까. 걱정할 것은 없다. 탑승 수속 카운터 옆에 세워진, 기내 반입 금지 품목을 안내하는 안내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나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는 공항검색대를 통과하면서 벨이 울리고, 경찰이 다가오고, 내 가방을 열어보겠다고 할 때까지도.

경찰관이 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자, 그제야 비로소 머릿속에 적색 경고등이 들어왔다. 맞다, 칼이다! 나한테도 칼이 있었다! 기가 막혔다. 가방에 분명히 아내가 부탁한 ‘세라믹 식도’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기내 반입 금지 품목의 하나인 그 칼하고는 연결짓지 못했다. 이 기막힌 인지 오류. 사물에 대한 감정적 인식이 객관적 인식을 방해한 셈이다. 내 마음의 우주에서 그 새하얀 세라믹 식도는 담요, 인형, 슬리퍼 같은 가정용품과 한 묶음이지, 총기, 화약, 폭탄 같은 것들과 한 묶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2011년의 마지막 밤, 나는 다시 탑승 수속 카운터를 향해 뛰었다. 옆에는 일본인 경찰을 동반하고서. 추가 수화물 취급 수수료 1900엔을 내고 나니, 세라믹 식도의 삼삼했던 구입가는 한국 인터넷쇼핑몰의 최저가 이상 백화점 정찰가 이하로 전락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아내가 부탁한 선물도 안 뺏기고, 비행기도 놓치지 않았다.

승무원에게서 맥주 한 캔을 받아들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대뇌피질에 검색되지 않은 채 무심결에 이뤄지는, 이런 식의 습관적인 인지 오류가 내 삶에 얼마나 많은 비극을 만들었을지 씁쓸하게 헤아려보았다. 그 순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행운 하나가 감지되었다. 코인라커에 넣었다가 그대로 기내에 갖고 들어온 캐리어의 무게가 20kg은 족히 넘을 거라는 사실에, 뒤늦게 눈이 번쩍 뜨인 것이다. 전날 항공사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기내 수화물의 1인당 허용 무게는 10kg이었다. 한바탕의 소동극이 만든 이 기묘한 행운.

2011년의 마지막 행운 덕분에, 진보초 고서점가에서 구입한 책들은 그 겨울 내 서재에 무사히 안착했다. 불운이 그렇듯이 행운도 그렇다. 대뇌피질에 검색되지 않은 채 무심결에 우리를 스쳐간다. 불운 못잖게 자신이 누리는 행운에도 눈이 밝아질 일이다. 2014년 새해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