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파벌 조성을 우려해 향우회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학연이나 지연에 따른 임직원들의 이합집산은 조직의 단결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라응찬 회장의 이러한 철학은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다. 지난 9일 오전, 신규영 신한카드 지점장은 이날 따라 눈코뜰 새가 없었다. 신 지점장은 자동차 할부 시장에 진출한 신한카드의 시장 공략을 주도해온 첨병이다.

잘 나가는 와인 강사로도 널리 알려진 그는 덕수상고를 나와 조흥은행에 입사했다.

‘화합 리더십’으로 조직원 사로잡아
신 지점장은 와인카드로 경쟁사가 주도하던 카드시장을 뒤흔든 주역이다. 그가 퇴근후 학원에 나가 주경야독하며 와인 자격증을 따는 등 시장공략에 ‘올인’한 결과이다.
신한은행은 강남 프라이빗 뱅킹(PB)센터에 30평짜리 와인바를 열었다.

김희정 신한은행 PB센터 커플매니저는 신한은행 PB센터 고객 자녀들의 결혼 도우미이다. 대한항공 스튜어디스 출신인 그녀는 결혼 상담 업체인 듀오를 거쳐 이 회사에 둥지를 틀었다.

이 은행의 PB고객자녀들의 중매를 알선하고 있는 결혼상담사이다. 그녀는 국내 은행권의 유일한 정규직 커플 매니저이다. 부산, 광주를 비롯한 지방을 마다하지 않고 뛰어다닌 그녀는 은행권 최초의 정규직 웨딩컨설턴트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신한금융지주에는 흔하지만, 경쟁사에는 드문 진풍경들이 있다. 상고를 졸업한 임직원, 정규직 커플매니저, 피인수 기업 출신의 잘 나가는 임직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지난달 26일 신한금융지주 이사회는 라응찬 회장을 ‘상근이사’로 재임명했다. 네 번째 연임이다.

지난 1982년, 재일 교포자본으로 출범한 신한 은행은 자본금 250억원, 점포수도 단 3개에 불과했다. 이희건 명예회장 등과 은행 설립준비를 해온 라응찬 회장(당시 상무)의 작품이었다. 이 신생 은행이 경쟁사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으로 본 이들은 많지 않았다.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이러한 회의론을 잠재운 주인공이다. 조흥은행 인수(2003년)는 초 일류기업 도약의 서곡이었다. LG카드(2007년), 굿모닝증권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수익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금융지주사의 해외시장 진출 성적표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난해 일본 시장에 진출한 이 은행의 현지 자회사는 상대적인 고금리에 몰려드는 일본인 고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다.

신한금융그룹의 미국 예탁증권(ADR)도 상종가이다. 지난 2003년 미국 증시에 상장 한 이후 무려 184% 가까이 급등했다.
미국의 주요 증시 인덱스와 비교해도 상승률이 월등하다.

경쟁사인 KB국민지주(38.3%), 우리금융지주(149%)보다 높다.
라응찬 회장은 작은 저축은행 정도의 규모에 불과하던 이 은행을 국내 금융권의 ‘빅3’ 대열에 올려 놓았다.

급변하는 시장 변화에 따른 선이 굵은 선택으로 새로운 국면을 돌파한 때문이다.
그는 또 화합의 리더십으로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기로 유명하다.

“사랑하는 신한 가족여러분, 저는 그동안 꿈속에서도 신한을 잊은 적이 없었고, 신한이 저의 모든 것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신한 가족 여러분이야말로 제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애인들입니다(어록중).”
라응찬 회장은 지금도 임직원들을 ‘애인’이라고 칭한다.

‘포스트 라응찬’ 부재는 부담으로 남아
라 회장이 짊어진 부담은 만만치 않다. 재작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위기의 파고에 흔들리며 국내 은행들도 한동안 좌표를 잃고 방황을 거듭해왔다. 국내 금융산업의 이정표 역할을 하던 글로벌 투자은행들도 이 후폭풍에 스러졌다.

국내 금융시장에 불어 닥칠 변화의 바람도 거셀 전망이다. 우리 금융지주 민영화가 국내 금융권의 판도 변화를 부를 판도라의 상자이다. KB국민은행을 중심으로 우리은행, 산업은행 및 외국계 은행 인수를 포함한 슈퍼 메가뱅크의 가능성이 조금씩 정부측에서 흘러 나오고 있다.

메가톤급 변화들이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이어 국내 금융산업을 한바탕 뒤흔들 태세이다. 라응찬 회장은 이번 회장 연임으로 이러한 판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사령탑’의 역할을 다시 수행하게 됐다. 제갈공명의 북벌이 사마중달을 되살린 격이다.

라 회장의 연임은 포스트 라응찬 시대를 열 대안 부재라는 신한금융그룹의 말못할 속사정도 가늠하게 한다. 포스트 라응찬을 준비하는 후보군으로는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사장, 그리고 이백순 신한은행 행장 등이 거론된다.

이들 후보 군은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등 현경쟁사의 수장들과 비교해 무게감이 덜하다는 평가이다.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조용한 리더이다. 50년 가까이 은행원 생활을 해온 그는 가급적 말을 아끼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편이라는 게 신한금융지주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좌우명을 보여주는 고사성어하나 찾아볼 수 없다.

라응찬 신한금융 지주 회장의 경영철학은 ‘줄탁동시’정도로 요약된다. 어미 닭이 부리로 달걀의 표면을 두드리고, 병아리도 내응을 해야 ‘껍질’이 깨지고 새 생명이 탄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임직원들의 화합과 팀워크만이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