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시절 희대의 어음사기사건을 일으킨 장영자 씨가 구속되고 있다.

과거 국내 은행들은 정치적 외풍에 극히 취약했다.

"구멍가게 수준서 최첨단 매트릭스 변신"

해방은 도둑같이 찾아왔다. 태평양전쟁서 패배한 일본인들은 당시 ‘조선’을 도망치듯 떠난다. 이승만 박사를 앞세워 해방정국의 정치 투쟁에 승리 한 자유당은 1957년 은행 귀속주 매각에 나서게 된다. 당시 저축은행 인수에 성공한 주인공이 바로 정재호 삼호그룹 창업자이다.

정 씨는 대구에서 방직공장을 운영하는 유명인사였다. 하지만 그가 전국구 스타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떠난 저축은행을 인수한 덕분이다. 자유당 정권과 유착은 도약의 주춧돌이었다.

6·25동란으로 막대한 부를 손에 쥔 그는 은행과 방직공장을 소유한 거대재벌로 성장한다.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도 자유당 시절에 잘 나가던 기업인이었다. 당대의 실력자들이 몰려든 흥업은행(한일은행으로 개명했다 상업은행과 합병해 한빛은행이 되고 다시 현재의 우리은행으로 바뀜) 인수전에서 지분의 83%를 매입해 지배주주로 등극하는 데 성공한다.

연타속 홈런 격이었다. 이 선대회장은 동일 은행과 대구은행이 합병해 출범한 조흥은행 주식 55%를 매입, 시중은행의 경영권을 잇달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조흥은행, 상업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등 4개 시중은행은 소유권이 정부에서 민간으로 넘어가게 된다.

내로라하는 민간자본이 잇달아 유입되면서 은행산업도 자율 경영의 부푼 꿈을 키워갔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민간기업들이 경영권을 넘겨 받았지만 자유당 정부의 은행 통제는 지속됐다. 대출금지 업종에 담보도 없이 거액이 대출되는 일이 빈번했다. 이 자금의 상당 부분은 정부 여당에 흘러들어간다는 소문이 그치질 않았다. 건설업계도 당시 자유당 정치자금의 주요 루트였다.

부실대출에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자유당은 4·19혁명의 심판을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3공화국 정부는 하지만 한술 더 떴다. 자유당 때 잘나가던 민간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몰아붙여 은행 주식을 국가에 헌납하도록 강요한다.

자유당 말기 시중은행을 대거 인수하는 데 성공한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은 금융산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4대 시중은행의 지배주주가 민간에서 다시 정부로 바뀌는 순간이다.

3공화국 출범 이후 국내 시중은행은 정부의 정책 집행을 보좌하는 준 행정기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살기가 등등한 군인 출신들이 나이가 많은 은행장들의 머리 위에 군림했으며, 집권 후 시중은행장 대부분을 쫓아낸다.

서울대를 다니다 중퇴하고 육사에 입학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당시 시중은행 인사를 좌우했다.

시중은행장, 혁명정부에 로비 주력
관치금융 시대의 출발이다. 중앙정보부가 시중은행장 후보를 골라내면 김유택 당시 재무부 장관이 은행별로 이들을 배치했다. 은행장뿐만이 아니었다. 시중은행 임원 대상자들도 중앙정보부에서 골랐으며, 선임은 김 장관이 했다. 당시 선임된 은행장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7개월에 불과했다.

권력자들과 친소관계가 은행장은 물론 임원들의 운명을 좌우했다. 은행권 인사들이 당시 중정과 최고회의를 찾아다니며 승진운동에 몰두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정부는 부정축재자들의 시중은행 주식을 국고로 환수한 후 적당한 시기에 다시 민간에 불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3공화국 집권기는 국내 금융산업 빅뱅의 시기이기도 했다.

가난 탈피를 쿠데타 합리화의 명분으로 삼았던 군사 정부는 새로운 유형의 금융기관 설립에 적극 나선다.

한국은행 외국부만으로 수출 관련 업무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국제 수준의 외환 전문은행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당초 은행명은 ‘환금은행’이었으나 국회 심의 과정에서 ‘한국외환은행’으로 변경됐다.

단자 회사들이 설립된 것도 군사 정부 때이다. ‘사채 망국론’까지 나올 정도로 기승을 부리던 음성자금에 숨통을 틔워주기 위한 조치였다. 생산설비를 장기 임대차해 사용할 수 있는 리스회사도 설립됐으며, 서민의 금융기관인 삼호신용금고(현 상호저축은행)도 이 무렵 처음 생겨났다.

한국투자신탁·대한투자신탁도 이때 창립했다. 정부가 은행을 경제성장의 지렛대로 적극 활용하던 때이니 물가 안정을 주요 사명으로 하는 중앙은행이 제 역할을 못한 것은 불문가지였다. 중앙은행은 당시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로 불릴 정도로 행정부에 예속돼었다.

정치자금을 낸 회사에 거액의 편법 대출을 해주고 뒷돈을 챙기던 자유당 정권의 행태는 3공화국 때도 되풀이된다. 신선호, 강동원, 최안준 등 서울대 출신의 젊은이들이 설립한 율산은 은행 수출금융으로 문어발 확장을 하다 1970년대 말 부도를 낸다. 정치적 타살설이 제기된 율산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는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은 시중은행장들이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집권한 5공화국 정부는 시중은행 민영화의 치적을 남겼다. 한일은행 정부 보유주식에 이어 1982년 제일은행과 서울신탁은행, 1983년 조흥은행의 정부 보유주식을 민간에 매각한다.

5·16쿠데타가 터진 이후 정부로 주인이 바뀐 5대 시중은행은 상업은행(1972년 매각)을 제외하고 이때 민영화된다. 은행이 군사 쿠데타로 정부에 귀속된 지 20여년 만에 다시 소유권이 민간으로 넘어갔지만 여전히 정부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은행장 선임은 군사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정부의 몫이었다.

5공화국 당시 한국 은행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 바로 신한은행의 설립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교사로 불리던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창립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선진국 금융자본을 끌어들여 합작은행을 설립해 선진 금융기법을 이전받고자 했다. 합작 대상은 일본과 미국이었다.

하나금융지주 경영진이 지주사의 유가증권시장 신규상장 기념식을 갖고 있다.

신한은행, 국내 금융사에 ‘한 획’
미국과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합작해 한미은행(현 씨티은행)을 설립했다. 또 일본에서는 재일교포들의 자본과 인력을 끌어들여 신한은행을 설립했다. 신한은행은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거류민단계 재일교포들 1200여명이 출자해 설립한 은행이다.

신한은행의 출범은 국내 시중은행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대출 커미션 수수를 비롯해 금융계의 고질적인 관행들을 혁파했다. 지난 1980년대는 국제그룹이 괘씸죄로 일순간에 공중분해되던 살벌한 시기였다.

신한은행이 외풍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던 것은 당시 재일교포들의 영향력이 상당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역대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교포들과 원탁회의를 하다보면 참석자 상당수가 신한은행 주주일 정도였다”며 “일본에 건너가 막대한 부를 쌓은 이들은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국회의원 3~4명에 해당하는 ‘파워’를 자랑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권력형 비리로 은행장들이 철창 신세를 지는 수난의 역사는 이때도 되풀이된다.

장영자·이철희 사태로 당시 40대 은행장 시대를 연 임재수 조흥은행장은 옥살이를 해야 했다. 조흥은행은 당시 우리나라 금융계를 자신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주물렀던 희대의 어음 사기극의 피해자였다.

90년대에도 시중은행의 수난사는 멈추지 않는다. 세무 담당 공무원으로 일하다 사업에 뛰어든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은 국내 시중은행에 ‘재앙’을 부른 장본인이다.

시중은행, 정태수로 풍비박산
“직장 그만둬. 사업하면 대한민국에서 첫째·둘째 손가락안에 꼽힐 거야”라는 역술인의 예언이 잠자고 있던 그의 사업가 기질을 깨웠다. 한보그룹이 재벌로 자리매감한 것은 금호철강을 인수한 후부터였다. 한보철강은 때마침 아파트 건설붐을 타고 철근 판매로 엄청난 이익을 올렸다.

한보그룹은 1986년 재계 서열 30위권에 진입했다. 철강업에 자신이 생긴 정태수는 굴지의 철강 재벌로의 변신을 구상한다. 1987년부터 충남 당진에 대규모 일관제철소 건설을 추진, 한국 최대의 민간 제철업체를 꿈꾼 것이다. 하지만 철강업 진입은 그의 몰락을 불러온 악재가 됐다.

당시 한보의 금융권 총부채는 5조8000억원에 달했다. 은행권이 챙긴 담보는 2조6940억원에 불과했다. 은행별로는 제일은행이 1조783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산업은행 9326억원, 조흥은행 4940억원, 외환은행 4212억원, 서울은행 2110억원, 상업은행 455억원의 순이었다.

특히 제일은행은 은행의 자본금인 8200억원을 훨씬 상회하는 거액을 털어넣었다. 당시 신광식 제일은행장, 우찬목 조흥은행장 등은 줄줄이 구속되며 다시 한번 쓰디쓴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한보그룹은 올해 초 KT사장으로 부임한 당시 이석채 청와대 경제수석의 건의로 부도처리된다.

그리고 IMF 환란의 신호탄을 쏘아올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1980년대 장영자라는 미모의 여성에게, 그리고 90년대 들어 정태수에 휘둘린 조흥은행은 2004년 신한은행에 인수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노사정이 신한은행에 인수된 조흥은행의 3년간 독립경영을 보장하는 합의문을 교환하고 있다.

4대 금융지주, 최첨단 경영조직 구축
또 한보, 진로, 대우를 비롯한 대기업들의 잇단 부도로 거액의 부실 대출을 안게 된 은행들은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으로 다시 주인이 정부로 바뀌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후 정부 주도로 은행 간 합병이 급물살을 타게 된다. 첫 작품이 바로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이다.

한보 한 회사에 자본금을 상회하는 거액을 털어넣었던 제일은행은 뉴브리지캐피털에 매각됐다 지금은 주인이 스탠더드차터드로 바뀌었으며, 외환은행도 사모펀드인 론스타에 팔려 아직까지도 헐값 매각 논란을 빚고 있다. 살아남은 은행들도 금융지주회사의 일원으로 힘겨운 싸움을 앞두고 있다.

국내 은행의 역사는 정치권과의 ‘불가근불가원’이 생존의 필수요건임을 가늠하게 한다. 정치적 외풍에 휘둘려 거액의 부실대출을 하던 정치행장은 자신은 물론 소속은행을 파멸의 길로 인도했다.

보험, 카드, 증권, 은행을 비롯한 분야에서 금융산업의 ‘월마트’를 지향하는 국내 4대 금융지주그룹은 복합 금융기업 시대의 도래를 뒷받침할 ‘매트릭스(matrix)’ 형 조직으로 시스템을 바꾸고 글로벌시장 진출, 신성장동력 확보, 정치적 외풍 차단의 고삐를 바짝 조이고 있다.

금융 계열사들의 ‘독자경영’과 ‘시너지’를 정조준했다. 비용절감 차원에서 중복 업무를 단일화하고, 금융상품도 교차 판매하며, ‘베스트 프랙티스’를 공유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구축했다.

국내 금융산업 역사상 지금보다 더 선진적인 경영시스템을 구축한 때가 없을 정도로 외형적인 시스템은 뛰어나다는 평이다.

정윤영 딜로이트컨설팅 상무는 “국내 은행들의 리크스 관리 수준은 지난 1997년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정교한 시스템을 구축해 놓고도 똑같이 위기를 겪는 것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외부에 좀 더 문호를 개방하고 업무 프로세스의 효율성도 강화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박영환 기자 blade@ermedia.net


키워드

#커버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