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까지 와서 고작 벼룩시장에 간다고?”

하지만 나의 조심스런 태클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들뜬 분위기는 좀체 가라앉지 않는다. 그냥 벼룩시장이 아니라 일본 특유의 ‘후리마켓토(フリマ)’이고, 그것도 패션 스트리트 하라주쿠의 자유로운 감성을 고스란히 수혈받은 대규모 플리마켓이라는 거다. 결국 아침을 서둘러 먹은 뒤, 16인치 소형 캐리어를 달달 끌고서 길을 나섰다. 손에는 따뜻한 커피를 가득 채운 텀블러를 들고서. 쓸 만한 게 눈에 띄면 가득 쓸어 담아 오리라는 각오쯤 되겠다.

과연 하라주쿠 역에 내리니 노란 머리, 빨간 머리, 닭벼슬머리, 방사형 정전기머리(?) 등 전형적인 일본 스트리트 패션으로 치장한 젊은이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물론 아내의 ‘매의 눈’은 그 현란한 색채의 틈바구니에서도, 커다란 비닐봉지를 손에 든 행인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 “비닐봉지들을 보니 냄새가 나네, 냄새가. 근처에 후리마켓토가 있다는 거지.” 우리 부부는 벼룩시장을 찾아 코를 킁킁거리며 요요기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후리마켓토 구역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커다란 비닐봉지에 이어, 온갖 음악 소리가 길잡이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로큰롤도 있고, 애시드 재즈도 있고, 일렉트로닉스도 있다. 저마다 공원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서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고 돈을 번다. “거봐, 내 말이 맞지? 요요기 후리마켓토는 그냥 벼룩시장이 아니라고.” 아내의 말에 따르면, 세계 각국에서 온 관람객들이 함께 테크노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는 레이브 파티도 자주 벌어진단다. 격식 없는 자유로움과 국적을 초월한 연대감, 그것이 요요기 벼룩시장의 맛인 셈인가. 우리나라의 홍대 인디 문화와도 비슷한데, 그보다는 좀 더 진하고 강렬한 냄새가 난다.

하기는 신주쿠 요요기공원은 90년대 중반에 노숙자 지원단체인 ‘이노켄’(‘생명과 권리를 쟁취하는 모임’의 줄임말)이 태동한 일본 문화운동의 메카이기도 하다. 연초에 읽었던 <스트리트의 사상>이라는 책에서, 문화학자 모리 요시타카는 ‘스트리트’라는 낱말 뒤에 ‘패션’만 붙이지 말고, ‘사상’이라는 단어를 결합해 생각해볼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 우리말로 바꿔보면 ‘길바닥 철학’인데, 여러 사람이 오가며 저절로 길이 나듯 사람들의 자율적인 움직임 속에 형성되는 ‘자발성’과 본질적으로 한 사람의 이름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수성’ 내지는 ‘익명성’이 그 특징이다.

모리 요시타카는 ‘스트리트의 사상’이 깃들어 있는 한 형태로 ‘사운드 데모’를 꼽는다. 얼핏 퍼레이드를 연상시키는 알록달록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알록달록한 색으로 치장된 피켓이나 풍선 따위를 들고 행진을 하는 것인데, 그 한복판에서 음향 장비를 실은 ‘사운드카’로 음악을 틀어놓고 즉석 춤판을 벌이는 거다. 이런 식의 시위 문화는 특유의 축제성으로, 도덕주의적인 경직성을 보였던 이전의 시위 문화를 발전적으로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일본 ‘프리터(フリーター) 세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결론을 말하면, 요요기 후리마켓토는 즐거웠다. 나는 빈티지한 구릿빛이 멋스러운 앤티크 망원경을 500엔에 ‘득템’했으며, 아내는 비니와 꽃무늬 원피스를 묶어서 200엔에 낚아챘다. 조카들을 위한 오종종한 인형과 장난감은 작은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서 100엔이라는 환상적인 가격에 건지기도 했다. 배가 두둑해진 16인치 캐리어처럼, 기분 좋은 포만감이 밀려왔다. 후리마켓토 한구석에 있는 월드 푸드 마켓에 쭈그리고 앉아, 그리스식 요거트를 먹으며 일본 전통의 타악기 음악인 다이코 그룹의 공연을 구경했다. 인색하던 아내가 쪼르르 뛰어나가, 연주자들 앞에 있는 함에 지폐를 넣고는 붉어진 얼굴로 자리로 돌아온다. 격식 없는 자유와 연대감의 맛을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신문에서 미국, 영국, 호주 등지에서 ‘무신론자들을 위한 교회’가 맹렬히 교세를 확장 중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그 특별한 교회의 목표는 ‘더 나은 삶(Live better), 타인에 대한 배려(Help often), 삶에 대한 더 많은 호기심(Wonder more)’이라고 한다. 나는 우리가 체험한 요요기 벼룩시장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마침 그날도 일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