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어야 할 때 묻고, 지시해야 할 때 지시하
리더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독단과 참여’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의사결정을 하기 전 사안의 특성, 문제와 정보를 공유해야 할 대상, 집단회의의 장소 등을 고려해야 한다. 이에 따라 회의를 주재해 의사결정을 진행할 것인지 아니면 의사결정자로서의 역할을 그대로 수행할 것인지에 대한 사전 검토가 필요하다.
“경부고속도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차 있는 사람들만 팔도 유람하고 다닐 것 아닌가? 쓸데없는 돈 낭비다.”
“쌀도 모자라는데 웬 고속도로냐? 한국의 모든 차를 줄 세워봐야 경부고속도로를 못 채울 것이다. 팔과 다리가 말라버린 기형아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6대 대선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하자 야당과 언론이 내세운 반대 구호였다. 오늘날 보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반대 구호다. 총 공사비 429억7300만원, 그해 국가예산의 약 1/4을 차지하는 대규모 공사였으니 들끓었을 법도 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불필요하다는 여론으로 당시 대한민국 전체가 들끓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1970년 준공 후 경부고속도로는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묶었고 많은 산업물자를 수송하는 황금 도로가 되었다.
만일 그때 반대여론에 밀려 ‘추진’하지 않았다면 ‘한강의 기적’은 쓰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리더가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해 ‘성공한’ 케이스다. 그런가 하면 반대를 무시하고 추진해 ‘좌초’한 케이스도 적지 않다. 삼성의 자동차 사업 진출, 웅진의 건설업-태양광 사업 진출 등이 그 예다. 이들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인수를 추진함으로써 엄청난 손실을 보았거나, 심하게는 기업이 무너지는 사태를 초래하게 됐다. 어떤 경우에 여론의 반영과 참여가 독이 되고, 어떤 경우에 약이 되는 것일까?
仁義의 정치를 주창한 공자는 참여적 리더십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을까.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 임금이 이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위태롭게 된다”(<순자>의 ‘노애공’ 편)고까지 혁신적 사고를 표명했던 그 아닌가. ‘유교무류(有敎無類.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의 평등한 가르침을 실천한 그가 아니던가. 하지만 다음의 말은 같은 인물의 말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보수 반동적이다. 이 장을 근거로 공자가 우민정치를 지지했다고 말한다.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민가사유지, 불가사지지-태백-). 백성을 (도리에)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하는 이유를 알게 할 수는 없다.
이 구절에 대해선 여러 학자의 설이 분분하다. 북송의 정자는 “일부러 백성이 모르도록 한다면 이는 후세의 朝三暮四(조삼모사) 속임수이니 성인의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우민정치와 구별한다.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 캉유웨이(康有爲)는 “ 민가, 사유지, 불가, 사지지”라고 띄어 읽어 “쓸 만한 백성은 따르게 하고, 그렇지 못한 백성은 알게 한다”고 새롭게 해석하여 공자를 민주화하였다. 중국 사상계의 거목 리쩌허우(李澤厚)는 <논어금록>에서 “백성들과는 이루어진 일을 즐거워할 수 있지만 함께 시작하기를 도모할 수는 없다”는 옛말과 연관시켰다. 혹자는 알게 한다는 것을 ‘자신의 행위를 생색낸다’로 해 리더가 자신의 선정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참여와 독단이라는 양 날개의 의사결정 방식을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활용한 대표적 인물은 정나라의 재상 자산이다. 자산은 기원전 547년 재상에 임명되어 기원전 522년 세상을 뜨기까지 20년 넘게 국내 정치를 혁신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중국 최초로 성문법(成文法)을 제정해 국가질서를 정돈해 각종 엄격한 제도를 실행했다. 정치문란, 민중들의 무법, 불법비리 등 범국가적인 혼란에 맞서 먼저 국가질서를 정돈하는 일련의 조치는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백성들은 원망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며 자산을 저주하는 노래까지 만들어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자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정개혁을 굳세게 밀고 나갔다.
자산이 그런 ‘강단과 독단’의 추진력만으로 모든 정책을 밀어붙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엄격한 정책을 밀고 나가는 동시에 민심수렴과 정치적 참여와 표현도 중시했다. 정나라에는 ‘향교(鄕校)’라는 교육기구가 있었는데 초기의 설립 취지인 지방귀족 교육기관에서 갈수록 당파와 폭동모의를 하는 정치활동장소로 변질되었다. 심지어 자산의 아버지 자국(子國)도 이 폭동의 와중에서 피살되었다. 일각에서 향교를 없애자고 했을 때 자산은 이렇게 말했다.
“왜 향교를 없애려 하는가? 조만간 그곳에 모여 권력을 쥔 사람들의 장단점을 논의할 텐데. 그들이 칭찬하는 점은 계속 유지하고 비판하는 점은 고치면 될 터이니, 그곳이 바로 우리의 스승이 될 것이다. 충성스럽게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백성의 원성도 줄어들 것이다. 위엄과 사나움만으로는 원망을 막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든지 비난을 받으면 그것을 하루빨리 제지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마치 넘치는 홍수를 막으려는 것과 같다. 홍수로 인한 피해는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여 어찌해볼 수가 없다. 제방을 터서 물길을 다른 곳으로 흐르게 하느니만 못하다. 향교를 남겨두는 것은 사람들의 논의를 듣는 것 자체가 좋은 약으로 병을 낫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마침내 집권 3∼5년 사이에 정나라의 정치는 큰 효과를 보게 되었다. 초기엔 저주의 노래를 불렀던 백성들도 나중에는 자산의 정치에 감복해 그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위의 이야기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는가. 반대를 무릅쓰는 것도, 여론에 무조건 휘둘리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 혹자는 성공하면 강력한 리더십, 실패하면 독단이라고 말한다. 또 참여파 역시 성공하면 민주적 리더십이지만 실패하면 리더십 부재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현령비현령’으로 결과를 가지고 꿰맞춰 성패를 귀인적으로 해석하니 ‘자신이 마음 편한 방식’대로 결정하면 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어떻게 의사결정을 내릴 것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리더가 매일 부딪치는 고민이다. 여기에 마키아 벨리는 명쾌한 기준을 제시한다. 참여냐, 독단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의 말을 듣고 수용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조언이다.
“아첨꾼들로부터 당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이 진실을 말하여도 당신은 화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당신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더는 당신을 존경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현명한 통치자라면 제3의 방법을 택할 것이다. 즉, 현명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이들에게만 통치자 자신에게 진실을 말할 자유를 주되, 통치자가 먼저 물어보지 않는 한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는 모든 사안에 대하여 그들에게 묻고 의견을 들어야 하며 그런 후 스스로 깊이 생각해야 한다. 등용된 사람들이나 자문에 응하는 각자가 더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면 할수록 그만큼 인정을 받는다는 느낌을 갖도록 행동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통치자는 이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하며, 일단 결정된 바는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독단의 전제군주형도, 휘둘림의 무골호인도 아닌 ‘합리적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러 논문의 결과를 살펴보면 하향적 독재적 접근법도, 완전 참여적 접근법도 100% 정답은 아니다.
조직 연구의 권위자 헨리 민츠버그(Henri Mintzberg)는 “최고경영자는 전형적으로 일과 시간의 69% 정도를 공식-비공식 회의를 하는 데 소비한다. 이 비율은 참여적 조직에서 훨씬 높게 나타난다. 신속한 의사결정이 필요한데도 참여적 경영 때문에 조직의 대응이 늦어진다. 따라서 언제 어느 경우에 참여적 의사결정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해선 적절한 개념적 틀을 사용하여 시간비용과 잠재적 이득을 놓고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근본적으로 독재적이건 완전 참여적이건, 중도적이건 간에 한 가지 전략이 모든 상황에 적용되지 않는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취해야 할 전략이 다르다. 어느 한쪽만 맹신할 것이 아니라 여러 의사결정의 접근법들이 유효할 수 있는 상황적 특성들을 찾아내는 게 더 중요하다. 즉, 의사결정에 앞서 누구를 어떤 방법으로 어느 정도로 참여시켜야 하는가를 정하는 사전 의사결정의 how 디자인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의 what보다 앞서야 한다.
독단과 참여의 결론을 먼저 내고 시작하지 마라. 사안의 특성, 같이 문제와 정보를 공유할 대상부터 짚어보라. 집단회의를 소집해야 하는가, 집단회의를 소집한다면 의사결정자로서의 역할을 그대로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회의를 주재하기만 하는 의장의 역할에 머무를 것인가에 대해 사전검토하라. 이슈의 특성, 구성원의 목표 공유 정도, 구성원의 수용 필요성에 따라 그때그때 의사결정방식이 달라야 한다. 조언을 구해야 할 사람을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도 좋은 의사결정의 요소다. 지시할 것은 지시하고, 물어야 할 것은 물어라.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지시해야 할 것을 묻고, 물어야 할 것을 지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