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조 매출 패션사업 떼어내고,  미래 디바이스 좌우할 소재 사업 올인

 데이먼 필립스(Damon Phillips) 컬럼비아 경영대학원 교수는 “기업의 미래에 대해 고민할 때는 현재 회사의 위치와 변화의 방향성 그리고 그 변화 방향과 회사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지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최근 제일모직의 변화가 데이먼 교수가 강조한 말에 부합하는 기업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모태 사업까지 도려낸 제일모직의 행보를 알아보자.

지난 5월 필립스는 주주총회를 갖고 122년 만에 전자업체 간판을 내렸다. 기존 사명인 로열필립스전자(Royal Philips Electronics)에서 전자를 떼어내고 로열필립스(Royal Philips)로 바꾼 것이다. ‘전자’라는 단어 하나를 뺀 결과지만 의미는 매우 크다. 120년 넘게 반도체부터 백색가전, 컴퓨터와 휴대폰, 심지어 음악 CD까지 전자업계를 주름잡았던 필립스가 더는 전자업체가 아님을 천명한 공식 선언이기 때문이다.

국내에도 필립스처럼 사명까지 바꾸면서 급변하는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변신을 꾀하는 기업이 있다. 바로 제일모직이다. 빈폴, 갤럭시 등 국내를 대표하는 패션기업으로 알려진 제일모직이 패션사업을 삼성에버랜드에 양도하고 ‘전자소재 기업’으로 변모를 선언한 것이다.

 

 

뿌리까지 팔았다

제일모직은 지난 1일로 직물ㆍ패션 관련 사업 일체를 삼성에버랜드에 이관했다. 1990년대 화학사업, 2000년대 전자재료사업에 진출하면서 주력사업 변신을 지속적으로 꾀해왔지만, 기업의 모태인 모직과 패션까지 포기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에 달랐다.

제일모직은 지난 9월 23일 주주총회 등을 거쳐 패션사업과 관련된 자산과 인력 등을 모두 삼성에버랜드에 매각하고, 매각자금을 전자재료·화학 등 소재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함으로써 세계 초일류 소재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직물사업으로 창업한 지 59년 만이다.

사실 제일모직은 패션사업을 멀리한 지 오래다. 1990년대 화학사업 진출을 시작으로 패션사업의 비중은 서서히 감소해왔다. 2010년 들어선 제일모직의 전체 매출액 중 차지하는 비중이 20%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반면 화학사업을 기반으로 첨단소재 사업에 집중 투자한 덕분에 소재사업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80%에 육박할 정도로 커졌다. 영업이익을 보면 이야기는 더 확실해진다. 지난 2분기 영업이익 727억원 가운데 537억원(73.8%)이 전자재료사업에서 나왔다. 화학사업도 나름 선방해 영업이익 225억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모태사업인 패션은 55억원 적자를 봤다. 패션사업의 부진으로 실적은 시장 예상치를 밑돌았고, 주가마저 하락했다. 의류산업의 저성장과 내수 부진으로 2분기 연속 적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패션사업은 제일모직에 점점 짐이 되어가고 있었다. 더욱이 패션사업의 특성상 매 시즌 새로운 패션 트렌드 발굴, 브랜드 론칭 등 크고 작은 사업계획이나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패션사업을 계속 안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소재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룹의 핵심 축인 전자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다. 반도체에서부터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IT기기 전반에 걸쳐 탄탄한 포트폴리오를 자랑해온 삼성이지만, IT산업의 기초가 되는 소재산업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20년여간 전자소재사업을 진행해온 제일모직이 그룹 차원에서 소재산업 육성에 가장 적합한 계열사로 지목받았다.

하지만 기업의 뿌리이자 매출이 2조원에 육박하는 패션사업 부문을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아직 많은 사람이 패션사업을 제일모직의 핵심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제일모직이 지켜야 할 모태사업이기 때문이다. 이에 제일모직 한 관계자는 “누군가는 패션사업 매각이 회사의 심장을 파내는 만큼 아픈 일이라고 한다”면서도 “기업 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을 시대의 요구에 맞춰 사업 포트폴리오를 짜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일”이라며 ‘글로벌 초일류 소재기업’이라는 제일모직의 비전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많은 기업이 사업구조조정과 신성장동력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위해 자신의 뿌리마저 뽑아 버리는 예는 흔치 않다. 이에 업계 한 관계자는 “필립스가 반도체를 매각했던 것처럼 제일모직의 패션사업 매각도 변화에 대처하는 가장 극적인 사업구조 재편 사례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래 디스플레이, ‘소재 혁신’에 달렸다

최근 열린 글로벌 3대 IT제품 전시회(독일 IFA, 미국 CES, 스페인 MWC)에 출시된 제품들의 면면을 보면, 기존 제품에 대한 기업들 간의 하드웨어 차이가 소비자 가치 측면에서 상당히 좁혀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세트 기업(완성업체)들은 그 차이를 다시 벌리기 위해 경쟁하고 있지만, 해답을 찾기란 만만치 않다. 이런 과정에서 기업들이 찾은 솔루션은 소재다.

문희성 LG경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소재는 기존 제품의 성능을 개선하거나 첨단 제품의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이네이블러(Enabler) 역할을 해왔다”며 “특히 구글글라스나 스마트워치와 같은 웨어러블(Wearable) 기기가 등장하면서 디스플레이는 하드웨어의 파괴적 혁신을 이끄는 핵심으로 변모해왔는데, 그 디스플레이 기술의 중심에는 소재가 자리 잡고 있다”고 진단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OLED다. OLED는 지난 10년간 디스플레이의 표준이었던 LCD보다 색 재현율, 명암비, 시야각 등의 측면에서 우수한 화질 특성을 발휘한다. 더욱이 TV의 대형화와 맞물려 플렉서블 디스플레이를 구현하기 위해선 LCD보다 OLED가 더욱 적합하다는 것이 전문가의 중론이다. OLED는 복잡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LCD와 달리 스스로 빛을 내기 때문에 대형화면에서도 슬림화된 디스플레이 공급이 가능하다. 또한 색감 유지를 위해 일정한 액정의 두께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 플렉서블 기기에도 적합하다.

실제 시장조사기관인 디스플레이서치는 전 세계 OLED 시장이 매년 20% 이상씩 급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OLED TV용 패널 출하량의 예상치도 2014년 54만 대, 2013년 219만 대, 2016년 570만 대, 2020년에는 3810만 대로 늘어나 연평균 160%의 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러한 OLED 시장의 성장은 소재기업으로 변신을 꾀한 제일모직에 호재다. OLED는 소재가 제품 성능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미래에 투자한 제일모직

제일모직은 OLED의 시장 가능성을 보고 몇 년 전부터 지속적인 투자를 단행해왔다. 2007년 OLED 소재 개발에 본격 착수한 이후, 200억원을 투자해 2011년 3월 OLED 소재 양산공장을 준공했다. 지난 4월에는 갤럭시 S4에 적용되는 ETL 소재를 양산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지난 10월 OLED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독일계 소재기업인 노바LED를 인수한 것은 제일모직이 소재기업으로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신의 한 수’로 꼽힌다. 노바LED는 석·박사급 이상 연구개발(R&D) 인력이 60% 이상을 차지할 뿐 아니라 530여 개의 출원 특허를 보유한 기업이다. 특히 이 기업이 보유한 도펀트(첨가제ㆍdopant) 기술은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문 책임연구원은 “도펀트는 OLED 공통층 소재의 성능을 개선하고 패널 두께를 줄여주는 물질”이라며 “제조기술이 어렵고 기술 진입장벽이 높아 OLED 소재 중에서 가격이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이번 노바LED 인수를 기점으로 제일모직은 지난 10년간 축적된 제조 역량과 노바LED의 앞선 소재기술을 접목해 향후 제품 구성에 있어 상당한 시너지를 기대하고 있다. 실제로 제일모직은 노바LED를 전자재료 부문 자회사로 편입한 후 독자적인 OLED 재료 양산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이에 김병기 키움증권 연구원은 “제일모직은 이번 노바LED 인수를 통해 제품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시장 선도적 위치 확보가 가능해졌다”며 “기술 추격형 전략에서 벗어나 글로벌 시장 선도형으로 변신을 꾀해 바스프, 머크, 듀폰 등 세계적 소재기업과 본격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삼성전자의 수직계열화에 ‘핵’으로 부상

제일모직은 소재기업으로 변신하면서 삼성그룹 주요 IT 계열사의 중심으로 부각됐다. 그룹의 핵심 축인 전자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소재사업은 분명 투자가 필요한 영역이다. 특히 지난 6일 진행된 애널리스트데이에서 삼성전자가 제시한 미래 비전과 전략은 향후 제일모직 투자 방향과 맞닿아 있다. 당시 삼성전자가 제시한 중장기 전략은 플렉서블 및 Curved OLED 확대, 2차 전지, 반도체 혁신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들 사업 모두 제일모직이 향후 집중적으로 투자할 디스플레이ㆍ반도체ㆍOLED 유기소재에 전방산업이다.

특히 OLED 산업의 선두주자인 삼성전자의 경우 유기소재는 놓칠 수 없는 사업이다. 이미 프리미엄 스마트폰(갤럭시 S4, 갤럭시 노트3)에서 OLED기술 덕을 톡톡히 본 삼성전자는 향후 곡면형 OLED TV로 프리미엄 TV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OLED의 핵심인 유기소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조우형 KDB대우증권 연구원은 “제일모직은 OLED 소재→패널→완성품(TV와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의 중요한 축”이라며 “제일모직에서 시작된 재료 생산기술의 우월성이 삼성전자의 완성품까지 이어져 제품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게 됐다”고 진단했다. 또한 제일모직의 소재산업으로 OLED 재료를 적정한 가격에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활로를 마련할 수 있고, 본격 성장 국면에서 OLED 관련 특허 분쟁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패막도 확보할 수 있다. 실제 제일모직이 OLED의 공통층 소재인 전자수송층(ETL)을 올해 양산하면서, 갤럭시S4에 적용된 기존 LG화학의 ETL를 대체하는 효과를 누렸다.

이 밖에 제일모직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소재에서도 삼성전자의 성장과 맞닿아 있다. 제일모직이 생산하는 SOH(spin-on hardmask), CMP(Chemical-Mechanical polishing) 등은 미세공정 전환에 필요한 반도체 소재다. 삼성전자가 D램의 공정전환 가속화와 중국 시안공장의 랜드플래시 증설을 계획함에 따라 제일모직의 반도체 소재 기술은 점차 부각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반도체 업체들이 메모리 및 비메모리 사업의 미세 공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제일모직의 반도체 소재 매출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제일모직의 편광필름도 최근 삼성전자의 태블릿PC가 승승장구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태블릿PC가 교육용으로 인기를 끌면서 화면이 11.6인치와 12.2인치로 대형화되고 있다. 실제 미국 LA 교육위원회가 올가을부터 66만 명의 학생에게 보급하기로 한 교육용 태블릿PC도 모두 11인치 이상이다. 화면이 커지면서 액정의 두께가 두꺼워질 수 있는데, 삼성전자는 제일모직의 얇은 편광필름을 활용해 슬림화, 경량화한 태블릿 PC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실제 삼성전자는 제일모직의 편광필름 기술을 활용해 애플보다 한 박자 먼저 대화면 태블릿PC를 선보였고, 교육용 태블릿PC 시장을 선점해 애플과의 태블릿PC 점유율 격차를 줄여나갈 수 있었다.

지난 10년간 제일모직 전자재료사업부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연평균 30%, 28% 증가해왔다. 수년간 개발해온 OLED 소재들도 시장 진입이 가시권에 들어와 있다. 또한 향후 소재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1조8000억원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업의 심장인 패션사업을 떼어내고 본격적인 전자소재 전쟁에 뛰어든 만큼 추격자 역할을 넘어 글로벌 IT 소재산업의 리딩 기업으로 도약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