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 제네시스 렌더링(사진제공=현대차)

미국 시장 동시 출시로 고급 브랜드 이미지 구축

1989년 미국 경제지 <포천>의 기사. “토요타가 렉서스를 미국 시장에 출시하는 것은 맥도널드가 ‘비프 웰링턴(최고급 소고기 요리)’을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놓고 내지른 혹평이었다. 미국의 그 어떤 갑부도 BMW와 벤츠 대신 렉서스를 구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도 함께 내놓았다. 그러나 곧 상황은 역전됐다. 이후 미국에서 렉서스는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의 반열에 올랐고 <포천>의 예측은 조롱거리가 됐다.

한국의 자동차 메이커들의 글로벌 시장 진출에서도 일본 메이커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 1990년대까지 현대차도 글로벌 시장에 명함조차 내밀지 못했다. 현대차는 글로벌 시장에서 ‘밸류 포 머니(value for money)’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영국 BBC의 인기 프로그램 ‘탑기어’에서조차 ‘엔진 달린 세탁기’라고 혹평했다. 이렇게 ‘싸구려 차’의 대명사로 불렸던 현대차가 이제는 벤츠와 BMW, GM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5위의 자동차 메이커로 급부상했다.

기아차 K9이 북미시장에 K900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한다(사진제공=기아차)

그동안 현대차의 고민은 국내에서 판매되는 브랜드가 해외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을까였다. 소형차인 엑센트와 아반떼, 중형차인 쏘나타, SUV인 싼타페가 일단 미국 시장과 유럽 시장에서 선전하며 자신감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형차의 나라에서 중대형차인 제네시스와 에쿠스도 통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지난 2008년 현대자동차는 북미 시장 공략을 위해 제네시스를 먼저 투입했다. 시장의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제네시스는 그해 8월부터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지 8개월 동안 연속 월 1000대 이상의 판매 실적을 달성했고 2009년 4월에는 1470대를 기록하면서 월간 최다 판매량을 경신했다.

제네시스의 성공에서 얻은 자심감으로 현대차는 2009년 3월 출시한 신형 에쿠스를 뉴욕모터쇼를 통해 북미 시장에 선보였다. 2010년 본격 출시를 앞두고 시장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국내에서 잘 만들어진 에쿠스 100대를 미국 시장에 내보내 일반 소비자들을 만나도록 했다. 본격적인 자동차 교체 시즌인 가을을 앞두고 현지 주요 딜러 쇼룸에 전시해 현대차 최고급 승용차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을 체크하게 한 것이다.

북미에 진출해 벤츠의 시장점유율을 육박하는 실적을 거둔 에쿠스(사진제공=현대차)

반응은 엇갈렸다. <USA투데이>는 “미국 출시를 앞둔 신형 에쿠스를 주목할 만하다”며 “미국 내 시판가격은 7만5000달러(9400만원)로, BMW 7시리즈나 렉서스 LS460 등과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현대차는 신형 에쿠스의 성능과 품질이 BMW 7시리즈, 메르세데스 벤츠 S클래스 등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가격에서도 자신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브랜드 이미지였다.

앞서 선보인 ‘제네시스’ 덕분에 인지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현대차=대중차’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낮은 브랜드 이미지 때문에 ‘가격을 1만달러 이상 낮춰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었지만 현대차는 “단기간에 승부를 걸기보다는 우선 렉서스처럼 브랜드 이미지와 품질력을 높이는 데 주력하겠다”며 가격보다는 품질로 승부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USA투데이>와 달리 블룸버그통신은 전문가들의 견해를 인용, “프리미엄 차량은 자동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며 “에쿠스가 반짝 인기를 끌 수는 있지만 총체적인 브랜드 관리에 실패하면 소비자들이 곧 떠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칫 북미에서 폭스바겐의 ‘페이튼’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놨다. 페이튼은 출시 첫해인 2003년 2000대가량 팔리며 각광을 받았지만 곧바로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 2007년엔 판매량이 17대로 급감했다.

에쿠스가 2010년12월 미국 시장에 진출할 당시만 해도 문턱 높기로 유명한 미국 대형 세단 시장에서 현대차의 성공을 예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캐딜락, 링컨 등 미국의 전통적인 브랜드가 포진하고 있는 데다 까다로운 미국 소비자들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미국은 대형 세단의 주요 고객이 전통적인 상류층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어 새로운 브랜드가 뚫고 들어가기에는 만만찮은 시장이었다.

페이튼이 실패한 북미, 에쿠스가 뚫었다

긍정적인 요인보다는 부정적인 요인이 더 많은 북미 시장에서 정몽구 회장은 특유의 뚝심을 발휘하시 시작했다. 소형차에서부터 시작된 현대차의 북미 시장 성공을 최고급 대형세단인 에쿠스까지 확대시키겠다는 게 정 회장의 생각이었다.  소형차에서 얻은 노하우와 제네시스의 성공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만큼 그 당시의 현대차는 이미 최고 질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정 회장은 확고히 믿고 있었다.

미국 시장에 선보인 신형 에쿠스는 3년간 5000억원을 투입해 개발됐다. 엔진은 경쟁차종인 BMW나 벤츠와 같은 후륜구동으로 바꿨다. 후륜 구동 차량은 섬세한 방향 전환이 가능하고 뒷좌석 승차감이 좋은 게 강점이다. 구형 에쿠스보다 길이는 40㎜, 폭은 30㎜ 늘렸다. 길이는 벤츠 S클래스, 렉서스 LS와 비슷한 수준이고 폭은 글로벌 명품 차량 가운데 가장 넓다.

에쿠스 신차발표회장에서의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평소 말수가 적기로 유명한 정 회장이었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신형 에쿠스는 그동안 현대차가 꾸준히 축적해온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철저한 품질관리로 개발한 최고급 대표 차종입니다. 이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본격 진출해 유럽 고급 명차들과 당당하게 경쟁하겠습니다.” 정 회장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내년 초에 북미시장에 선보이는 K900의 메인대시보드(사진제공=기아차)

이런 정 회장의 자신감을 통해 북미 시장에서의 현대차 위상도 확연히 달라졌다. 특히 프리미엄 라인인 ‘제네시스’와 ‘에쿠스’는 소비자들은 물론 미국의 자동차 전문지, 경제 전문지도 호평을 하고 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은 ‘독일업체에 도전장을 낸 현대차’라는 제목의 에쿠스 시승기에서 “에쿠스는 운전석, 뒷좌석 어느 위치에서나 최고”라며, “현대차가 2010년 신형 에쿠스 출시로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질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정몽구 회장이 직접 나서 현대차의 럭셔리카 북미 시장 진출을 진두지휘한 결과 시장에 조기 안착하는 결과를 낳았다. 에쿠스는 지난 2011년 상반기 ‘마의 벽’이라는 고급차 시장점유율 5%를 넘으며 미국 시장에 안착했다. 지난해에는 3972대를 팔아 전년보다 판매량을 24%나 늘렸다.

제네시스가 북미 시장에 첫 진출한 2008년, 6개월여 만에 6000대가 넘게 판매된 데 이어 한국 자동차로는 최초로 2009년 1월 ‘북미 올해의 차(Car of the Year)’에 선정되는 쾌거를 달성했다. 제네시스는 2009년 2만1889대, 2010년 2만9122대, 2011년 3만2998대, 2012년 3만3973대, 올해 10월까지 2만7061대로 성장세를 보이며 미국 진출 5년여 만에 10만 대 판매를 눈앞에 두고 있다.

특히 에쿠스는 지난 8월, 미국 출시 이후 월간 판매 최대인 435대가 판매되며 미국 프리미엄 럭셔리 세단 시장에서 점유율 9.7%를 달성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세계 대형 고급 세단 시장에서도 한국 자동차가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에쿠스는 미국 시장에서 435대가 팔렸다.

북미에 진출해 벤츠의 시장점유율을 육박하는 실적을 거둔 에쿠스(사진제공=현대차)

2010년 12월 국산 대형차 가운데 처음 미국 시장에 진출한 이후 33개월 만에 월간 기준 역대 최다 판매량을 기록했다. 종전 최대 판매실적은 2012년 7월의 362대였다. 400대 판매를 돌파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판매 호조에 힘입어 미국 프리미엄 럭셔리카 시장에서 에쿠스의 시장점유율도 6~7% 수준에서 9.7%로 급상승했다.

월 4000~6000대 규모인 미국 프리미엄 럭셔리카 시장에서 에쿠스는 BMW 7시리즈, 렉서스 LS, 벤츠 S클래스, 아우디 A8 등 독일·일본 브랜드와 경쟁하고 있다. 지난달 BMW 7시리즈의 시장점유율은 20.6%, 렉서스 LS는 20%를 각각 나타냈다. 이어 아우디 A8 12%, 재규어 XJ 11.1%, 포르쉐 파나메라 10.1%, 벤츠 S클래스 10%순이었다. 포르쉐 파나메라와 벤츠 S클래스는 에쿠스와 차이가 거의 없어 조만간 역전될 가능성도 있다.

현대차는 에쿠스의 판매 호조가 지난 7월 중순 이후 판매를 시작한 페이스 리프트(부분변경) 모델에 대한 현지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모델은 기존 에쿠스와 비교해 범퍼, 그릴, LED(발광다이오드) 안개등 등의 디자인을 고급스럽게 바꿨다. 헤드업 디스플레이, 어라운드 뷰시스템 등 첨단 기능도 대거 적용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미국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디자인 사양과 옵션을 넣은 것이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상반기 판매부진에도 새 모델의 가격을 올리는 ‘역발상’ 마케팅이 효과를 봤다. 현대차는 새 모델의 판매가를 기존 모델보다 3% 인상한 6만1000~6만8000달러(약 6600만~7400만원)로 책정했다.

이로 인해 ‘폭스바겐도 실패한 시장을 현대차가 뚫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폭스바겐은 프리미엄 세단인 페이톤을 2004년 미국에 내놓고 첫해에 1939대를 판매했다. 하지만 판매량이 2005년 820대, 2006년 235대로 급감하자 결국 판매를 접었다.

현대차 관계자는 “프리미엄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미국 고급차 시장을 겨냥한 마케팅을 강화할 방침”이라며 “에쿠스뿐 아니라 제네시스까지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려 미국에서 ‘제2의 신화’를 달성하겠다”고 말했다.

제네시스와 K900, 북미 시장 동시 출격

내년 초에 북미시장에 선보이는 K900의 전자식 변속레버(사진제공=기아차)

에쿠스가 북미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함에 따라 현대·기아차는 대형세단의 시장 확대를 위해 가속도를 내고 있다. 이참에 신형 제네시스와 K900으로 북미 시장에서 브랜드 인지도를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현대·기아차가 고급 대형차를 앞세워 미국 프리미엄 시장 공략과 브랜드 인지도 상승이라는 ‘두 마리 토끼 잡기’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북미 시장에는 내년에 두 개 차종이 모두 선보인다.

현대차는 내년 상반기 ‘신형 제네시스’를 출시해 미국 프리미엄 시장에서의 위상을 공고히 할 계획이다. ‘신형 제네시스’는 현대차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자인과 상품성을 갖춘 프리미엄 세단’을 목표로 개발한 최첨단 후륜구동 세단이다. 특히 ‘신형 제네시스’에는 최신 상시 4륜 구동 방식인 전자식 AWD(All Wheel Drive) 시스템 ‘HTRAC(에이치트랙)’이 최초로 적용돼 높은 수준의 차량 안정성과 주행 성능을 확보했으며, 기존 현대차의 디자인 철학을 발전시킨 ‘플루이딕 스컬프처 2.0(Fluidic Sculpture 2.0)’이 최초로 적용돼 디자인 곳곳에서 ‘세련되고 다이내믹한 프리미엄 대형 세단’의 면모를 찾을 수 있다.

기아차는 지난 5월 미국에 출시된 ‘K7(현지명 카덴자)’에 이어 ‘K9’을 미국 시장에 내놓아 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한다는 계획이다. ‘K9’의 현지 차명을 ‘K900’으로 정하고, 미국 소비자들의 특성을 고려한 엔진 라인업과 편의사양 등을 탑재해 출시할 예정이며, 이달 20일에 LA모터쇼에서 신차발표회를 가졌다.

K900은 기아차가 세계의 프리미엄 브랜드들과 당당히 경쟁하는 대한민국 대표 플래그십 세단의 개발을 목표로, 검증된 디자인 역량과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집약해 만들어낸 대형 럭셔리 후륜 구동 세단이다.

 

에쿠스에는 세계 유수의 명차보다 뛰어난 첨단시스템이 채택해 탑재됐다(사진제공=현대차)

 

특히 ‘프리미엄 차량에는 8기통 엔진이 탑재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북미 고객들을 위해 기아차 역사상 최고 배기량의 V8 타우 5.0 엔진과 크롬 스퍼터링 알로이 휠이 적용된 트림을 추가했으며, 라디에이터 그릴, 범퍼, 헤드램프 등 전면부를 새롭게 디자인해 다이내믹한 느낌을 더했다.

플로 콘솔과 도어 패널 등에 천연 나무 소재를 적용하고 최고급 나파가죽을 대시보드와 도어패널, 플로 콘솔부 등에 확대 적용했으며, 플로 카펫과 러기지 보드 손잡이 등의 인테리어 소재를 고급화했다.

이 밖에도 HUD(헤드 업 디스플레이), 어댑티드 풀 LED 헤드램프, LDWS(차선이탈 경보시스템) 등 K9이 가지고 있던 최첨단 편의사양과 안전사양은 유지해 기아차 플래그십 세단으로서의 가치를 한층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