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직장인들은 요즘 ‘좌불안석’이다. 한국경제는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상시 구조조정의 칼바람은 마치 소리 없이 인명을 살상하는 중성자탄을 떠올리게 한다.

‘오륙도’에서 ‘삼팔육’을 거쳐 ‘사오정’까지, 직장인들의 생명선인 정년이 점차 줄어들면서 ‘은퇴 이후’에 대한 고민도 깊어만 간다.

10대 시절 ‘외환위기’를 겪으며 일찌감치 재테크에 눈을 뜬 20대 직장인들을 비롯해 연령대별 직장인들의 4인 4색 은퇴 준비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박혜영 LIG건설 홍보팀 사원(20대)
“입사하자마자 노령연금 가입 했어요”

“제전공이 미술 디자인이거든요. 그런데 디자인의 D가 3D업종의 ‘D’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분야가) 불안정하고 (연봉이)박하거든요. 디자인 회사를 다녀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고 판단했어요.

하지만 앞으로가 걱정인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MBA코스도 밟고 기회가 된다면 대학원에서 건축공부도 하려고 합니다.”

그녀의 웃음이 해맑다. 그러면서도 목소리는 당차고 기운이 넘친다. 그녀의 또렷하게 빛나는 눈빛에서 ‘도전’과 ‘열정’이라는 단어가 금방 떠올려 진다.

그렇다. 박혜영(27) 사원은 지난 2009년 11월7일 LIG라는 대기업 계열사(LIG건설)에 갓 입사한 ‘루키’다. 새내기 사원인 그녀는 “(지금 회사 생활이)너무 재미있다”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 뒤에는 인고의 시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연은 이랬다. 박 씨의 대학 전공은 미술 디자인이다. 부산이 고향인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지난 2008년 서울로 상경, 우여곡절 끝에 디자인 회사에 입사한다. 그러나 고통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밤샘작업을 밥 먹듯이 했지만 돌아오는 급여는 말 그대로 ‘박봉’이었던 것. 게다가 디자인회사들이 대부분 그렇듯 기반자체가 불안정하다보니 당장 내일 내 자리가 있을까하는 걱정부터 했던 것이다.

이를 그녀는 “소위 말하는 3D업종에 디자인이 들어가야 한다”라는 말로 요약했다. 지난 2009년 3월 디자인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생각한 업종이 건설업이다.

인테리어 디자인과 그나마 관련이 있는 분야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 불’을 가리지 않았다. 토익은 기본이요, 해외 경험도 해보며 건설협회나 업체 등에서 주관하는 집 짓는 봉사활동까지 달려 들었다.

건설사를 타킷으로 취업전선에 뛰어든 것은 같은 해 9월. 결과는 참담했다. 수없이 많은 지원서를 넣었지만 면접한번 보기 힘들었다.

이럴 바에야 다시 디자인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자괴감까지 들었다. 이런 불안감에 휩싸일 무렵 LIG건설 홍보직이라는 기회가 왔고 그녀는 보기 좋게 기회를 잡아챘다.

그러나 그녀는 앞으로가 걱정이다. 일이나 사람이 안 맞으면 다시 회사를 떠나야한다는 생각에 불안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백수로 가슴을 조이던 6개월이라는 시간동안 ‘다음 직장이 없으면 은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그녀의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노후를 생각하니 ‘집’부터 필요했다. 적금으로 마련한 자금으로 주식투자를 하고 있는 것도 주택자금을 마련해 보려는 이유에서다.

20대 나이이지만 연금보험도 이미 가입해 뒀다. LIG계열사인 만큼 LIG보험에서 판매하는 노령연금이 바로 그것. 질병 보장도 받고 훗날 연금으로 전환이 가능한 상품도 추가로 가입하고 있다.

이번 설 계획에 대해 묻자 박 씨는 “당연히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내려가 친구들도 만날 것”이라며 “LIG에 입사하고 첫 명절이다. 앞길을 생각하면 답답해질 때도 있지만 명절만큼은 가족들 정을 느끼며 푹 쉬고 올 것”이라며 방긋 웃었다.

차홍일 에델만 코리아 과장(30대)
“설계사 장모님 컨설팅 받습니다”

독 한 방송사의 통역을 차 씨에게 부탁했다.
브라질, 라오스 등을 다니며 현지 풍습을 카메라에 담던 프로듀서의 통역 업무였다. 프로덕션 PD는 그에게 비디오 저널리스트를 제안했고, 그는 아마존의 습지인 ‘판타날’을 훑고 다녔다.

요즘 장안의 화제인 <아마존의 눈물>을 볼 때마다 차 씨는 20대 시절을 떠올린다. 하루 종일 열대우림을 헤매던 시절이었다. 비디오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의 매력에 빠져 5년간을 보냈다. 차 씨는 문득 이 일이 지겨워졌다고 회고한다.

그는 ‘코트라(KOTRA)’ 스위스의 계약직 사원을 거쳐 한국에 돌아와 무용을 전공한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취업의 벽은 예상보다 높았다. 그는 국내 주요 기업에 ‘원서’를 넣어 보았지만 늘 퇴짜를 맡기 일쑤였다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차 과장은 외국계 홍보대행사인 ‘에델만(Edelman)’의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2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그는 입사 후 2년 만에 이 다국적 홍보 대행사의 과장을 달았다. 고속 승진이다.

그런 차 씨도 요즘 입사하는 신입사원들을 보면 문득 불안감을 느낀다. 홍보업계는 매우 젊은 편이다.

대부분 20~30대 초반으로 해외에서 대학을 나온 직원들은 ‘트위터’,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 네트워킹’을 활용한 홍보 기법에 정통하다. 홍보 업계는 유독 유행에 민감하다.

‘아이폰’을 젊은 사원들보다 더 능숙하게 다루는 간부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정보가 흐르는 새로운 플랫폼을 알지 못하고서는 고객사들에게 리스크관리. 홍보 컨설팅을 할 수는 없다는 게 그의 토로이다.

차 씨도 아이폰으로 이 회사 해외 지사의 임직원들과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주고 받는다. 아이폰, 트위터, 페이스북, 아이패드는 이 업계 전반을 뒤흔드는 ‘변화’의 신호탄이다.

그는 설계사 일을 하고 있는 장모의 권유로 종신보험을 비롯해 4개 보험에 가입했다. 차씨는 ‘비디오 저널리스트’로 브라질 아마존의 열대 우림을 헤매고 다닌 20대 시절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고용 불안의 시대를 정면돌파 할 ‘에너지’도 그 시절에서 얻는다는 차 씨는 힘들 때면 아마존강을 떠올린다. 카누위에는 땀범벅이 된 20대의 남자가 있다.

악어가 있는 강 속에 뛰어들어 목욕을 하는 대담한 행동으로 관광객들의 박수를 받는 이 청년이 바로 차씨다.

그는 비디오 저널리스트로 대성하고 싶다는 꿈을 지웠다. 홍보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가 되고 싶은 것이 차 씨의 바람이다. 리스크 관리 부문의 대가로 성장한다면 은퇴 이후에 대한 불안도 자연스레 해소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 그의 반문이다.

권춘오 네오넷 코리아 사장 (30대)
“콘텐트 소매시장 개척이 은퇴준비죠”

권춘오 네오넷 코리아 사장은 요즘 좌불안석이다. 2년 전 자신이 근무하던 회사를 인수한 그는 요즘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저작권 논쟁. 도서정보 요약본을 제공하는 뉴질랜드의 한 업체에 매년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들여온 외서 요약 콘텐트가 경쟁사의 공세로 졸지에 도마 위에 올랐다.

이 경쟁사는 이 회사의 도서 요약 서비스가 해외 원저작자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매년 뉴질랜드의 회사에 저작권료를 지불해온 권 씨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 이었다.

뉴질랜드의 회사에 연락을 해봐도 딱 부러지는 대답은 없다. 30대 중반에 샐러리맨 생활을 접고 창업에 나선 권 사장은 요즘 ‘경영자’의 고충을 절감한다.

최고경영자라고 하지만 직원들 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는 신세이다. 직원들 급여가 ‘우선순위’이다보니 정작 자신의 월급을 종종 제대로 챙기는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저작권 소송에서 자칫 패소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까는 불안감도 떨치기 힘들다.

월급쟁이 시절에는 굳이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던 사안들이다. 콘텐트 업계는 대부분 소규모 업체들의 경연장이다. 약육강식의 장이기도 하다. 그가 당초 염두에 둔 수익모델은 일반 소비자들을 겨냥한 ‘B to C’ 모델이었다.

하지만 정작 콘텐트를 구매한 것은 ‘기업’들이다. 그는 지난해 국내에 상륙한 아이폰에서 이 판을 뒤흔들 변화의 기미를 읽는다.

아이폰은 콘텐트를 유통할 수 있는 손안의 ‘월마트’ 격이다. 권 사장은 “소기업들이 소비자를 상대로 ‘콘텐트’를 판매할 유통경로를 제공한 손안의 기기”라고 진단한다.

권 사장은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할 여유가 아직은 없다고 고백한다. 발등에 옮겨 붙은 불을 당장 끄는 일이 시급하다 보니 은퇴설계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다는 그는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 외에 뾰족한 묘수가 있냐”고 반문한다.

은퇴준비에 수수방관할 수도 없어 부부가 ‘종신보험’, ‘건강보험’에 각각 가입했다고. 권 사장은 이번 설 연휴 기간 고향인 부산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직원 8명의 소기업이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을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귀띔한다. 아이폰 앱스토어에 콘텐트 직판 프로그램을 올려 대박을 터뜨리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송광호 대림대학 교수 (50대)
“귀농(歸農)에서 길을 찾았어요”

민족 최대 명절인 설을 10여일 앞둔 2월1일 오후. 서울역에서 만난 송광호 대림대학 교수(67)의 표정은 누구보다 밝았다. 은퇴에 대한 고민을 말 하는 동안에도 입가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송 교수가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2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1남1녀의 아빠로, 여우같은 부인의 남편으로서 받는 압박감이 크다.

대학 교수를 지낸 덕에 당장 먹고 살 걱정은 없지만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고민은 떨쳐 낼 수가 없다. 민족 최대 명절인 설을 지내는 것도 두렵다.

은퇴 이후 맞이하게 된 첫 명절인 만큼 의미가 더 새롭다.
“생애 가장 큰 고민은 은퇴 이후의 삶입니다. 나 뿐 아니라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명절 연휴 기간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송 교수는 가장 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문제를 40대부터 시작했다. 치고 올라오는 후배와 뚜렷한 성과를 내놓아야 하는 학교 내 분위기는 은퇴 이후 고민을 앞당겼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 사회 변화가 대학교까지 만연한 것이다.

그는 “은퇴 고민을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여생을 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며 “고향에 땅을 사 뒀다”고 말했다.

은퇴 이후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귀농을 택한 것. 시골 출신으로 농촌생활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러나 은퇴 이후 귀농을 결정 한 뒤에도 그의 고민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주변에서 무턱대고 은퇴 이후 귀농에 나서 실패하는 사례를 너무 많이 본 탓이다.

고수익을 올리겠다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시작, 뜻대로 되지 않자 좌절감에 빠진 이들도 적지 않았다.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선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그가 귀농을 위한 준비운동을 시작 한 것도 이 무렵이다. 성공적인 귀농생활을 위해 은퇴 이후를 고민하는 친구들과 자택 인근에 땅을 구입해 15년 간 농사를 지었다.

또 최근 농촌진흥청의 벌이고 있는 귀농 교육 프로그램도 받고 있다. 은퇴 이후 삶을 위해 무려 20년 이상의 노력과 시간을 할애해 온 셈이다.

그는 “은퇴 이후 대부분 귀농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며 “사전 준비가 필요할 뿐 아니라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은퇴 이후를 고민하는 직장인 중 대부분은 귀농을 대안으로 여기고 있다. 귀농 관련 교육기관을 찾는 이들의 발길은 끊이질 않는다.

지난 1월 말부터 시작된 농촌진흥청의 야간귀농교육은 높은 참가율에 조기마감 됐다. 참여 연령층은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하다.

농촌진흥청 관계자는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 상태에서 대부분이 은퇴 이후 고민의 해법을 귀농에서 찾고 있다”며 “전원생활과 안정적인 수익 창출이라는 꿈을 버리는 것이 필요해 귀농에 대한 환상을 깨는 쪽에 교육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
김성배 기자 sbkim@asiae.co.kr
김세형 기자 fax123@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