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 채소류 등 농산물의 생산량 증가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풍작(豊作)이다. 여기에 환율 하락까지 겹쳐 국외 농산물이 더욱 싼 가격으로 국내로 대거 유입되고 있다. ‘풍년의 역설(逆設)’에 농민들은 시름겹다. 작황이 좋아 지난해보다 국내 농산물 가격이 떨어져 수확할수록 손해 보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들이 웃는 것도 아니다. 2013년 농산물의 가격 하락 폭은 내년에야 먹거리 가격에 오롯이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눈은 풍년이나 입은 흉년이다’라는 속담처럼 농민과 소비자들을 서럽게 하는 이 상황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2013/2014년 세계 곡물 생산은 전년 대비 8.4% 증가한 19.40억 톤, 곡물 소비는 전년 대비 4.5% 증가한 19.01억 톤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2013~2014년 말, 세계 곡물 재고량은 4년 내 최고 수준인 3.74억 톤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며, 같은 기간 세계 곡물 수출은 전년 대비 2.6% 증가한 2.73억 톤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생산량 증가 현상은 쌀, 밀, 옥수수, 대두 등 각종 곡물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2013/2014년 동안 전 세계 쌀 생산량은 전년 대비 1.1% 증가한 4.74억 톤에 이르고, 옥수수 생산은 전년 대비 2012/2013년에 비해 9.8% 증가한 9.48억 톤에 이른다.

밀은 아르헨티나와 흑해 지역의 작황 악화 우려로 10월 국제 곡물 시장에서 가격이 상승했지만, CIS(독립국가연합/Common wealth of Independent States) 국가들의 전반적인 밀 작황이 호전됨에 따라 2013/2014년 생산량은 6.3% 증가한 6.96억 톤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대두 수급도 늘었다. 주요 대두 수급 지역인 남미 국가들의 작황 호전으로 전 세계 대두 생산량도 전년 대비 4.1% 증가한 2.82억 톤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시장 곳곳에서 넘쳐나는 곡물들은 달러 환율 하락풍(風)을 타고 국내에 유입되고 있다. 이 때문에 37년 만에 맞은 대풍년의 기쁨도 잠시, 농민들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공급이 늘면 가격은 내려간다’는 공급과 수요의 법칙으로 국산품 vs 수입품의 경쟁은 심화되고, 가격을 내리는 수순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법칙은 소비자의 먹거리 물가에는 오롯이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국제곡물이사회의 10월 곡물 및 유지작물 가격지수(GOI: Grains and Oilseeds Index)가 9월 대비 2% 상승한 가운데 밀, 옥수수, 대두 가격지수는 각각 지난달 대비 3%, 2%, 1%씩 상승했다. 국제 상품 교역에서 쌀 가격지수는 변동 없었다.

국내 시장에서도 곡물 가격 변화는 없었다. 생활물가협회의 조사(2013.11.13)에 따르면, 곡물류의 가격은 지난주와 같았다. 서울에서 쌀은 1포(20kg) 기준 6만1500원, 보리쌀은 1kg 기준 4480원, 찹쌀은 1kg 기준 5600원을 유지했다.

공급은 늘고, 곡물 가격은 떨어지지 않는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글로벌 곡물 계약 구조’를 원인으로 꼽는다. 먹거리 물가 하락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지광일 NH농협선물 리서치센터 차장은 “특별한 천재지변이 없고, 날씨가 좋아 수확량이 역대 가장 많았다. 2년 전 여름, 곡물 가격이 급등한 이후부터 옥수수, 대두, 소맥 등 곡물 가격이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 같은 하향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임태원 삼성선물 상품선물팀 팀장은 “곡물 등 파생상품은 인도분을 기준으로 장기계약을 하기 때문에 국내 시장에 바로 영향을 주기는 어렵다. 현재 국내 시장에 풀린 곡물의 가격은 올해 상반기 말에 픽스된 것이다. 옥수수를 예로 들면 지난 6월 말 5달러40센트에 계약된 물량이 현재 시장에 풀린 것이다. 4달러27센트에 계약된 옥수수는 내년 3~5월 가격에 반영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