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경제-정치-유동성 위기 ‘3중고’

국내 기업들이 내년 경영계획 수립에 머리를 싸매고 있다.  정부와 민간연구소 등의 내년 경제 전망치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쏟아지는 규제와 노조 파업 등으로 투자 의욕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외환경의 불확실성마저 불거져 내년에 기업의 경영활동이 더욱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대외 여건을 가늠할 수 없다. 환율이 어떻게 움직일지,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Tapering)가 언제 시작할지, 중국 재정 건전성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알 수가 없다. 지금 당장 내일도 모르는 판에 내년 경영계획을 내놓을 수가 없다.”(A그룹 대외협력팀장)

“모르겠다. 보시다시피 재계 상황이 최악이다. 거기다 동양사태에 최근 국정감사까지 겹치다 보니 정말 눈치 보기 바쁘다. 갑작스러운 세무조사와 경제 민주화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다. 내년 경영전략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지금으로서는 당장 눈앞에 있는 것들부터 해치우기 바쁘다.”(B그룹 기획전략팀장)

10월 중순쯤이면 기업들은 슬슬 내년도 경영계획 초안 마련에 들어가야 하지만 손도 못 대고 있는 실정이다. 예년 같으면 10대 그룹들이 경쟁하듯 속속 경영계획을 발표하면서 야심 찬 1년 목표 설정에 분주한 게 일반적이다. 통상 이맘때부터 기초 경영여건 조사에 들어가야 하지만 올해엔 워낙 변수가 많아 대부분 기업이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글로벌 경제 상황은 ‘깊은 안갯속’이고, 그룹들도 내ㆍ외부적으로 고려해야 할 게 많은 상황이다.

호통만 치는 정치, 고조되는 불확실성…투자계획 엄두 못 낸다올해 연초 경영계획을 다시 짜는 기업이 많았다. 지난해 실적을 토대로 연간 경영계획의 윤곽을 잡았지만, 1개월 단위의 임기응변식 대응으로 돌아섰다. 재계 한 관계자는 “상반기 때는 엔저 현상과 버냉키 FRB 의장의 출구전략 가능성 발언, 하반기 들어서면서 신흥국 경제 위기와 동양사태로 경영계획을 계속 수정해왔다”고 전했다. 사실상 연간 단위 경영계획 수립은 엄두조차 못 낼 형편이다.더욱이 실적 악화와 유동성 관리 실패에 오너 리스크까지 더해지자 내년 기업 경영활동이 더욱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가 만연해 있다. 특히 기업의 오너 부재는 내년 경영계획 수립 차질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연간 경영계획은 신속한 의사결정과 대규모 투자를 집행해야 하지만 그룹 수장이 없어 주춤거리는 분위기다.기업들은 나름대로 비상경영위원회나 그룹경영위원회 등을 가동하고 있지만,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은 상황. 재계 한 관계자는 “전문경영인 체제라고 해서 과감한 의사결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잘못하면 그룹 전체가 휘청대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사업이라 오너가 아니면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그나마 형편이 나아 보이는 기업도 쏟아지는 규제와 노조 파업 등으로 투자 의욕을 잃고 있다. 지난해 제19대 국회 개원 이후 올 5월까지 발의된 기업 규제 관련 법안은 무려 358건으로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또한 통상임금 및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 등도 정부가 가닥조차 잡지 못해 정책 방향의 모호성이 불거지고 있고, 이전 정부의 정책에 따라 지주회사로 전환했던 대주주들이 ‘일감 몰아주기’ 규제로 세금 폭탄을 맞은 것도 기업 경영에 차질을 빚고 있는 원인으로 지목됐다.유환익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본부장은 “국내 정치권이 일감 몰아주기 규제와 상생법 등 기업 관련 규제를 강화하고, 잇단 기업 세무조사 등으로 기업에 대한 사회적 반감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기업 옥죄기 규제책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누가 투자를 늘리고 마음 놓고 기업을 운영할 수 있겠느냐”고 우려했다.이번 국정감사에서도 기업들의 경영활동에 지장을 초래할 만큼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채택된 기업인이 크게 증가했다. 3일 정치권과 산업계에 따르면 14일부터 열린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채택된 기업인(단체 소속 포함)은 총 196명에 이른다. 2년 전 국감 때 80명을 증인으로 선정했던 것과 비교하면 2.5배로 늘어난 것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기업 경영자가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해 제대로 된 발언 기회조차 가지지 못하고 죄인 취급 당하는 모습은 해당 기업의 대외신인도와 브랜드 가치를 크게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특히 내년에는 지방선거에 대비해 여·야당 모두 포퓰리즘에 빠져 ‘대기업 때리기’에 나설 가능성도 높다. 유 산업본부장은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기치로 내걸었으나, 정권 후반기 ‘공정사회론’을 내세우는 등 정책방향의 모호성과 불안정성으로 기업들과 우리 경제에 혼란을 일부 야기한 바 있다”며 “이 같은 국내의 정책적·정치적 불확실성은 내년도 투자계획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어발식 확장에 스스로 무너지는 기업물론 내년 경영계획을 세우지 못할 만큼 기업 경영환경을 어렵게 한 이유를 대외적·정치적 원인 탓만으로 돌릴 수 없는 노릇이다. 방만하게 경영한 기업들의 내부 잘못도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웅진, STX 등은 막대한 차입금, 무모한 신규사업 진출 등으로 법정관리 신세로 전락했다. 이들 기업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구조조정보다 문어발식 확장에 집중해 부채가 급증했다. 여기에 글로벌 경제가 좀처럼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자 수익성과 재무 안정성까지 위협받게 됐다.웅진그룹의 경우, 발목이 잡힌 것은 다름 아닌 극동건설 인수였다. 웅진그룹이 극동건설을 인수할 당시 시장에서는 건설업에 아무런 경험이 없는 회사가 건설사를 인수하는 것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인수 후 시너지 효과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인가에 의구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건설업황이 좋지 않은 상황이어서 우려의 목소리도 컸지만 웅진그룹은 사업을 확장하려는 욕심에 극동건설 인수를 추진했고, 이는 결국 웅진그룹에 ‘독배’가 됐다.최근 유동성 위기로 해체 위기에 직면한 동양그룹도 계열사가 2008년 20개사에서 지난해 34개사로 70% 이상 늘었다. 무리한 계열사 확장과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로 인해 동양그룹 사태가 발생했다는 분석이다. 즉 ‘무모한 신규사업 진출→무리한 차입금→유동성 위기’라는 과정을 겪으며 쓴맛을 보게 된 것이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글로벌 경제가 장기적으로 침체되면서 영업환경이 악화되자 기업 수익성마저 크게 떨어졌다. 한국은행이 국내 제조업·서비스업·건설업체 46만4425개를 전수조사해 20일 발표한 ‘2012년 기업경영분석’을 보면, 수익성을 나타내는 매출액 영업이익률은 2011년 4.5%에서 지난해 4.1%로 0.4%포인트 하락했다. 2010년 5.3% 이후 기업의 수익성은 계속 악화하는 추세다. 이러한 수익성 악화는 현금창출 능력을 약화시키고, 이에 따라 운전자본 부담이 심해져 부채비율, 차입금 의존도가 높은 수준까지 상승한 요인이 됐다. 올 2분기 실적이 좋지 않은 업종의 기업들이 재정건정성 악화로 부채비율이 증가하거나 차입금 의존도가 ‘위험’ 경계 수준까지 이른 게 그 방증이다. 이런 악순환은 결국 기업 가치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선제 대응으로 위기를 기회로지난 8월 서울 은행회관에서 열린 ‘S&P 초청 글로벌 유동성 축소와 한국 신용 전망’세미나에서 한상윤 S&P 한국기업 신용평가 팀장은 “앞으로 1년간 한국기업들은 등급하향 압력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의 성장 둔화에 따른 수요 정체, 엔화 약세로 인한 해외시장 경쟁 증가, 국내 소비 감소 등으로 국내 기업 수익이 정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크리스 박 무디스 연구원도 “많은 회사의 재무비율이 약화됐고,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재무비율이 다시 개선되기 힘들거나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상당히 많은 투자 등급 기업들의 신용등급도 상당한 하향 압력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핵심역량에 집중하고 재무 안정성을 확보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가는 기업들도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삼성이다. 삼성은 모두가 움츠러들 때 과감한 투자로 격차를 확대하고 이후 경기가 좋아지면 남들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환경을 꾸준히 만들어가고 있다. 실제로 삼성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기 불황에도 매년 꾸준히 투자를 집행했고, 올해도 신규 공장설립 등 시설투자와 연구개발(R&D)에 쏟아부으면서 사상 처음으로 투자규모가 50조원을 돌파할 전망이다. 특히 삼성은 지난해부터 중국 시안(西安)에 총 70억달러를 투자해 10나노급 낸드플래시 반도체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2015년까지 R&D 인력을 7000명까지 확대하고, 투자도 3억달러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 같은 투자 확대에 힘입어 중국대륙에서 삼성이 벌어들이는 매출도 2007년 276억달러에서 2011년 말 기준 510억달러로, 5년 만에 2배가량 뛰어올랐다.

또한 삼성전자는 한계 사업을 따로 분리하거나 완전히 손을 떼고, 유망 사업을 흡수하는 식으로 발 빠르게 사업을 재편하고 있다. 삼성의 ODD(광디스크드라이브) 생산법인 매각도 사업 재편 과정의 하나다. ODD를 주력 사업의 하나로 육성했지만 세계적 경쟁 심화로 수익성이 나빠지고 있다고 판단, 사업 철수를 결정했다. 현금·현금성 자산을 18조원이나 쌓아두고 있는 초우량 기업 삼성도 미래 전망이 불투명한 사업을 선제적으로 구조조정한 것이다. 최근 제일모직 패션사업의 삼성에버랜드 이전, 삼성SDS의 삼성SNS 흡수합병 등 사업구조 재편 역시 계열사의 사업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삼성그룹의 경영전략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현대자동차그룹도 사업 구조조정 개편을 통해 위기 극복에 나서고 있다. 현대제철과 현대하이스코의 자동차 강판사업 합병이 사업 구조조정 개편과정 중 하나다. 이번 합병으로 현대제철은 쇳물부터 열연강판 냉연강판 생산으로 이어지는 공정을 일원화해 생산원가를 절감하고 수익성도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그룹 내부적으로도 철광석 가격까지 지속적으로 하락해준다면 현대?기아차와 현대제철의 시너지 효과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LG그룹 역시 시장선도주의 기조 아래 신사업 조기 안착 등 새로운 수익모델 발굴에 주력하고 있다. LG그룹은 오는 11월 첫 주부터 한 달간 계열사별 업적보고회를 열고 내년도 사업계획을 확정해 중장기 사업전략과 신사업 육성 계획을 확정할 예정이다. LG그룹 관계자는 “LG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장선도 상품 창출 및 일하는 방식의 변화 등 ‘시장선도기업 만들기’를 가속화하고 있는 만큼 시장선도 측면에서 중장기 사업 포트폴리오 운영 방향에 대한 전략세션과 R&D세션으로 나눠 진행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특히 새로 사업본부로 편입된 LG전자의 자동차 부품사업이나 LG화학의 자동차용 전지사업은 그룹 차원의 미래성장 분야라는 점에서 집중 육성할 계획이다. 이처럼 개별 기업마다 위기 극복의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바로 현상을 파악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통찰력이다. 기업환경이 시간이 갈수록 급변함에 따라 이들 기업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산업과 기술 트렌드에 따라 선제적 사업 구조조정과 신성장동력 발굴에 힘쓰고 있다.

이남룡 삼성증권 투자분석팀 연구원은 “삼성, 현대, LG 등이 경기침체에서도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핵심역량을 강화하고 발빠른 구조조정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단기적인 유동화와 자산매각 같은 단순한 구조조정이 아니 중장기적인 전략을 갖고 스스로 과감한 변신을 시도한 기업들”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