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완전히 정신 나간 사디스트나 마조히스트라는 것을 알았을 때 보일 수 있는 반응이 무얼까? 두려움… 하지만 그가 나를 상처 입히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E.L 제임스 지음, 박은서 옮김, 시공사 펴냄

이 소설은 출간 1년이 지났어도 끊임없이 뉴스를 생산한다. 출간 당시에도 그러했지만, 뉴스라고 해봐야 판매량이 총 7000만 부를 넘겼다거나, 작가가 1년 새 9500만달러를 벌어 미국 포브스지 선정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작가’ 1위에 올랐다는 등 모두 책 내용과는 무관한 가십들이긴 하다.

 

엊그제에는 책의 영화화를 위한 주연 배우 캐스팅 발표에 팬들이 거세게 반발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이 소설에 대해 여자들이 왜 이리 야단인지, 심드렁한 남자들 눈에는 그저 의아할 따름이다.

2012년 4월 선보인 이 소설은 3부작으로, 국내에서는 6권으로 출간되었다. 1부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2부는 같은 제목에 ‘심연’이라는 부제가, 3부는 ‘해방’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작가가 ‘트와이라잇’을 소재로 인터넷에 올린 팬픽(팬이 쓰는 픽션)이 모체다. 처음에는 출판을 염두에 둔 게 아니었던 만큼 저자는 아무런 부담 없이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지상에서 최고로 멋진 남자를 그렸다.

주인공 크리스천 그레이(27세)는 미국 시애틀의 청년부호로서 조각 같은 얼굴과 탄탄한 몸매를 지닌 현대판 백마 탄 왕자님이다. 유아기 때 부잣집에 양자로 들어가 좋은 교육을 받았고 사업가로도 성공했다. 반면 여주인공 아나스타샤 스틸(21세)은 가난한 영문학 전공의 대학 졸업반이다. 소설 테스를 좋아하는 순수한 성격으로 지적이고 자존심도 강하다. 미인이지만, 연애경험은 전무하다.

소설 속 주인공들과 줄거리는 1980년대 소녀들에게 인기를 모았던 할리퀸 시리즈의 기본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소설은 할리퀸류 로맨스의 요소 위에 특별한 ‘토핑’을 하나 얹었다. 남자 주인공의 BDSM(결박-훈육-사도마조히즘)이라는 성적 취향이다. 그럴 만한 사연도 만들어 놓았다. 완벽한 외양과 달리 크리스천은 트라우마가 심연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 엄마 친구에 의해 비정상적인 성경험을 겪은 뒤로 여자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며, 변태적 성향을 갖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 탓에 크리스천은 아나스타샤를 만나서도 성관계 계약서부터 쓰자고 덤빈다. 몸에는 손대지도 못하게 한다. 연인이라기보다는 지배(도미넌트)와 복종(서브미시브)을 기조로 하는 굴종적 관계일 따름이다.

만약 소설이 여기에 그쳤다면 삼류 포르노로 잠시 반짝하다가 시들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영리한 장치’를 설치하여 경계심 많은 여성독자들을 무장해제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래서 눈가리개, 사슬, 족쇄, 수갑이 등장하는데도, 평소 같으면 역겹다고 반응할 중년 여성들조차 오히려 ‘나도 해볼 만하다’고 여긴다고 한다. 실제로 출간 직후 미국에서는 성인용품 매출이 이상 급증했을 정도란다.

‘영리한 장치’란 두 가지다. 우선, 작가의 정교한 '묘사'이다. 여주인공 아나스타샤가 성에 눈을 떠가며 느끼는 혼란과 솔직한 감정들을, 작가는 사실적이면서 감각적으로, 그러나 군더더기 없는 간결체로 묘사하고 있다. 음희(淫戱)가 난무하나 결코 끈적끈적한 대목이 없다. 그 덕분에 행위들은 음란하거나 추하지 않게 그려지고 있다.

두 번째는 줄거리의 기조에 깔고 있는 '의도'이다. 작가는 “사랑은, 상처받아 변태성욕에 의존하는 남자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그렇다면 아나스타샤가 뜬금없이 노예문서에 서명하고 굴종을 선택한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그녀가 모성애를 발휘하여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 셈인 것이다.  두 아이를 둔 40대 영국 주부작가의 영리함이 세상을 흔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