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내리는 날에 만나자는 약속, 누구와 만나기로 했는지도 가물가물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계절을 기다리며 가슴 아파 보았을 것이다.

특히나 송년회를 마치고 늦은 밤 귀가 길에 조용히 내리는 눈을 만나면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걸을 방법을 궁리하며 마음 졸이게 된다.

이른 아침 소복이 쌓인 눈은 그저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근거 없는 의심과 부질없는 욕망으로 부끄러웠던 기억들 모두를 조용히 묻어주기 때문이다.

올 한 해는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많은 분들이 찾아와 정신이 없었던 한 해였다. 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 안과 학회와 가을에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유럽 안과 학회에 다 참석한 데다 베이징에서 열린 지역 의사 모임과 오사카 협력 병원도 방문했기 때문이다.

국제 학회에서 발표하는 것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있지만 아무래도 영어를 말이 아닌 글로 배운 세대이다 보니 발음 하나하나를 전부 외우기 전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발표해야 하는 주제들이 하루 이틀 떨어져 있으면 좋겠지만 연달아 배정된 경우도 많아서 10여분 분량의 원고를 유창하게 구사하려면 비행기를 타고 가는 내내 노트북을 켜고 씨름해야 한다.

끝내고 나면 늘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나에게 주어진 발표 장소가 점점 커지는 것이 즐겁고 그렇게 만나게 된 외국 의료진들이 내 병원을 방문해 기술 교류를 하는 데에 보람을 느낀다.

한국의 개업의로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심난함도 많지만 계속 발전해 가고 아직도 모르는 게 많은 분야를 전공하여 지루하지 않은 것 같다.

안과에서도 특히 시력교정술 분야는 레이저를 이용한 근시교정술처럼 과거에는 생각도 못했던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이제는 노안이라고 하는, 과거에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안을 고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는데 엑시머 레이저를 이용하는 방법과 백내장을 없애며 동시에 치료하는 방법이 있다.

이 두 가지 방법이 정립되기까지 많은 치료법이 시도되었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이는 노안을 유발하는 조절력 부족이라고 하는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진정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 외에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지금 주로 사용하는 아사80을 이용한 노안 수술과 레스토렌즈를 이용한 노안 수술은 솔직히 어느 정도의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출발한 방법이기 때문에 각각의 방법에 적절한 환자에게만 시술하여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두 가지 방법 모두 나름 꿋꿋하게 한 우물을 판 결과라고 생각되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작년 겨울 우연하게 시작한 두 가지 방법의 병용치료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결과를 나타내어 여기저기 학회에 초청을 받게 되었다.

해외 학회에서 주목받는 일은 즐거운 경험이지만 발표가 끝나고 이어지는 토론 시간이면 늘 귀를 쫑긋 세우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

나 때문에 영어가 고생을 하는구나 하는 부끄러움과 지난달에 시간 있을 때 영어 발음 교정이라도 좀 받을걸 하는 부질없는 욕심이 후회와 함께 밀려든다.

올겨울에는 꼭 영어 공부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기회가 되면 일본어도 제대로 익혀보리라 다짐했던 마음도 잠시뿐 송년회 자리에서 술에 취해 눈밭을 껑충거리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역시 눈은 많은 것을 묻어주는가 보다. 부끄러움도 결심도 후회도 다…. 며칠 남지 않은 올해 내가 목표로 세웠던 것들 중 한 가지만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러다가는 목표가 뭐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겠다 싶어 다시 한번 긴장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