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불안’의 시대이다. 한때 ‘사오정’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리고 ‘386’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하지만 지난해 미국에서 터진 금융위기는 모든 ‘금기(禁忌)’를 허물어뜨렸다.

대한민국은 가장 빠른 속도로 국민들이 늙어가고 있지만 대부분 퇴직 후 호구지책이 막막하다. 사회 안전망이 매우 성긴 사회이다.

경제불안의 그림자는 무척 깊고 넓다. 지난 2003년 이래 한국 경제호는 만성적인 양극화의 덫에 사로잡혀있다.

불안한 시대는 늘 영웅을 부른다. 샐러리맨에서 출발해 조직의 수장이 된 ‘최고경영자’, 혹은 창업에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들이 늘 다시 등장하는 배경이다.

그 백미는 소판 돈으로 상경해 현대그룹을 창업하며 한국경제사에 우뚝 선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신화의 영역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평범한 샐러리맨들과 비슷한 ‘학력’, ‘가문’이면서도 1990년대 이후 눈부신 성공을 한 인물들은 과연 없을까.

<이코노믹리뷰>는 브리태니커 영업사원 출신의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동대문상고 출신의 강덕수 STX그룹 회장, 목회자로 포교활동을 하다 토종 패밀리 레스토랑 성공담의 주인공이 된 지승룡 민들레영토 사장, 현병택 기은캐피탈 사장의 입지전적인 성공담에 주목했다.

딱히 내세울 혈연, 혹은 지연이 없던 이들은 모두 자기관리의 달인이었다. 약간의 ‘운(運)’도 물론 빼놓을 수 없다. 부단한 열정으로 쟁쟁한 경쟁자들을 누르고 창업에 성공한 이들의 성공 비결을 엿보았다.

브리태니커 팔던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브리태니커 영업하며 人間을 알다”

오뉴월 땡볕은 뜨거웠다. 벌써 반나절이 흘렀고,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발품을 부지런히 팔며 시장통을 다니던 20대 세일즈맨은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국밥 한 그릇이 간절했다. 그는 석 달 전, ‘수모’의 현장을 떠올렸다. 중소기업 최고경영자는 젊은 영업사원을 상대로 ‘삿대질’을 했다.
서늘한 시선으로 행색을 살피던 그는 막말 공세를 퍼부었다. 모진 마음을 먹고 뛰어든 영업 전선이었다.

모멸감은 차마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는 초라한 현실을 절감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지방 출장을 떠나는 이 영업사원의 주머니는 단출했다. 하루치 ‘숙박비’, 그리고 ‘식대’가 전부였다.

1972년 3월, 부산의 남포동, 윤석금 브리태니커 영업사원(현 웅진그룹 회장)은 절박했다.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았지만 단 한 건의 계약도 따낼 수 없었다. 무더운 하루는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연고가 없는 출장지 ‘부산’에는 ‘비빌 언덕’이 전무했다. 전당포 앞에서 그는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다시 따뜻한 국밥을 떠올렸다.

‘브리태니커’는 산교육의 장이었다. 윤석금 웅진 그룹 회장은 요즘도 대학원 수업, 독서모임에 여념이 없다.

브리태니커를 판매하던 영업사원은 정수기, 건설, 화학 등 계열사 10여군데를 거느린 중견그룹의 CEO가 되었다.

고난은 성장의 자양분이었다. 명을 세운 주원장은 젊은 시절 ‘탁발승’을 지냈다.
그는 원제국 말기의 혼란이 극으로 치닫던 이 시기에 전국을 주유하며 굶어죽은 아이를 서로 바꿔 허기를 달래는 참혹한 현장을 보았다.
동포들은 서로 아귀다툼을 벌였다.

‘밑바닥 삶’을 전전하며 적나라한 인간 본성을 지켜본 주원장은 반란의 기미가 보이는 창업 공신들은 가차없이 제거했다.

그러면서도 충성을 서약하는 ‘창업공신’들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유도해 나간 용인의 귀재였다.

윤석금 회장은 영업사원 시절 다양한 인간군상을 겪었다. ‘옥석’구분의 ‘지혜도’ 터득했다.

‘아침햇살’은 이러한 ‘경험’의 산물이었다. 식음료 분야 전권을 달라는 부장급 사원을 ‘CEO’로 전격 발탁한 승부수가 먹혔다.

웅진 코웨이의 ‘정수기 렌털’ 비즈니스 모델도 ‘오픈 이노베이션’의 산물이었다. 발상의 전환도 주효했다. 미 화장품 업체 ‘에이본(AVON)’사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지난 1990년대 일찌감치 중국 시장에 진출해 ‘수익기반’을 넓혀온 이 다국적기업은 방문판매 여성사원인 ‘에이본 걸스’들을 앞세워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윤석금 회장 특유의 ‘실행(Execution)’의 노하우도 주목 대상이다. 그는 의지가 흔들릴 때면 늘 하루 숙박요금, 한 끼 식사값을 달랑 들고 연고 하나 없는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잠재 고객들을 설득했다.

윤은기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총장은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을 ‘평생 학습의 달인’이라고 평가했다. 영업사원 시절 몸에 익힌 실행의 노하우가 돋보이는 실천 중시형 경영자이기도 하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뒷 받침해줄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생각은 실천을 통해 생명력을 얻습니다.”

주산보다 더 빠르던 강덕수 STX그룹 회장
“自强不息해 ‘팬오션’으로 나아가다”

춘추전국시대, 춘신군이나 맹상군의 저택에는 늘 식객들이 넘쳐났다. 당대의 세도가이던 이들 왕족들의 집은 늘 ‘문전성시’를 이뤘다.

열국의 왕족들은 고비마다 ‘식객’들의 아이디어로 ‘난국’을 정면돌파해 나갔다. 강덕수 STX그룹 회장은 불과 8년 전까지만 해도 ‘식객’의 신분이었다.

그의 출발은 한미했다. ‘빅3’명문대 출신도 아니었다. 서울 동대문상고와 명지대 경영학과(야간)를 졸업한 그는 한국 사회의 ‘주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지난 1973년, 쌍용그룹의 계열사인 쌍용양회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27년간 이 그룹에서 근무한 50대의 남자의 ‘성공담’은 ‘드라마틱’하다.

강 회장은 ‘재무·기획통’으로 이름을 알리며 그룹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하지만 능력이 뛰어나도 평생 남의 ‘식객’노릇이나 하며 떠도는 것이 샐러리맨의 운명이다. 동서고금의 법칙이기도 하다.

‘비육지탄’의 주인공인 유비가 제갈공명을 찾은 때가 47세였다. 그는 조조, 원소, 유표 등 에게 늘 몸을 의탁해야 했다. 유비가 늘그막에 형주를 확보하고 창업에 성공한 나이가 강덕수 회장과 비슷한 연배였다.

하지만 유비는 한 황실의 후손이라는 ‘혈통 프리미엄’을 등에 업었다. 그리고 그를 보좌할 알짜배기 인재들도 확보했다. 패권 다툼의 한 축을 형성할 자산이 있었다.

반면 강덕수 STX 그룹 회장은 한국 사회에서 ‘비빌 언덕’이 거의 없는 ‘맨손의 샐러리맨’ 출신이다. 일부 역술인들이 그가 ‘대운’을 타고났다고 평하는 배경이다.

북방의 패자 원소와 대치하고 있던 조조는 어릴 적 친구인 ‘허유’의 투항으로 불리하던 전세를 뒤집을 역전의 기회를 포착한다.

군량미 저장소를 급습한 조조군은 전선의 교착 국면을 일거에 뒤흔들어 승부를 결정짓는다. 강덕수 STX 회장의 성공 이면에는 ‘운’도 빼놓을 수 없다. 김석원 일가의 몰락이 강회장 도약의 기회였다.

쌍용그룹은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고, 강 회장은 당시 쌍용중공업의 최고재무책임자(CFO)였다. 그는 이러한 난세를 틈타 스스로 제후의 반열에 등극했다.

강 회장은 전 재산을 ‘밑천’으로 이 회사를 인수하는 도박에 나선다. ‘북방’을 평정한 조조군의 침공에 바람앞의 등불격이던 유비가 손권과의 동맹으로 적벽대전에서 승리하고 창업의 기반을 확보한 것에 비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유비는 형주를 장악한 뒤 인근의 익주, 그리고 한중으로 세를 확대해 나갔다. 강 회장도 거칠 것이없었다. ‘선박엔진’을 거점으로 ‘조선업’, ‘해운업’, 핵심 기자재, 크루즈 선을 비롯한 인접 분야로 꾸준히 경계선을 넓혀나가며 덩치를 키웠다.

2차 대전 당시 러일전쟁의 격전지이던 다롄에 조선소를 세워 ‘지역 포트폴리오’도 구축해 나가고 있다.

강덕수 회장은 숫자에 밝은 ‘재무통’이다. 지난 1970년대 후반 쌍용 기획부 과장으로 그가 근무할 때 같이 근무한 동료들은 “우리가 계산기로 계산하는 것보다 그의 암산이 더 빨랐다”고 회고한다. 그는 재무통의 한계도 벗어던졌다.

강덕수 회장은 역설적으로 ‘실력’만으로 거대 기업 창업에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자강불식(自强不息)’은 주목할 만하다.

평생에 걸쳐 딱 한번 찾아온 기회를 머뭇거리다 놓치지 않은 단호함, 그리고 신속함은 오로지 그의 몫이다.

목회자 출신 지승룡 민들레영토 회장
“바이블 내려놓고 가래떡을 손에 들다”

그의 연설은 늘 ‘심금(心琴)’을 뒤흔들었다. 신자들은 이 30대 목사의 설교에 늘 열광적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무척 긴장했다. 멀끔히 생긴 이 남자는 ‘성경책’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떡’을 쥐었다.

지승룡 민들레영토 회장의 회상이다.
지난 1993년, 강남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 주부들은 양복 차림으로 떡을 파는 이 젊은 남자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목사 출신의 이 떡장수는 구성진 목소리로 ‘떡사려’를 외쳤다. 연세대 신학과 출신 엘리트 목사의 자존심 따위는 애초에 팽개쳤다.
이마에서는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호기심 어린 주부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주부들은 입소문의 출발점이었다. 떡을 판매하는 전직 목사의 소식은 바람처럼 퍼져나갔다. 그는 떡을 팔아 2000만원의 사업자금을 마련했다.

‘종잣돈’은 창업의 ‘실탄’이었다.
“목사님이 대단히 이상주의적인 목회를 하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언어의 설교가 아닌 삶의 설교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목마르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흔들리고 있었다. 부인과도 헤어졌으며, 종교적인 신념도 흔들렸다. 인사동의 전통 찻집에서 할 일없이 시간을 보냈다.

찻집 주인은 테이블을 훔치며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경건주의로 치닫지 않고 가르침을 포교할 놀이터와 같은 곳이 떠올랐다.

‘떡장수’로 사업 밑천을 마련한 그는 40여개의 가맹점을 거느린 토종 외식 프랜차이즈 민들레 영토의 창업자이다. 떡장사를 하면서 마련한 종잣돈을 밑천으로 삼았다.

지난 1994년 탁자 여섯 개로 패밀리레스토랑의 문을 열었다.
민들레영토는, 이제 직영점만 전국적으로 10개에 ‘디아스포라’로 불리는 가맹점을 포함하면 매장이 20개에 달하는 업체로 성장했다.

영화 관람시설, 세미나실, 찻집까지 갖춘 민토는 문화아이콘이다. 그가 노점상 시절 보여준 ‘톡톡’ 튀는 아이디어는 이처럼 민토 운영에서도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컵라면과 커피를 마음껏 먹게 하고, 세미나를 위한 작은 방을 제공하는 이색적인 운영법으로 민토를 찾는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카페를 나서는 손님들에게 시와 명상법 등을 다룬 책을 공짜로 나눠주었다.
모두 삶의 현장에서 포교를 하겠다는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삼국시대 ‘우길’은 질병 치료로 민심을 사로잡았다. 민초들의 고통을 덜어주자 포교도 쉬웠다.

한중을 장악하고 있던 오두미교도 배고픔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을 파고들며 신도를 늘려나갔다. ‘밥은 하늘’이라는 관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파악했던 것이 바로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장각 형제였다.

지승룡 사장은 그들의 강점을 두루 갖추었다. 말솜씨가 뛰어나고 이벤트에도 매우 강하다. 이 자산을 밑천삼아 민들레영토의 글로벌 브랜드 도약을 주도하고 있다.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포교를 하는 지승룡 사장은 인문학적 기반이 강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조직의 포교 노하우를 비즈니스에 접목시켰다.

경리직원 공략한 현병택 기은캐피탈 사장
“自尊心은 집에 두고 현장에 가다”
참을 ‘인(忍)’자를 수없이 가슴속에 새겼다. 은행원들 사이에서 기피 인물로 악명이 높던 한 중기 최고경영자는 입이 거칠었다.

안하무인이었다. 자수성가한 이 중소기업 최고경영자는 좀처럼 마음의 벽을 열지 않았다. 그의 사무실을 방문한 은행원들은 그의 홀대를 견디지 못하고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오뉴월 ‘땡볕’같은 기세였다. 은행원들의 권유로 투자에 나섰다 손실을 입은 그는 ‘공공의 적’이었다. 현병택 기은캐피탈 사장은 회음 후 한신을 떠올렸다.

늘 칼을 차고 다니던 한신은 장터에서 시비를 거는 불량배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 통과했다. 훗날 ‘전신(戰神)’으로 불리는 영웅의 굴신의 순간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은행 직원들이 상처를 받고 물러났다. 이번에는 현병택 기업은행 지점장의 차례였다.

그는 폭언을 퍼붓는 이 중기 최고경영자를 상대로 늘 미소를 잃지 않았다. 속에서는 ‘부아’가 치밀었으나 꾹 참았다. 몇 번을 찾아가도 꽉 닫힌 그의 마음은 꿈쩍을 하지 않았다.

이 날도 마찬가지였다. 얼굴 근육은 굳어오고, 목은 뻣뻣해졌다. 현 지점장은 하지만 폭언에서 반전의 기회를 포착했다.

부동산 투자로 거액을 번 이 중기 최고경영자의 넋두리를 듣다보니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말이 많아지다 보면, 그 말속 에는 늘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부인과 사별을 한 이 중소기업 경영자는 같은 회사 경리 여직원과 살림을 차려 가정을 꾸렸다. 현 지점장은 이 사실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리고 사장 앞에서는 이 경리직원을 칭찬하고, 이 경리직원에게는 괴팍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 경영자의 숨겨진 장점을 강조했다.

그의 이 전략은 먹혀들었다. 이 괴팍한 중소기업 경영자는 꽉 닫힌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열었다. 그리고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흉허물 없는 사이로 발전했다.

한나라 창업의 일등공신이 된 한신은 초나라 땅을 분봉받은 뒤 자신에게 모욕을 준 불량배를 수소문해 불러들인다.

그리고 주변의 예상을 깨고 벼슬을 내려주었다. 현병택 기은캐피탈 사장은 당시 아침마다 자존심은 집에 두고 출근했다고 회고를 한다.

공단에 있는 지점장 시절에 늘 허름한 작업복에 새마을 모자를 쓰고 다녔다. 허름한 점퍼 차림의 은행 지점장을 중소 경영자들은 스스럼없이 대했다.

일단 마음의 벽을 허물면 정보는 늘 따라왔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은행 배지를 하지 않는다. 은행 배지는 상대방의 경계심을 자극해 마음의 문을 닫게 한다는 것이 현 사장의 지론이다.

느슨해지는 마음을 닦고 조이는 수단은 마라톤이다. 마라톤을 시작하고 나서 첫 목표는 완주였다. 그리고 동아마라톤을 비롯해 지금까지 풀코스를 18차례 완주했다. 그는 지금도 아침마다 6km를 뛴다. 이때 하루를 계획하고, 체력을 담금질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외환위기 때 시작한 마라톤은 트렌드 파악의 창이었다. 대회에 참석할 때마다 급증하는 참가자들을 본 현 사장은 마라톤 통장을 출시해 1조3000억원 이상의 예금고를 올렸다.

현병택 기은캐피탈 사장은 머리맡에 메모지를 두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메모광’이다. 현장을 다니며 메모로 옮겨둔 고객 불만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자신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는 메모 예찬론자이기도 하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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