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총수 부인들이 그동안 주로 미술계를 중심으로 한 경영활동에서 벗어나 직접 회사 경영에 참여해 활동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전통적 총수 부인들이 하나둘씩 운명을 달리하고 있는 가운데 신세대 총수 부인들은 남편의 뒤를 이어 경영 전면에 나서거나 그룹이나 계열사의 지분 확보를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는 ‘여걸’스타일의 부인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남편인 그룹 총수의 타계로 여성의 몸으로 직접 경영에 참여해 탁월한 경영성적을 나타내고 있는 부인도 있다. 지난달 타계한 정몽구 현대차그룹의 부인인 고이정화 여사는 현대가의 전통으로 ‘조용한 내조’로 재계 안팎에 소문이 나있었다.

결혼 이후 현대가의 며느리답게 집안 청소며 음식 장만을 손수 하는 등 줄곧 소박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고인도 가정과 가문을 돌보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재계에 입문해 이름을 알렸다.

당시 이 여사는 현대차그룹의 레저 분야 계열사인 해비치리조트의 지분 16%를 확보하며 이사직에 올랐다. 회사에 자주 얼굴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고인의 존재감 자체만으로도 해비치리조트가 그룹 전체에 회자되는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후문이다.

GS그룹 가족기업인 승산그룹 허완구 회장의 부인인 김영자 씨는 올해 초 골프장을 운영하는 승산레저의 이사로 부임하며 ‘여자와 딸은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범LG가문의 불문율을 깨 눈길을 끌었다. 김 씨 역시 경영 경험은 없지만, 적십자사 등에서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해온 축에 속한다.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이 수감생활에 들어간 지난 2006년에는 부인 박현주씨가 그룹 지주회사인 대상홀딩스의 경영 전면에 나섰다.
잠시 자리를 비운 총수 대신 안방마님이 지휘봉을 잡은 셈이다. 박 씨가 그룹 경영의 주요 사안을 챙기고, 각 계열사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했다.

남편이 경영에 복귀한 뒤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박 씨는 계열사인 상암커뮤니케이션즈 부회장직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혜경 동양그룹 부회장도 그룹의 디자인경영을 총괄하는 CDO(Chief Design Officer)로 활동하고 있다.

각 계열사의 디자인 관련사항은 이 부회장의 손을 거친다.
전문가적인 감각과 실무능력까지 겸비해 회사 안팎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1990년부터 동양매직 디자인 담당 고문으로 일해 왔다. 현재는 동양레저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며 레저와 패션, 온라인 등 신규사업에 대한 디자인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미경 CJ엔터테인먼트 부회장도 있다. 1995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함께 다국적 엔터테인먼트 기업 ‘드림웍스’ 설립을 주도하면서 한순간에 업계 스타로 떠올랐다.
우리나라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할리우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 이바지했다. 건강 악화로 한동안 경영 일선에서 떠나 미국 로스앤젤레스 일대에서 머무르다 지난 2004년 12월 CJ그룹의 엔터테인먼트 총괄 부회장으로 복귀했다.

이미경 부회장의 맞수로는 이화경 오리온 부회장이 있다.
이화경 부회장은 2001년 오리온그룹 외식 및 엔터테인먼트 담당 CEO로 부임하며 얼굴을 알렸다. 지난 2002년 설립한 쇼박스는 3년 만에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 투 동막골> 등 히트작을 잇달아 내놓으며 한국 영화 점유율 3위, 관객 동원 1위의 배급사로 급부상했다. 그 뒤 이 부회장은 온미디어를 케이블TV 채널 점유율 30%대를 웃도는 기업으로 일궈냈다.

전통적 총수 부인들이 하나둘씩 운명을 달리하고 있는 가운데 신세대 총수 부인들은 남편의 뒤를 이어 경영 전면에 나서거나 그룹이나 계열사의 지분 확보를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는 ‘여걸’스타일의 부인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남편 사망 후 ‘여 총수’로 경영권 장악
남편 사망 후 그룹 총수로 취임한 여성CEO로는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이 1호다.
남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회사를 떠맡게 된 경우이다.

장 회장은 1970년에 막내 아들인 채승석 애경개발 사장을 낳은 지 사흘 만에 남편 채몽인 사장을 심장마비로 떠나보낸 후 직접 경영 최전선에 나섰다.

1971년 남편 타계 1주기가 끝나자마자 그는 스스로 경리학원에서 복식과 부기를 배우며 경영수업을 받았고, 이듬해 8월부터 회사에 정식 출근했다.

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도 남편을 여의었다. 부산 출신인 양 명예회장은 양태진 국제그룹 창업주의 막내딸로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던 해인 1969년에 설원량 전 대한전선 회장과 결혼했다.

35년 동안 남편을 내조하며 가정주부로 지냈지만 2004년 3월 남편이 뇌출혈로 급작스레 세상을 뜨자 대한전선의 1대주주가 되면서 경영 전선에 나섰다.

이후 회사 경영은 전문경영인인 임종욱 부회장에게 맡기고 본인은 명예회장으로 회사 경영에 참여해 왔다.

취임 첫해에 적자 투성이인 현대그룹을 내실경영으로 탄탄하게 만든 장본인은 현정은 회장이다. 현 회장은 북한의 정세로 인해 그룹 위기가 불거질 때마다 북한을 직접 방문해 문제를 해결하는 ‘여장부’로도 유명하다.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도 전통적인 ‘금녀(禁女)’의 영역인 해운업계에서 남편 작고 후 기업 총수 자리에 올랐다는 점에서 현정은 회장과 여러모로 닮았다.

최 회장은 2006년 11월 남편이자 한진가의 3남인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듬해 경영인으로 변신해 지난해 회장에 이어 연말에 대표이사직에까지 오르며 경영활동을 적극 수행하고 있다.

최은영 씨와 동서지간인 이명희(58·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부인) 씨는 부동산 임대·관리 회사인 정석기업의 이사직을 맡아 화제가 됐었다.

정석기업은 한진그룹의 순환출자 구조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하는 계열사다.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의 부인 우경숙(56) 씨가 현대백화점 고문으로 경영활동에 참여한 바 있다.

미술에 푹 빠져있던 사모님들…
한동안 재벌가 안방마님들은 문화계, 그 중에서도 ‘미술’에 푹 빠져있었다. 그러면서 세상에 재벌가 안방마님들의 이름이 심심찮게 거론되기 시작했고, 이를 빗대어 ‘재벌 총수 부인=미술관 관장’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이러한 추세를 거부하면 재벌 안방마님들의 은밀한 커뮤니티 안에 들어가기 힘들었다.

미술관을 운영하지 않으면 명함을 내밀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또한 고상하면서도 우아한 이미지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그만한 게 없었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재계를 선두에서 이끌어왔다면 이 회장의 부인 홍라희 씨는 미술계를 이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 홍 씨는 국내 최대의 사립미술관인 호암미술관, 로뎅갤러리, 리움 등을 관장해 오며 단순한 취미활동을 벗어나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업을 이끌어왔다.

최근 들어서는 미술관 운영을 동생 홍라영 부관장에게 조금씩 넘기고 종교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의 부인 노소영 씨도 이에 못지않다. 1997년 시어머니인 박계희 여사가 운영하던 워커힐 미술관을 맡으면서 미술계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으며, 2000년 아트센터 ‘나비’의 관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미술계 전면에 등장했다.

조윤성 기자 cool@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