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 LA 여행길의 인기 코스로 류현진의 다저스 경기장 외에 하나가 더 추가됐다. 나사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의 마지막 셔틀 ‘엔데버’호가 전시된 ‘캘리포니아 사이언스센터’다.

무릇 체험학습의 명소들이 그러하듯 부모들은 지루하다. 하지만 운 좋게도 꼼꼼한 가이드를 만난다면 엔데버 추진로켓에 숨겨진 심오한 비화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대략 “엔데베호 추진로켓의 폭이 말 엉덩이 두 개 사이즈인 거 아시나요”로 시작되는, 무려 20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해설 말이다.

해설은 이러할 것이다. “추진로켓의 폭은 4피트 8과 1/2인치(약 1.435미터)다. 수치가 딱 떨어지지 않아 다들 정교한 과학적 계산에 의한 것으로 오해하지만 실상은 생뚱맞다. 추진로켓을 유타 주 제조공장에서 플로리다의 나사 발사대로 옮기려면 기차선로를 이용해야 하므로 그 폭을 궤도에 억지로 맞춘 것이다." " 전 세계 철도 60%의 표준궤간이라는 이 수치도 땅에서 솟은 게 아니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증기기관차가 등장했을 때 기존의 석탄운반용 마차선로를 도로 위로 옮겨 썼다. 그래서 이후 모든 기차선로가 마차선로의 폭과 같아졌다." "마차선로 폭은 2000년 전 로마전차에서 비롯됐다. 두 마리 말이 나란히 끌던 로마전차는 날렵함을 유지하기 위해 말 엉덩이 두 개 크기로 전차 폭을 정했는데, 1세기 중엽 로마군이 영국 정복 후 ‘로마로 통하는 길’을 건설할 때 로마전차 너비로 도로 폭을 결정했던 것이다.”

 

가이드에 따르면, 결국 말 엉덩이 2개-->로마전차-->마차선로-->기차선로로 이어지면서 최첨단 우주왕복선 추진로켓의 폭이 운명적으로 결정된 셈이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사례를 경로의존성 (Path Dependency)으로 설명한다. 어떠한 결정이나 기술이 한 번 일정한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 경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경로의존성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관성과 전환비용 때문이다. 로마전차나 추진로켓 등은 어차피 국가시설이므로 굳이 효율성을 따질 만한 절박함이 없다. 하지만 민간영역이라면 달라진다. 의존성을 깨지 못하면 언젠간 망할 운명에 처하게 마련이다. 관성에서 벗어나려면 결단이 필요하다. 전환비용이 크더라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마침 경로의존성 극복사례가 눈에 띈다. 아이돌 그룹들이 노출경쟁을 벌여온 쇼 무대에 홀연히 등장한 이단아 크레용팝이다. 이 5인조 걸그룹은 운동화에 헐렁한 추리닝 차림이다. 노출이라고는 눈 코 입뿐. 털모자나 피자집 배달부들이 쓰는 헬멧으로 귀마저 숨기고 있다. 기업형 스타배출시스템과도 무관하다. 소속사가 방송기회를 잡기 힘든 무명이었으니 피켓을 들고 게릴라공연에 나서고, 유투브와 SNS를 이용하는 저비용 바이럴 마케팅으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20~30대 남성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직렬5기통춤이 등장하는 ‘빠빠빠’의 인기가 폭발한 것이다. 크레용팝의 성공은 율동 같은 댄스, 중독성 강한 가사와 곡조, 탄탄한 편곡의 힘도 컸겠지만, 미친 듯 성적 코드 한 방향으로 달려온 걸그룹들의 경로의존성을 깬 모험의 대가(代價)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안타깝게도,조만간 LA 여행에서 돌아올 여행객들은 경로의존성에 빠진 또 하나의 사례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근혜노믹스다.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은 세계적 불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친 끝에 기존 경제정책의 매너리즘에서 과감히 탈피함으로써 마침내 활력을 되찾고 있다. 미 오바마정부는 정책기조를 IT업종에서 제조업재생(refresh) 쪽으로 돌렸다. 외형상 번듯하지만 고용창출효과가 적은 IT보다는, 낡은 것처럼 보이나 성장과 고용이 함께 가는 제조업 육성에 정책의 초점을 맞췄다. 해외진출을 권장했던 글로벌화 전략 대신에 해외로 이전한 제조업을 다시 불러들이는 리쇼어링(Rreshoring) 정책도 적극 추진중이다. FRB마저 통화정책에 고용목표제를 도입하여 측면지원을 하고 있다.

‘잃어버린 20년’을 만회하려는 일본 아베 정권은 주변국의 비난을 무릅쓰고 엔저를 통한 ‘제조-수출업의 부활(recovery)’에 사활을 걸고 있다. 독일도 제조업 경쟁력 유지를 위해 제조업 마스터(master)제를, 중국은 활력을 되찾기 위한 제조업 재충전(remineralization) 대책을 각각 시행하고 있다. 주요국가들의 회생노력이 제조업을 중심으로 성과를 나타나면서 바야흐로 제조업르네상스가 열리는 형국이다.

근혜노믹스도 한때는 창조경제라는 화두를 세상에 던지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복지 재원마련책을 두고 정치권과 논쟁을 벌일 뿐 창조경제의 실체마저 여전히 안개 속이다.  기업성장이 고용창출은 물론 세수증대를 통한 복지확대에도 기여하는 법이건만, 파격적인 투자 및 성장촉진책은 여태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선제적이고 적극적 통화정책보다는 관성에 얽매어 목표치보다 낮은 물가상승률을 유지하려고 필요이상의 과도한 실업과 경기침체 상황을 초래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주요국가들이 활기차게 몸을 풀고 있는 틈바구니에서 근혜노믹스는 마치 매너리즘의 바다에 뜬 '섬'처럼 쓸쓸하다.

그래서일까. 크레용팝의 전작(前作) ‘댄싱퀸’은 근혜노믹스의 현재 상황을 빗댄 듯도 보인다.

“댄스 댄스 춤을 춰요 그대/ 아 정말 돌아 미쳐 버리겠네/ 나 지금 격하게 우울해 우울해/ 아무도 날 찾지 않는 이 밤/ 혼자선 외로워요/ 아 진짜 좀 신나는 일 없을까/ 불타는 금요일의 밤 밤 밤/ Baby 빠라바 빠빠 Dancing in the moonlight/ 쏟아지는 별빛 아래/ 두 팔을 저 하늘 위로/ 춤을 춰요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