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보 백보’다. 지난 1997년, 태국 정부는 고정환율제를 포기했고, 바트화는 무너져내렸다. 변동환율제 절대불가를 고수하며 투자자들을 회유하던 태국 경제관료들의 ‘백기투항’이다.

그리고 해외 자산투자에 일찌감치 눈을 돌린 국내 기업들도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바트화’를 헤지 수단으로 삼은 파생상품 투자는 재앙을 불렀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이번에는 중소기업들이 ‘줄도산’의 위기에 직면했다. 지난해 한국 경제를 뒤흔든 키코(KIKO) 사태의 여파다.

‘거안사위(居安思危)’. 당태종 이세민은 《정관정요》에서 평화로울 때 위태로움을 잊지 말라고 했다.

‘수성(守成)’의 원리이다. 주변의 이민족들을 끊임없이 정복하거나 회유해 ‘천가한’이라는 칭호를 얻었던 당태종은 이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으며 ‘당’을 백년대계의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두었다.

지난 12일 오후 2시, 여의도에 위치한 FX코어솔루션 본사. 이 회사 담당자들은 전화 응대에 여념이 없다.

“북한과 해전을 한 차례 치렀는데도, 환율이 별다른 변화를 보이고 있지는 않죠.” 이 회사 한쪽 벽면 위로 걸려 있는 액자의 문구가 바로 ‘거안사위’다. 또다시 환율이 한국경제호의 골칫거리다.

이성열 사장은 이날 오후 중소기업 사장들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고 귀띔한다.
지난해 한때 1500원대까지 치솟으면서 ‘외환위기’를 우려하게 하던 원·달러 환율은 지난 13일, 1160원으로 장을 마감했다. 추세적 하락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다. 수출 중소기업들은 원·달러 환율 추이에 전전긍긍이다.

지난해 ‘키코(KIKO)’ 악몽을 떠올리는 중소기업 경영자들도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당시 원·달러 환율의 800원선 하락도 시간 문제라는 전망이 우세했거든요.

그래서 은행 측이 앞으로 들여올 달러는 930원에 팔 수 있게 해주겠다며 제안한 파생금융상품이 바로 ‘키코’입니다.”

이 상품은 당시만 해도 매력적이었다. 지난 2002년 이후 원·달러 환율은 1300원대에서 2007년 900원대로 6년간 추세적으로 계속 하락해 왔다. 원·달러 환율이 오를 것으로 내다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은행의 영업담당 직원들도 이 지점을 파고 들었다. 하지만 예측은 금물이다. 정치, 경제, 사회변수들이 서로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시세의 변화’를 시시각각 헤아리는 일은 신의 영역이다.

이성열 사장은 국내 기업들이 늘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며 아쉬움을 피력한다.
지난 1997년 주요 기업들의 줄도산 사태를 불러온 ‘외환위기’도 또 다른 ‘반면교사’이다.

태국이 고정환율제를 포기하면서 바트화를 중간 매개로 한 파생상품은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당시 이 상품에 투자했다 천문학적 손실을 입은 국내 재벌그룹은 훗날 파생상품을 판매한 외국기업과 소송을 벌이는 등 한바탕 곤욕을 치른 바 있다. “환율이 오를 때나, 내릴 때나 위험을 헤지할 수 있는 수단을 고민해야 합니다.”

이성열 사장은 수출보험공사의 환변동 보험을 추천한다. 환 변동 보험은 플랜트 선박 등 장기 수출계약에 대해 최장 5년까지 ‘고정환율’을 제공하는 것이 강점이다. 증거금이나, 담보를 요구하지 않아 중소기업에 유리하다.

6개월 기준으로 보험요율도 0.04~0.07%로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만기일 이전에 조기 결제할 수 있으며, 신용도에 따라 천차만별인 보험요율의 편차가 크지 않은 점도 이 보험의 강점이다.

최소 거래 금액도 3000달러로 비교적 부담이 적다. 은행권의 선물환 상품도 추천대상이다.

은행별로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최소 거래 금액이 50만달러 정도로 부담이 큰 편이다.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들은 거래 한도를 받기 어려운 단점도 있다.

달러, 원화, 엔화, 위안화를 비롯한 외환의 포트폴리오도 리스크 관리의 한 방편이다.

계란을 한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투자의 기본상식은 외환 거래에도 유효하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이 거래 통화를 선택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 ‘실효성’은 사실상 떨어진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적정한 헤지 비율을 선택하는 일도 리스크 관리의 또 다른 변수이다.

키코 사태의 후폭풍에 흔들린 기업 중에는 이른바 오버 헤지를 한 곳이 많았다.
그는 ‘만도’를 화제에 올린다.

만도, 영업 환위험 관리 시스템 구축
만도는 풍찬노숙의 세월을 거친 부품기업이다. 이 회사는 해외에 매각됐다 다시 한라그룹에 재인수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환 변동 리스크 관리에 관한 한 국내 최고 수준이라는 것이 이 사장의 진단이다.

JP모간에 인수된 뒤 리스크 관리 매트릭스를 익힌 이 부품회사 외환 관리의 백미는 바로 ‘영업환 위험 관리’ 시스템이다.

“환 위험은 기간이 길수록 위험이 더 큽니다. 한 달 후에 유입될 외화의 환 위험보다 2~3개월 후, 또는 내년에 유입될 외화의 환 위험이 더 클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업환 위험을 더 중요하게 관리해야 하는 배경입니다.”

영업이익률이 2~3%에 미치지 못하는 기업도 수두룩한 것이 현실이다. 그가 영업환 위기 관리를 중시하는 배경이다.

만도는 JP모간의 위험 관리 매트릭스에 환율 변동 모니터링 시스템을 이중으로 구축했다.

이성열 사장은 만도를 환율 급등락의 리스크를 정교한 ‘프로세스’로 관리하는 회사로 평가한다. 기업의 규모를 막론하고 아직도 주먹구구식으로 환변동 리스크에 대처하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이 사장은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기업들은 외환변동 리스크 관리의 귀재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1997~2008년까지 연평균 환 변율성이 8% 정도였습니다. 물론 12% 정도일 때도 있었습니다. 상장사들의 연평균 이익률이 6%, 중소기업은 4.5% 정도입니다.

환율은 연간 8% 변동된다면, 과연 이익이 얼마나 남겠습니까. 환율의 변동성이 기업의 평균 영업이익률을 상회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는 요즘 ‘목동’에서 사무실이 있는 여의도까지 뛰어서 ‘출퇴근’을 한다. 국민투자신탁 출신인 이 사장은 ‘건강테크’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냐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