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3.0 황토연구 29년, 의식주 무엇이든 황토제품 올인

흙은 생명의 근원이다. 굳이 ‘흙으로 사람을 빚었다’는 성경 구절까지 들추지 않아도, 모든 동식물의 토대며 모체가 흙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중에서도 황토는 ‘완전체’로 통한다. <본초강목>에서는 ‘흙 중에서 가장 으뜸의 약토’라고 인정했을 정도다. 사람에게 좋은 다양한 광물 입자와 화학 성분을 함유했으며, 독소를 분해하는 수많은 미생물도 살아 숨쉰다. 그 자체로 ‘생명체’인 셈. 이봉섭 ㈜터전 대표가 29년째 ‘황토 찬가’를 불러온 이유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이미화 기자

<본초강목>이나 <동의보감>을 알 리 없는 7살 무렵의 이봉섭 대표. 하지만 황토가 ‘약’이 된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황토를 밟고 자라서다. “시골에서 가축을 키우던 조부께서 소나 돼지가 아프면, 상처 부위에 황토를 바른 짚을 대줬어요. 약재를 구하기 힘든 시기였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치료를 많이 했습니다.”

황토는 철분, 마그네슘, 칼슘 등의 성분을 함유해 정화능력이 뛰어나고, 원적외선을 방사하는 능력도 높아 해독력, 흡수력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토 한 스푼당 2억 마리가 넘게 함유된 미생물이 신진대사를 촉진하기도 한다. 이 대표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 아픈 야생 동물들이 진흙에서 구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며 “사람도 아픈 부위에 황토를 대면 황토가 독성을 쏙 빨아 먹는다”고 설명했다.

황토의 효험을 경험하며 지냈던 어린 시절. 그 기억의 봉인이 풀린 것은 군 복무 때였다. 이 대표는 “군 복무시절 미군과 함께 생활했는데, 그들은 웰빙과 친환경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더라”며 “건강식품, 친환경제품을 떠올리다 보니, 그 끝은 자연스럽게 황토를 향했다”고 했다. 황토염색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시절이라 가능성도 엿보였다. 22살 이 대표가 생각한 ‘웰빙’의 터전은 곧 황토였고, 그렇게 ㈜터전이 탄생했다. ㈜터전은 황토를 이용한 천연염색 제품을 만드는 곳으로, 황토가 곧 우리 삶의 터전이라는 철학을 담고 있다. 침구를 위주로 내의, 의류 등 120여 종의 황토염색 제품을 생산한다.

 

전인미답의 땅 ‘황토염색’을 개척하다

황토염색 분야의 장인으로 우뚝 선 그지만, 변변한 은사(恩師) 하나 없다. 그만큼 국내에 황토염색 전문가가 없었다. 이 대표는 “일반 염색 분야의 장인들은 몇몇 있었지만, 황토 전문가나 황토염색 전문가는 전무했다”며 “배울 곳이 없다 보니 모든 걸 혼자 터득해야 했다”고 말했다. 현재 ㈜터전만의 기술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9번 걸러낸 황토제조법’도 이 과정에서 개발됐다. 경력이 쌓일수록 기술력은 더 요구됐다. 이 대표는 “일반 천에 비해 실크나 누에고치로 짠 명주, 머플러처럼 얇은 천들을 염색하는 것은 훨씬 까다롭다”면서 “올이 가늘고 천이 민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같은 제품들을 상대하려면 기술력을 더 높여야 했다. 이 대표는 기술 경쟁력 확보에 사활을 걸었고, 이는 결실로 나타났다. 그는 “보통 양복 천처럼 올이 가는 원단이 120수인데, 현재의 우리 기술력으로는 120수 천도 황토염색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60수 이상이 되면 천연염색이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황토’라는 명칭이 주는 고루함을 탈피하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황토염색에 여러 가지 색상을 구현하기 위한 시도다. 이 대표는 “갯벌 흙으로 잿빛을 내는가 하면 개나리꽃을 이용해 노란색 물을 들이기도 한다”고 했다. 같은 천연 황토라도 주황색에서 옅은 밤색까지 구현이 가능하다. 1996년에는 아예 ‘황토연구원’을 만들어 연구의 스펙트럼을 대폭 넓혔다. 그때부터 염색뿐만 아니라 황토에 관한 모든 걸 연구하기 시작했다. 대학, 외부 기업들과도 활발하게 연계했다. ‘건축용 황토판넬 제조법’(1999.1), ‘과일씨를 이용한 베갯속용 구조체와 그 제조방법 및 이를 적용한 베개’(2006.12) 등의 특허와 ‘품질경영체제인증 ISO9001’(2009.1) 같은 인증은 그 과정에서 나온 열매다. 바르고 입는 것은 물론 먹는 황토의 연구도 활발하다. 이 대표는 “<동의보감>에도 먹는 황토에 대해 잘 나와 있으며, 황토물은 ‘지장수’라고 해 약 처방에 쓰이기도 한다”며 “먹는 부분은 공식적으로 의약품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한 범위까지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연구원을 통해 가장 먼저 특허 출원의 영예를 안은 ‘건축용 황토판넬’에 대한 애착은 특히 남다르다. 황토로 건축 자재를 만든 것으로, 폐기할 때 그냥 부셔버리면 될 정도로 환경친화적이며, 미생물이 살 수 있도록 열가공을 하지 않아 인체에도 유익한 건축 자재다. 이 대표는 “황토로 집을 지으면 피부에 좋은데, 특히 아이들 아토피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했다. ㈜터전의 사무실도 황토로 지었다.

    

흙을 사랑한 엔지니어

평생 흙을 만지면서 살아온 것 같았던 이 대표. 사실 그는 엔지니어 출신이다. 군대에서도 항공기 정비병으로 복무하면서 최첨단 항공 기기들을 접했다. 일견 전혀 상관없는 분야 같지만, 이 같은 경험들은 변변한 기계 하나 없던 황토염색 분야에 새로운 가능성을 던졌다.

“황토염색은 굉장히 고된 작업입니다. 먼저 황토를 물속에 넣어 곱게 만들어요. 굉장히 고운 모래가 모여 만들어진 흙이 황토지만, 개중에 굵은 입자들이 섞여 있거든요. 이걸 걸러내야 합니다. 이 과정을 ‘수비(水飛)’라고 하는데, 황토염색에서 가장 중요한 공정 중 하나죠.” 통상 수비 과정에서 모아지는 황토의 양은 처음 투입량의 0.5% 정도. 이후에는 황토를 원단에 침투시킨다. 천에 염색약을 묻히고 고착제를 발라 코팅하는 일반염색과 다른 점이다. 황토염색 제품의 물이 잘 빠지지 않고 변색하지도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처음에는 이 과정을 모두 손으로 했다. 문지르고, 말리고를 반복하며 황토를 원단에 침투시켰다. “그저 계속 조물조물 치대는 겁니다. 요령이 있으나 마나, 손이 다 까지는 작업이에요.” 웬만한 작업은 손으로 했지만 큰 섬유는 한계가 있었다. 이 대표는 “이불이나 카펫 같은 것들은 물을 먹으면 100kg 이상 나갈 때도 있는데, 손으로 하면 힘도 들고, 정교함도 떨어진다”고 했다.

엔지니어로서의 경험이 꽃을 피운 건 이 부분에서다. “미국의 최첨단 기계들을 보면서 기계 쪽에 일가견이 생겼습니다. 직접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정도였죠. 막상 황토염색을 하려고 보니, 마땅한 기계가 없는 겁니다. 혼자 하는데 언제까지 손으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탁 기계, 건조 기계 등을 염색기계로 개조해 봤어요. 손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정확하기에 이거다 싶었죠.”

작업실에는 실제로 그가 직접 만든 기계들이 즐비했다. 이 대표는 “12년 전부터 기계를 쓰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돼 백화점에도 납품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일상에 스민 황토 제품 개발할 것

㈜터전에서는 현재 120여 종의 황토염색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염색에 사용되는 면은 협력업체를 통해 제공받는데, 염색하기 좋은 원단을 직접 선별해 주문한다. 생산품 중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은 침구로, 전체 70% 정도가 이불, 베개, 패드, 카펫 등의 제품이다. 여름을 맞아 시원하면서도 인체에 유익한 황토 의류도 각광받고 있다.

황토염색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조금씩’이다. 황토를 원단에 스미도록 묻히고, 말리는 과정을 9번이나 반복하며 완성도를 높인다.

㈜터전의 행보도 비슷하다. 많은 사람을 황토의 매력에 조금씩 스며들게 하겠다는 것. 매출 확대나 글로벌화 움직임은 그래서 조심스럽다. 이곳의 제품은 한때 신세계, 롯데, 현대 백화점 등 전국 20개 백화점에서 유통됐을 정도로 물량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행사 판매 위주로 판을 줄였다. 이 대표는 “제품이 많이 나갈 때는 연 매출이 십억을 넘기도 했지만, 백화점에 주는 매장 판매수수료가 너무 높아 내실 면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이에 영업망을 백화점의 이벤트 판매나 광주의 쇼룸 등으로 좁히는 등 내실 다지기를 선택했다. 2004년부터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이용해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면서 유통 채널 다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기술력을 최대 무기로 삼아온 만큼, 연구개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최근 이 대표가 꽂힌 분야는 ‘향토와 관련된 식단’이다. 이 대표는 “쉽게 볼 수 있는 황토 관련 식단이 ‘황토 먹인 오리’ 같은 것들인데, 이렇게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좀 더 실질적으로 황토를 이용하는 식단을 개발해보고 싶다”고 했다.

<동의보감>이 인정할 정도로 우리 전통이 농축된 분야니 만큼, 글로벌화에 대한 관심도 많다.

이 대표는 “일본은 새까만 화산재밖에 없어 황토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면서 “하지만 많이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직접 겪어보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대표는 일본 지역에 조금씩 수출을 하면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외에서도 먹힐 것”이라는 믿음은 확고하다. 이 대표는 “4대 문명의 발생지는 모두 황토를 끼고 있는 지역이고, 지금도 황토가 있는 지역들은 기후가 좋고 사람 살기가 좋은 곳”이라며 “우리나라에는 광산이나 하남 임곡 등지에 아직도 좋은 황토가 많이 남아 있는데, 오염되지 않은 황토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향후 글로벌화에 호재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9번 걸러내고, 9번 비벼 말린 황토로 생활에 지친 도시인을 구해내겠다는 이 대표. 황토에 관한 한 “바르고, 먹고, 입는 것을 가리지 않는다”는 그에게서 대지의 묵직함과 흙의 친근함이 전해졌다.

 

장인수첩

시골에서 생활하며 황토의 효능을 보고 자랐다. 군복무 당시 미군과 함께 생활하며 ‘웰빙’과 ‘친환경’에 대해 눈을 떴고, 결국 자신이 보고 자란 ‘황토’가 답이라는 걸 알았다. 30년 전 황토염색 분야는 전인미답의 땅이었다. 특별한 스승 없이 손이 까지도록 혼자 연습했다. 1996년에는 아예 ‘황토연구원’을 만들어 연구의 스펙트럼을 대폭 넓혔다. 엔지니어 시절 경험을 살려 염색 기기를 손수 개발, 대량 생산 또한 가능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