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동제약 창업주인 가산 최수부 회장이 지난 24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그의 나이 향년 77세.

최 회장은 한방의 과학화에 앞장서며 국내 제약업계에 큰 획을 그은 입지적 인물이다. 1992년 당시 약품에 들어가는 재료를 일일이 고르고 확인하는 모습이 우황청심원 TV 광고로 방영되면서 소비자들에게 알려졌다. 경기가 아무리 힘들어도 제품에 절대 싼 재료를 쓰지 않겠다는 그의 뚝심으로 인해 ‘최씨 고집’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한방 과학화’라는 한 길만을 걸어온 최 회장의 인생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1936년 일본 기타큐슈 후쿠오카현에서 5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최 회장은 해방 후 경북 달성에 정착했으나 부친의 갑작스런 병환으로 12살 어린 나이에 아홉 식구의 가장이 됐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나무 베기, 참외 따기에서부터 엿장수, 담배장사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암울한 청년기를 보낸 최 회장은 “이 시장통에서 4~5년을 버티면서 나름의 장사수완을 배웠다”며 “그것은 바로 신용”이라고 말했다.

1960년 군 제대 후 최 회장은 고려인삼산업사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하며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바로 인삼을 다려 만든 보약 ‘경옥고’를 만난 것이다. 타고난 뚝심과 배짱에 남다른 성실과 정직으로 입사 후 3년 동안 단 한 번도 판매왕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다. 최 회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1963년 직접 경옥고를 제조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 광동제약의 포문을 열었다.

이후 광동제약은 쌍화탕과 우황청심원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한방의약품의 생산 설비 및 노하우 등을 발전시켜 한방의 과학화를 선도해온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마냥 탄탄대로를 달릴 것 같던 광동제약도 1998년 우리나라를 덮친 외환위기(IMF)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회사를 살리고자 전 직원이 상여금을 반납했고 최 회장은 주식 10만 주를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양도하며 상생경영으로 위기의 끝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회사가 안정을 되찾자 최 회장은 반납한 상여금 전액을 직원들에게 돌려줘 노사관계에서도 ‘신뢰와 정도의 리더십’, ‘행동하는 리더십’을 보여줬다.

2000년대 들어서며 최 회장은 다시 한 번 도약을 꾀했다. 바로 마시는 비타민 ‘비타 500’의 출범이다. 비타 500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며 광동제약의 해외시장 진출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후 출시된 ‘옥수수 수염차’도 연달아 히트를 치며 광동제약은 제약에 이어 음료시장에서도 입지를 단단히 굳혔다.

맨손으로 시작해 연매출 4000억원 규모의 제약회사를 일궈낸 최 회장은 자수성가형 기업인으로 우리나라 제약업계 성장의 산증인이다. 최 회장은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996년 국민훈장 목련장 등 훈포장을 받았으며 대한경영학회(2008년) 등 국내외 기관이 수여하는 경영인상을 수차례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