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백석 <백화>

고성 진부령이나 태백고원에서 만나던 그 나무. 새벽 짙은 안개 속을 헤매다 가끔 마주치던 그 하얀…. 처음에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하던 그 순백의 알몸. 잎을 모두 떨구어 내고서야 비로소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나무.

자작나무의 아름다움이 가장 도드라질 때가 바로 겨울의 문턱으로 들어서는 이맘때다.

활엽수들은 다 나뭇잎을 떨궜고 가장 늦게 잎을 내려놓는다는 낙엽송마저도 양지 바른 쪽에만 잎을 달고 있을 때 자작나무는 순백의 수피를 수줍게 드러낸다.

영하 70도의 추위에도 수분을 최소화해 자신을 정갈하게 견뎌내는 자작나무의 얇은 껍질은 희고 부드러우며 윤기가 난다. 차갑지만 한편으로는 고결해 보이는 모습, 그것이 바로 자작나무가 가진 낭만이자 매력이다.

강원도 인제군 남면 수산리 응봉산(매봉산). 강원 북부 산간지역에서나 간혹 볼 수 있다는 자작나무숲이 엄청난 규모로 자라고 있는 곳이다.

소양호 한쪽 자락을 따라 수산리 산골 마을을 찾아갔다. 수산리는 1973년 춘천 쪽에 소양댐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번듯한 초등학교까지 갖춘 제법 북적이는 마을이었다.

그러던 것이 소양호 담수가 이뤄지면서 한쪽 길이 끊어져 수산리는 섬 아닌 섬이 돼버렸다. 한번 들어섰으면 꼼짝없이 그 길로 다시 되돌아나와야 하는 막다른 길이다. 초등학교는 분교와 폐교라는 길을 걷다가 이젠 자연학교라는 이름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자작나무숲은 수산리를 품안에 안고 있는 응봉산 자락에 들어서 있다. 수산리에서 자작나무를 잘 보기 위해서는 높은 곳으로 올라야 한다.

워낙 숲의 규모가 큰 탓에 숲 안으로 드는 것보다는 높이 올라 자작나무숲 전체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응봉산의 잘 다져진 임도(林道)는 자작나무숲을 내려다보는 특급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인제자연학교를 지나 응봉산을 구불구불 넘어가는 임도를 따라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난 1996년에 놓인 임도는 산의 8분 능선쯤으로 올라서 산허리를 끼고 돌아간다. 비포장길이지만, 그다지 험하지 않아 흙길을 밟으며 걷는 트레킹길로 그만이다.

40여분이 지난 후 임도에서 멀리 발 아래로 내려다보자 눈을 의심할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시야를 사로잡는다.

마을 뒤쪽으로 흘러내려온 산 능선부터 산자락의 한쪽 비탈면을 가득 메운 자작나무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가파른 사면에 들어서니 어찌나 촘촘하게 서 있던지 순백의 나뭇가지들이 날카로운 펜화로 그린듯 한 앙상한 선들이 얽히고설켰다.

겨울의 문턱, 순백의 알몸을 드러내는 자작나무.

580m 고지의 임도 정상.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자작나무숲은 자연이 부리는 마술을 보는 듯 신비스러운 모습이다. 길을 따라 떠난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 말이다.

하얀 알몸을 드러낸 자작나무 줄기를 따라 머리 위에는 빨강, 노랑 색칠을 한 것처럼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서 있는 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나 다름없다.

그 주변으로 늦가을의 풍광을 담은 삼나무와 낙엽송, 잣나무 등이 어우러져 거짓말을 보태면 알프스의 어느 시골마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이런 산중에 이렇듯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작나무숲이 조성됐을까. 숲은 국내 유일의 펄프를 생산하는 동해펄프(현 무림P&P)가 1987년 펄프생산을 위해 조림을 시작한 곳이란다.

발 아래 흙길을 밟으며 걷는 트레킹길. 아름다운 풍경이 시야를 사로 잡는다.


자작나무를 선택한 것은 고급 펄프원료가 되는 데다, 자라는 속도도 빠르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심어진 자작나무숲은 전체 2000㏊의 조림지 가운데 600㏊(6㎢)로 서울 여의도 면적(2.95㎢)의 두 배나 되는 숲으로 변했다.

이제 22년을 자란 자작나무는 비록 거목이라 할 만큼은 아니지만 15m는 족히 넘게 자랐다.

정상을 지나 낙엽이 수북히 쌓인 임도를 따라 1시간 30여분 정도 가면 응봉산 자작나무 숲길 중 백미를 만날 수 있다. 시선을 막아서는 아름드리 나무들 하나 없어 시야는 탁 트인다. 첩첩이 이어진 산봉우리들이 멀리 설악산 자락까지 시원스레 펼쳐진다.

그 아래 자작나무숲이 산봉우리를 넘어 산사면 아래로 내려뻗은 모습이 흡사 한반도의 지형을 빼다박은 듯한 장관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백두산을 타고 내려온 자작나무는 금강산을 지나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가고 있는 듯하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산허리를 감고 도는 응봉산 임도는 느릿느릿 걷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트레킹 코스다.

터덜터덜 겨울숲을 거닐거나, 혹은 그 숲을 멀리 바라보는 일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여기에 자작나무들이 숲의 전령이 되어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하기에 외롭거나 쓸쓸하지 않다.

내려서는 길, 얼굴을 스치는 바람기에도 자작나무잎과 낙엽송들이 비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다.

여행메모


가는 길
서울에서 6번 국도를 타고 양평을 지나 44번 국도 홍천, 인제 방향으로 가다 인제군 신남면에서 46번 국도 양구 방면으로 진입한다.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수산리 이정표를 보고 샛길로 접어들어 소양강을 끼고 가다 다리 건너 좌회전하면 수산리다.

숲길 트레킹
수산리마을회관 옆 인제자연학교에서 마을 앞 물길을 따라 1km 정도 올라가면 작은 다리 건너 별장이 나온다. 트레킹의 시작지점이다.

여기서 별장을 끼고 돌아 오른쪽으로 직진해 비탈길을 따라 오르면 응봉산 임도다. 차단기가 설치된 곳에서 정상 부근까지 4km 정도 거리다. 경사가 심하지 않아 힘들이지 않고 올라갈 수 있다.

정상 부근에서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는 6km 구간은 평지와 내리막길이다.
총 10여km 거리로 3~4시간 소요. 들뜬 여행이나 붐비는 행락철 산행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실망할 수 있다.

자연의 맛 그대로를 즐기며 느릿느릿 걸으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응봉산(인제)=글ㆍ사진 아시아경제신문 조용준 기자
(jun2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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