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컨슈머들의 불합리한 요구는 기업과 일반 소비자에게 피해를 준다. 하지만 피해의 당사자인 기업들은 지금까지 적극적인 대응을 주저해왔다. 블랙컨슈머의 말이 새어 나갈 경우 제품 및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이 클까봐 경품과 사은품으로 달래고 조용히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기업들이 블랙컨슈머 근절을 위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억지 민원을 제기하는 1%의블랙컨슈머 때문에 실제 서비스를 제공받아야 할 99%의 선량한 고객들이 피해를 보고 있기 때문. 이에 각 기업들이 어떻게 블랙컨슈머들을 대응하는지 알아보고 향후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본다.

#지난해 여름 서울 A백화점 스포츠 매장의 20대 여자 점원은 사표를 냈다. "선물 받은 운동화를 다른 사이즈로 바꿔달라"는 남성 고객에게, "저희가 수입하지 않는 상품이라 교환이나 환불을 해드리기 어렵다"고 거절한 게 화근(禍根)이었다. 이 남자는 이후 매일 매장에 전화를 걸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블랙컨슈머로 골치를 앓고 있지만 기업들은 적극적인 대응을 주저한다. 말도 안 되는 요구인 줄 알면서도 경품과 사은품을 물며 고객을 달래고 있다. 인터넷에 악성 루머가 퍼져 브랜드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기 때문이다. 블랙컨슈머들은 기업 이미지나 상품에 악영향을 미치는 정보가 SNS를 타고 급속히 확대, 재생산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하고 있다. 휴대폰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가열•훼손한 뒤 인터넷 등에 ‘충전 중 폭발했다’고 허위 사실을 퍼뜨렸다가 1년의 실형을 살게 된 A씨(29)가 대표적 사례다. 당시 이 제품이 폭발했다는 사건은 유튜브나 페이스북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기업 브랜드에 큰 타격을 줬다.

업계에선 블랙컨슈머는 사고원인이 규명되기 전까지는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아 그 때까지 일방적으로 무방비 상태로 손실을 감내해야만 한다고 호소한다. 핸드폰 제조업체 홍보팀 직원은 “어쩔 수 없었다.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들의 악의적인 제품하자 주장을 받아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블랙컨슈머의 말이 새어 나갈 경우 제품 및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이 불가피해 최대한 쉬쉬하며 해결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블랙컨슈머의 무리한 민원을 묵인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기업의 이미지 실추를 막기 임시방편으로 처리하는 기업의 태도는 곧 잠재적인 블랙컨슈머를 양산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불만과 피해를 조용하게 제기하는 소비자한테는 건성으로 대하고,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는 무리한 요구도 들어주는 기업의 이중적인 태도도 블랙컨슈머를이 활개치는데 큰 몫을 했다.

 

기업들 ‘덮자’에서 적극적인 대응으로 진화

최근 기업들은 블랙컨슈머 근절을 위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당하지 않은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직원에게 욕설이나 폭행까지 서슴지 않는 고객에 대해 체계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기업이 블랙컨슈머 근절을 위해 팔을 걷어 올린 이유는 실제 도움이 필요한 고객에게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한 유통업체 임원은 “억지 민원을 제기하거나 협박하는 1%의블랙컨슈머 때문에 실제 서비스를 제공받아야 할 99%의 선량한 고객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며 “블랙컨슈머에게 적극 대응해 다른 고객의 쇼핑을 방해하거나 극단적인 불쾌감을 주는 행위를 차단할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기업들이 강경 대응에 나서는 데는 내부 직원과 협력업체 사원을 보호하려는 의도도 있다. 한 콜센터 센터장은 “전화 상담원 중 대부분은 여성 직원”이라며 “일부 성희롱 발언과 폭언 때문에 직원들이 정신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대응 지침을 강화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에 블랙컨슈머와 가장 맞닿아 있어 집중적인 타깃이 돼온 유통업체와 금융권은 강력한 대응책을 꺼내 들었다. 현대카드는 지난해 금융권 최초로 악성 민원 고객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콜센터 직원에게 모욕, 성희롱, 명예훼손을 하는 고객에게는 두 차례 경고를 하고, 그래도 그치지 않으면 상담원이 먼저 전화를 끊도록 하는 지침을 내렸다. B카드사는 모욕적인 폭언이 지속되면 자동응답시스템(ARS)으로 연결해 1차 경고를 하고, 이후에도 그치지 않으면 등록된 고객의 주소지로 내용 증명을 발송해 고소•고발 조치를 취한다.

보험도 최근 들어 적극적인 대응 방안을 모색 중이다. 블랙컨슈머가 직접 지점에 방문할 경우 CCTV가 설치된 민원상담실을 활용하거나, 블랙컨슈머 전담부서를 만들어 직접 대응하기도 한다. 보험 계약 할 때에는 당시 내용을 녹음, 기존 단답형식의 계약서를 주관식 형태로 전환, 계약서의 내용문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증거로 글씨를 따라 쓰게 해 블랙컨슈머를 사전에 차단하기도 한다. 전화를 통해 부당한 요구를 제시할 경우에는 녹음된다는 점을 미리 알린 뒤 녹음 내용을 별도로 보관해 법적 대응에 나선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보상금액이 크기 때문에 블랙커슈머가 활개칠 수록 다수고객들이 피해를 본다”며 “인력과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전담부서를 따로 만들어 불필요한 손실을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권은 블랙컨슈머 대응방안을 위해 전국은행연합회를 중심으로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6월 시중은행들이 블랙컨슈머들에 대한 공동 대응 방안 마련에 착수했으며, 은행연합회는 민원 담당 부장들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을 만들었다. 또한 각 은행들은 블랙컨슈머 근절을 위한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고객 민원에 대응하는 매뉴얼을 만들어 각 지점에 배포하고 지점별로 금융소비자 보호관련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지점 직원들이 도가 지나친 블랙컨슈머 때문에 지점이동이나 도움을 요청하는 횟수가 늘고 있다”며 “자주 발생하는 민원을 사내 게시판에 올리거나 블랙컨슈머 현황을 파악하는 등 은행 본점 차원에게 체계적인 대응책을 마련 중이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도 블랙컨슈머 대응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블랙컨슈머들로 인해 발생한 손해가 고스란히 다른 선량한 소비자들의 부담으로 돌아가고 금융권의 경쟁력마저 떨어뜨리고 있기 때문이다.금감원 측은 "블랙컨슈머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해 각 협회를 통해 의견을 수렴 중이다”며 "악성민원고객에 대한 정의와 응대 요령이 담긴 가이드 라인을 하반기 중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자와 밀접한 유통업체에서도 블랙컨슈머 단절에 적극 나섰다. 모 백화점은 앞으로 부당한 요구나 폭언에 직원들이 ‘손님, 죄송합니다만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는 말 대신 "지금 하시는 행동은 형법 ○조에 저촉될 수 있으므로 자제 부탁드립니다"라는 주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전문적인 `고객 악성 항의 대응 매뉴얼`을 만들었다. 이 매뉴얼에는 ‘부당한 교환ㆍ환불을 요구하는 고객에게는 일단 별도의 소비자 심의기관에 사안을 의뢰토록 하라`, `매장에서 고객이 소란을 피우면 다른 고객과 사원 보호를 위해 비상 연락체제를 가동하고, 사진ㆍ동영상 등 대응을 위한 입증자료를 확보하라` 등의 구체적인 내용이 명시돼 있다. 직원들의 원활한 대응을 위해 지침대로 행동한 경우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블랙컨슈머를 방치하기엔 백화점의 손실이 너무 크다"며 "다수의 선량한 고객과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말했다.

국내 홈쇼핑 업계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악성 민원사례에 대응하고 있다. 부당한 교환ㆍ환불을 요구하는 블랙컨슈머들은 황색⋅적색 등으로 등급을 구분해 담당자가 따로 관리한다. 이 블랙리스트는 판매 및 고객상담 부서와 공유해 고객 응대 절차와 멘트를 달리 하고 있다.

항공사 또한 항공 안전을 위협하는 블랙컨슈머들에 대한 강력한 조치로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최근 ‘라면상무’를 비롯해 폭언과 폭행으로 승무원이나 직원들에게 직접 상해를 입히기도 하는 사례가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항공기 이용 중에 발생하는 블랙컨슈머의 부당한 요구는 항공 안전을 심대히 위협할 수 있어 법률적 제재 또한 강한 편이다. 이러한 법 규정을 활용해 블랙컨슈머를 적극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 중이다.

이러한 기업들의 대응에 익명을 요구하는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과거와 달리 원칙주의로 블랙컨슈머를 대응하는 추세는 블랙컨슈머로 인해 증가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고, 결국 소비자에게 좀 더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까탈 고객 응대 많이 했더니 “서비스 좋아졌대요”

최근 A 통신사는 친절 상담으로 블랙컨슈머까지 감동시킨 사례를 책으로 펴냈다. 이 사연의 주인공들은 지금도 그 남성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문제의 40대 남성은 미납 요금에 대한 독촉전화 때문에 고객센터를 찾아와 소리를 지르고 무리한 요구를 해 주위 방문객의 눈총을 받았다. 그의 폭언과 부적절한 행동이 지속됐지만 담당직원들은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돌아갈 때 문 밖까지 배웅을 하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기를 수 차례. 40대 남성이 바뀌었다. 오히려 소란을 피우는 고객이 있으면 먼저 나서서 진정시키는 친절 고객이 된 것. 당시 한 직원은 “나중에 알았지만 그 남성은 경기가 나빠진 탓에 실직을 한 상태였다”며 “돈이 없는데 자꾸 미납 요금 독촉 전화를 해 술김에 화가 나 난리를 피웠다”고 말했다. 그 남성의 경제적 상황을 안 고객센터는 독촉전화를 자제하고 유효기간을 늘려줬다. 이에 40대 남성은 감사하다며 자그마한 선물을 담당 직원에 선물했다. 고객센터 측은 “비록 다른 고객과 직원들에게 불쾌한 행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진심으로 대하니까 악성고객이 선량한 소비자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결국 소비자를 대하는 것은 ‘정을 나누는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과거 한때 ‘손님이 왕이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최근 악성 민원과 블랙컨슈머로 이 말의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기업과 소비자 관계에서는 아직 유효한 듯 보였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기업은 블랙컨슈머가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주의 깊게 경청한다면, 기업과 소비자간의 간극을 좁힐 수 있다”고 전했다. 물론 막무가내로 손해배상 등 블랙커슈머의 불합리한 요구사례가 늘고 있긴 했지만 기업의 서비스 질 높이기에 꼭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업은 소비자와 원활한 소통을 통해 그들이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서비스마인드가 필요하고, 문제가 발생 할 때는 모든 절차를 투명하게 처리하며, 잘못을 공개해 체계적으로 보상하는 것이 기업에 이득이 될 것이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기업은 악성 민원의 원인이 되는 제품의 결함이나 품질 관리에 신경을 써 블랙컨슈머의 활동을 방지해야 한다”며 “제품 이용방법과 구매 후 관리방법 등의 제품 교육을 통해 소비자가 블랙컨슈머의 유혹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기업 활동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미니 인터뷰]
A 보험사 B 대리

보험사에도 블랙컨슈머 대응 방안이 있는가?

“보험사들 악성민원의 경우 보험금 청구 등 개별사안이 대부분입니다. 보험사들은 다툼의 소지가 있는 청구에 대해서 회사 나름대로 대응은 하고 있는데, 가이드라인으로 두고 대응하기 보다 분쟁을 최소화 하겠다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계약 과정에서 분쟁의 소지를 불식시키는 게 블랙컨슈머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부류의 블랙컨슈머가 많은가?

보험사의 대부분 블랙컨슈머는 상품설명이 분명히 제대로 됐는데 나중에 가서 못 들었다는 식입니다. 또는 몇 년 전 가입한 상품인데 자필서명을 한 적 없다고 발뺌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때는 녹취를 한다거나, 필적대조를 통해 계약과정을 투명하게 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블랙컨슈머를 대처하는 방안이 있는가?

“사실 투명한 계약상의 절차가 누구 말이 맞는 건지 따지는 것이기 때문이죠. 투명한 계약을 위해 계약 당시 대화 내용을 녹취를 한다거나, 기존 단답형식의 계약서를 주관식 형태로 바꾸고 있습니다. 또 사전 안내문을 좀 더 철저히 공지한다거나, 계약서의 내용문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증거로 글씨를 따라 쓰게 합니다. 최근 이런 일련의 과정이 명문화 돼 다른 업종과 달리 생명사의 경우 블랙컨슈머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블랙컨슈머도 소비자인가?

블랙컨슈머가 얼핏 부도덕하게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다른 업종은 모르겠지만 보험쪽에서는 블랙컨슈머의 기준이 애매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험 계약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에 대한 책임은 회사에 있고, 이를 입증하는 책임 또한 회사에 있기 때문이죠. 계약 과정을 좀 더 철저하게 한다면 고객들이 불합리한 요구나 협박을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