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트 하다 보니 제 삶도 ‘예술’이 됐죠”

여성잡지 출판 제작 업무를 담당했던 김진섭 씨는 우연한 기회에 유럽으로 출장을 갔다가 접한 책 공방의 매력에 빠져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북아트 사업을 시작했다. 기술을 배우고 생소한 북아트 문화를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10여 년의 세월을 거쳐 지금은 전북 완주군 삼례문화예술촌에서 유럽식 전통 북아트 공방을 재현, 책 만드는 체험공간인 ‘책공방 북아트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코노믹리뷰 박지현 기자

책 공방은 어쩐지 낯설다. 책에 관심 없고, 책 하면 으레 읽는 것만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책이 ‘읽기’ 그 이상이라면, 게다가 문화 예술을 입혀 유럽식 전통 공방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 있다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가 보고 싶지 않겠는가.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문화예술촌의 ‘책공방 북아트센터’가 딱 그런 곳이다. 인쇄부터 바인딩까지 책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책 공방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주인장 김진섭(49세) 씨는 인생 2막의 새 뿌리를 여기에 박았다. 삼례문화예술촌을 찾았던 이들이 설마 하며 왔다가 몇 시간씩 머물다가 돌아가는 곳, 책공방북아트센터 안으로 들어가봤다.

 

책은 나의 운명

18년 전쯤이다. 김 씨가 북아트(Book Art)와 처음 인연을 맺은 건 여성잡지사 기획팀에서 출판 제작 업무를 총괄하던 시절이다. 유럽 출장길에서 우연히 만난 마을마다 대대로 내려오는 소규모 책 공방들. 일기, 사진 등을 책으로 엮어 만들어주거나 책을 공예품처럼 아름답게 바꿔주기도 했다.

‘어? 책을 손으로 만들잖아?’ 옛날 방식을 이용해 책 표지 디자인에서부터 종이 재질까지 개인의 취향에 맞춘 수제(手制)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맞춤책인 셈이다. 제작 과정 대부분이 핸드메이드로 이뤄지는 장면은 그동안 천편일률적으로 대량 찍어내는 책에 익숙했던 그에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유럽에서는 책을 단순히 읽을거리, 공산품으로 보지 않고 예술의 한 장르로 보고 있었어요.  읽는다는 차원을 넘어 자신만의 책을 만들 수 있는 유럽인들의 문화와 삶의 여유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북아트의 매력에 빠져버린 그는 귀국하면서 막연하게 이런 공간과 문화를 한국에 들여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독일 여행차 찾은 세계 최대 규모의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글로벌 출판문화와 트렌드를 목격하고는 또 한 번의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책을 보는 시야가 확 트인 그는 종이 선택에서부터 인쇄, 제책, 가공에 이르기까지 출판제작 노하우를 집대성한 책 <책 잘 만드는 책>을 쓰면서 뭔가 새로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회사를) 나가면 춥다면서 가족과 친구들 모두 반대했죠. 회사에서도 만류했고요. 그래서 여름에 회사를 나왔습니다.(웃음)” 야근과 밤샘 근무가 부지기수였던 직장생활이었지만 그것 역시도 즐거울 만큼 일이 좋았던 그는 2000년 여름, 새로운 목표와 사명을 위해 결국 15년 회사원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책은 ‘읽기’ 그 이상의 예술

ⓒ이코노믹리뷰 박지현 기자

북아트가 생소하던 당시 국내에선 마땅히 배울 만한 곳이 없었다. 2001년 초반, 김 씨는 곧장 북아트의 본고장인 유럽으로 날아갔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 독일 마인츠의 한 아틀리에(공방)에서 8주 코스의 북아트 과정을 수료하고 다수의 외국 도서들을 번역해가며 공부했다. 펜대 굴리며 책을 만들던 그가 직접 가죽과 바늘을 들고 책을 엮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현지의 북아트 전문가들을 수소문해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기술을 연마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서울 충무로·을지로, 경기 파주 등지에서 책 만드는 장인들에게 계속 일을 배웠다.

그렇게 2~3년에 걸쳐 갈고닦은 실력으로 그는 창업에 나섰다. 유럽식 북아트 공방을 국내 처음으로 도입,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나만의 책을 만들고 책 만드는 문화를 체험해볼 수 있는 종합문화센터가 콘셉트.

“우리나라에서는 북아트를 전문가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일반인들도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친근한 생활문화이거든요. 특별한 영역으로 여겨졌던 북아트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종이 만들기에서부터 핸드 프레스, 나만의 다이어리 만들기 등 책을 주제로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개발해 보급하고 싶었어요.”

아직 국내엔 북아트가 활성화돼 있지 않아 사업성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가능성을 내다봤다. 수제 책을 판매하는 사업이지만, 단순히 책 제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자기 손으로 직접 책을 만들어볼 수 있게 체험학습을 시켜주는 방식으로 수익구조를 가져갈 요량이었다.

“사업자금이라곤 퇴직금이 전부였어요. 수입이 없는 동안에도 아내가 생활비를 꼭 줘야 한다고 당부하더군요. 5만원도 좋고 10만원도 좋으니 매달 25일 제가 책정하는 기준의 월급을 주면 어떻게든 살림을 꾸려가겠다고요. 가장으로서 책임은 다해야 하잖아요. 매달 꼬박꼬박 100만원씩 생활비를 만들고 나머지는 창업자금으로 썼습니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려니까 오히려 사업 준비를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그리 여유 있는 자금상황이 아니었기에 김 씨는 서울 신사동에 있는 친구의 회사 사무실에서 회의실을 빌려 작은 공방을 마련했다. 그렇게 해서 3000만~4000만원의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총 창업자금은 사무실 보증금 500만원에 책상과 전화 등 집기 구입비 40만원 정도였다. 공방이라곤 목공방의 개념만 존재하던 2001년에 그는 책 공방을 열었다.

 

‘책 만드는 버스’ 서비스

공방을 오픈하긴 했지만 일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난생처음 하는 사업,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 책 공방 사업에 대한 조언을 얻을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처음부터 ‘돈벌이’가 안 되니, 운영비를 충당해주는 본업은 출판대행이었다. 이를 통해 번 돈은 고스란히 북아트를 위해 재투자했다. 기자재 마련이 가장 큰 부담거리였다. 북프레스, 활판인쇄기, 사철기, 판화프레스 등 수작업 기자재는 한 대에 2000만~3000만원에 달할 만큼 상당히 고가였기 때문이다. 돈을 모으는 대로 하나하나 장만해나갔다.

걸림돌은 또 있었다. 자신의 전공인 출판 일과 언뜻 비슷한 것처럼 보였던 책 공방 사업의 분위기가 시간이 갈수록 전혀 딴판으로 흐르는 듯했다. 유럽을 비롯해 일본만 해도 책 공방이 확산되고 있었으나 과연 우리 실정과 문화에 접목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우려는 그대로 현실로 나타났다. 전단지를 뿌리고 아무리 홍보를 해도 손님이 찾질 않았다. 직접 찾아다니면서 설명을 해도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의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요즘에야 북아트가 인기 있는 체험학습 리스트에 올랐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잡상인 취급을 받으며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참 서러운 기억이죠.”

그러던 중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육적 측면을 부각해 학교를 공략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김 씨는 수도권 1000여 개 초등학교를 제집 드나들듯 방문해 선생님 설득에 나섰다. 관심 있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무료 책 만들기 체험 행사도 열었다. 처음엔 잡상인 취급을 하던 교사들이 차츰 그의 얘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는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아이들의 장거리 이동 문제를 걱정하는 것에 착안, 찾아가는 서비스를 운영해보면 어떨까 싶었던 것. 생소한 북아트 문화를 보다 쉽게 전파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아이템은 버스. 중고시장에서 구입한 45인승 노란 버스를 개조해 차량 내부에 종이 펄프·발·틀과 같은 종이를 만들 수 있는 도구, 인쇄할 때 필요한 동판·롤러·잉크·금박기·압착기· 입조기 등 책 만드는 데 필요한 기자재를 실었다. 움직이는 책 공방 이른바 ‘책 만드는 버스’였던 것.

“종이 만들기에서부터 인쇄·제책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체험하며 손수 책을 만들어볼 수 있는 일종의 이동 문화센터인 셈이죠. 유치원, 학원, 학교, 도서관, 아파트 등 어린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책을 매개로 하는 문화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식이었습니다.”

2007년부터 김 씨는 책 만들기 출장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운영했다. 서비스 비용으로 1회 기준 1인당 1~2만원가량의 재료비만 받았다. 그의 이동형 서비스 전략은 적중했다. 교과서와 기성품만 보다가 직접 책 만드는 과정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은 자신감, 창의력, 사고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자녀·학생들의 체험학습으로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조금씩 입소문이 퍼져나가자 유치원을 비롯해 도서관, 지자체, 백화점 등에서 문의가 쇄도했다.

“체험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스스로 책을 만들어보는 책 공방에, 출장 서비스를 가미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어요. 결과는 대성공이었죠.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였어요. 무엇보다 책 만들기의 즐거움이 어필한 게 아닐까요. 자신만의 새롭고 독창적인 책을 만드는 재미와 감동이 쏠쏠하다는 평가였으니까요.” 그의 공방을 통해 제책 체험과 북아트 스쿨 및 책 복원 프로그램 등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당시 한 달 매출 1200만원에 순이익 600만원을 남길 만큼 장사가 잘됐단다.

자신만의 앨범이나 책, 다이어리를 만들려는 가족이나 연인 고객도 그의 공방을 꾸준히 찾아왔다. 주문 제작 시스템이다 보니 가격대는 대체로 높다. 100만~200만원대는 저렴한 편에 속한다. 3000만~4000만원을 호가하는 경우도 상당하다고. 한번 인연을 맺은 고객은 단골이 됐다. 김 씨는 이렇게  북아트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현재 책 공방의 월평균 매출은 출장서비스를 포함해 1000만~3000만원.

 

ⓒ이코노믹리뷰 박지현 기자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

서울 신사동, 홍대, 종로를 거쳐 지금의 전북 완주까지. 열정을 가지고 작업을 이어오며 책 문화 체험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온 세월이 벌써 13년째다. 그는 3개월 전, 완주군 삼례예술마을로 터를 옮겼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집과 운영해오던 사업을 처분하고 왔다는 얘기가 아니다. 더 큰 포부가 생겨서다. “국내에도 ‘책 마을’을 만들어보고 싶은 꿈이 있었어요. 마침 ‘책 마을’ 사업을 마음에 품고 있던 완주군수에게서 제안이 왔고 뜻을 나누기 위해 이곳으로 내려왔습니다.”

완주군이 마을 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예술가들과 힘을 모아 지난 6월 5일 문을 연 삼례 책 마을은 옛 양곡창고 건물을 살려 책을 주제로 조성한 문화 예술촌이다. 그의 책공방북아트센터 외에도 책 박물관, 서점, 목공소, 디자인 뮤지엄, 미디어아트 갤러리, 카페가 1만1825㎡(약 3577평)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560m²(약 170평) 규모의 책공방북아트센터에는 활판인쇄에 사용하던 활자, 족히 100~150년 된 책 만드는 다양한 기계와 그 기계가 찍어낸 책들이 전시돼 있다. 지역 주민, 관광객들은 낯선 책 공방 앞에서 한 번씩 발걸음을 멈춘다. 처음에는 머뭇대던 사람들도 공방 안으로 들어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과 자연, 책과 역사를 감상한다. 또 책 만드는 프로그램에 호기심을 보이고 흠뻑 빠져든다. 그만큼 쉽고 편안하다.

김 씨는 이곳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책 공방, 책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한 번에 제공하는 명실상부한 북아트센터가 됐으면 한다.

“독일의 아틀리에를 가보면 장인 할아버지가 20~30대 젊은 친구들에게 책 만드는 비법을 가르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사실 책 만드는 기계 자체가 아니라 기계를 돌릴 수 있는 메커니즘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노하우를 전수하는 노력이 필요하죠.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북아트 분야의 인재를 길러내고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는 대안학교를 세우고 싶어요. 북아트 인적 투자에 대한 국가적 지원도 활성화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자신이 정성스런 손길로 한 땀 한 땀 만들어낸 책을 볼 때 행복감을 느끼고, 최선을 다해 만든 작품을 사람들이 좋아할 때 기쁨을 느낀다는 김 씨. 열정과 노력으로 새로운 도전에 성공한 자신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진섭이 너, 아직까지는 잘하고 있어.’ 그는 여전히 다음 도전을 꿈꾼다. 전북 완주에 책 공방을 꾸린 ‘책 사나이’ 김진섭은 이제 오십 문턱에서 책 마을지기로 더 옹골찬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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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성공노트

자본금

친구의 회사 사무실에서 회의실을 빌려 책 공방을 마련함으로써 3000만~4000만원의 창업비용을 줄일 수 있었음. 투입된 총 사업자금은 사무실 보증금 500만원에 책상과 전화 등 집기 구입비 40만원 정도. 변변한 수익을  내기 어려웠던 사업 초기에는 출판대행을 본업으로 삼아 운영비를 충당하고 이를 통해 번 돈은 고스란히 북아트를 위해 재투자함.

준비기간 및 과정

독일 마인츠의 한 아틀리에(공방)에서 8주 코스의 북아트 과정(학비 800만원) 수료. 국내외 북아트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연마함. 북아트를 배울 수 있는 방법으로는 국내 교육과정을 이용하거나 유학이 있음. 현재 국내에서 북아트를 배울 수 있는 곳은 100여 곳이 있지만 기본과정 외에 고급과정까지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은 ‘렉토베르소’, ‘책공방북아트센터’ 등 한두 군데 정도. 국외 교육기관으로는 영국 런던의 예술대학 캠버웰 컬리지의 북아트학과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음. 4년 과정에 학비는 약 2억원가량.

성공 노하우

유럽식 전통 북아트 공방을 재현, 인쇄부터 바인딩까지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책 공방을 국내 처음으로 만들었음. 2000~5000원대의 저렴한 가격이 아니라 고급 재료를 사용한 북아트 고급화 전략을 구사함. 생소한 북아트 문화를 알리기 위해 고객을 직접 찾아가는 서비스를 기획함. 움직이는 책 공방의 형태로 ‘책 만드는 버스’를 제작해 학교, 학원, 도서관, 아파트 등 어린이들 특히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어디든 달려가 책을 매개로 하는 문화체험의 기회를 제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