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라!” 말하지 않아도 나갈 수밖에 없다

올여름, 여의도 증권가가 뜨겁다. 불황 여파에 시달리는 증권사들이 지점 통폐합 등 인력 재배치를 단행, 증권맨들의 파업 열기가 무더위를 압도할 만큼 후끈하기 때문이다. 증권사들은 “효율적인 회사 운영을 위해 인력 감축이 아닌, 재배치를 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다수의 증권사가 지점 통폐합· 실적 압박· 파업 장기화 유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암묵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다는 얘기다.

골든브릿지투자증권 노조 파업 현장

수수료 급감으로 매출 떨어지는 증권사, ‘인력 재배치’ 시작

지난 2년 동안 1800~2000 박스권을 지루하게 오가던 코스피 지수는 미국 출구전략 발표를 기점으로 1700 선으로 뚝 떨어졌다. ‘안정성’의 대표 종목으로 손꼽히던 채권시장도 금리가 인상되며 요동쳤다.

국내 62개 증권사들의 채권 보유량은 지난해 1분기 105조9000억원에서 3분기 120조5000억원, 올해 1분기 134조원으로 급격히 늘었다. 하지만 미국 양적완화가 축소되면 채권 값이 급락할 수 밖에 없어 상당한 손실이 예상되고 있다.

최근 주식·채권·외환시장에 먹구름이 끼면서 거래량도 줄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증권사는 금융위기의 불확실성 지속으로 전년대비 거래대금이 큰 폭의 감소세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유가증권시장 3월 결산법인 22개 증권사의 2012사업연도 영업이익은 9778억원을 기록, 전년동기 대비 45.0% 감소했고, 당기순이익은 6933억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45.4% 하락했다. 2011년 8조9836억원을 기록했던 일평균 거래대금은 6조3069억원으로 떨어졌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상당수 증권사들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지점을 통폐합하고, 인원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할 예정”이라며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지난 6월 11일, 증권사 맏형격인 삼성증권은 ‘지점 7곳을 폐쇄하고, 입사 5~10년 차인 대리와 과장급 직원 100여 명을 계열사로 전환 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전환 배치에 250여 명의 신청자가 몰려 100여 명이 선별된 상태다.

삼성증권에 이어 현대증권도 조만간 지점 축소 등을 통해 인력 재배치에 나설 계획이며, 작년 말 16개 지점 통폐합과 동시에 260여 명의 퇴사 대란을 겪었던 한화투자증권도 점포를 1∼2개 정도 줄일 예정이다.

증권사 관계자는 “금융시장이 침체돼 거래 대금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며 "수수료 수익도 대폭 축소돼 증권사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실정”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수수료 경쟁으로 매출 감소를 자초한 증권사들이 일시 미봉책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해 직원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수수료 급감의 본질적인 이유는 ‘제로 수수료’ 경쟁을 벌여온 증권사의 ‘제살 깎아먹기’가 빚어낸 결과라는 시각도 있다.

최근 증권사들은 경기부진으로 시장을 떠난 개미 투자자들을 잡기 위해 수수료를 대폭 인하하거나 일정기간 면제해주고 있다. 주식 매매 수수료는 HTS(Home Trading System), MTS(Mobile Trading System) 등 온라인 트레이딩 시스템이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더욱 낮아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삼성증권은 신규고객과 휴면고객을 대상으로 연말까지 모바일 거래 시 ‘1년 수수료 무료 프로모션’을 시행 중이다. 프로모션 대상자는 내년에도 0.1%의 수수료만 내면 된다. 우리투자증권은 내년 6월 30일까지 신규고객과 휴면고객의 모바일 수수료를 면제해주는 이벤트를 벌이고, HTS·홈페이지 수수료를 국내 최저수준인 0.011%로 인하했다.

대형 증권사들이 시작한 수수료 전쟁에 중소 증권사들도 뛰어들었다. 한화증권은 지난 1월 2일부터 연말까지 ‘모바일 거래 시 주식수수료 무료’ 이벤트를 벌이고 있고, 대신증권은 HTS와 MTS 수수료율을 0.011%까지 내렸다.

동양증권은 신규고객에 한해 3개월 MTS 무료 수수료 이벤트를 진행 중이고, SK증권은 유관기관 비용을 제외한 수수료를 ‘3년 동안 무료’로 해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했다가 이벤트 기간이 종료된 상태다.

김경수 민주노총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국장

김경수 민주노총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국장은 “대형 증권사뿐만 아니라 중소형 증권사들까지 너도나도 수수료를 줄이거나 없애고 있다. 무분별한 수수료 전쟁으로 증권사 수익이 떨어지는 것을 구조조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지점 통폐합·영업 압박·단체 파업 장기화 유도로 ‘자연스러운 구조조정’ 단행?

삼성증권·현대증권 등의 인력 재배치 발표가 여론의 뭇매를 맞자 증권사들은 “인력 재배치일 뿐, 인원 감축과 같은 구조조정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대다수 증권사는 감원, 지점 축소, 감봉 등 다양한 형태의 우회적인 구조조정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011년 12월 기준 4만4055명이었던 61개 증권사의 임직원 수는 2012년 12월, 4만2802명으로 줄었고, 같은 기간 국내지점 수도 1778곳에서 1638곳으로 줄었다. 1년 동안 140개의 국내지점이 사라졌다. 전 지점의 12.7%가 사라진 셈이다.

미래에셋증권이 37곳을 통폐합했고, 대신증권이 20곳을 통폐합해 뒤를 이었다. 동양증권 18곳, 한화투자증권 16곳, 메리츠종합금융증권 11곳, 우리투자증권 10곳, SK증권 9곳, 하나대투증권 9곳, 교보증권 5곳, 동부증권 5곳, 유진투자증권 4곳, 한국투자증권 4곳, 하이투자증권 3곳, 솔로몬투자증권 지점 2곳이 폐쇄됐다.

사무금융노조 측은 “지점 폐쇄는 명예퇴직 등 구조조정을 불러오고, 잉여인력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필연적으로 구조조정과 연결된다”고 주장했다.

지점 통폐합으로 정리대상 1순위가 된 것은 증권 판매를 담당하던 영업직 직원이다. 폐쇄된 지점에 있던 영업직원은 전환 배치 후 담당 분야가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증권 판매을 하던 직원이 자산관리 부서로 배치받는 등 새로운 일을 하게 되면 대부분 적응하지 못하고 명예퇴직을 선택하게 된다.

운 좋게 예전 업무 그대로 담당하게 되더라도 영업 기반인 ‘지역’과 ‘인맥’을 다시 쌓기 위해 지점 내 동료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일쑤다. 한 지점에 배정된 영업직원이 과포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은순 교보증권 노동조합 지부장

이은순 교보증권 노동조합 지부장은 “교보증권은 현재 지점이 44개인데 내년까지 22개로 줄일 계획”이라며 “직원들은 콩나물시루에 들어 있는 것처럼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영업기반이 겹쳐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되면 알아서 나가게 된다”고 털어놨다.

실적 압박도 퇴직·이직의 촉진제 역할을 한다. 증권업계에는 ‘고정급여의 최소 3배의 영업실적을 내야 밥값을 한다’는 통설이 있다. 목표치에 미달한 직원은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표치에 미달하면 매일 야근을 시키거나 비선호 부서로 발령하기도 한다.

KDB증권 관계자는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등 하위직급이 성과를 못 낼 때마다 영업추진역 → 업무추진역으로 재배치하고, 그래도 실적이 좋아지지 않으면 대기발령을 내린다”며 “실적 압박 때문에 직원들은 전 두 단계에서 거의 그만둔다”고 말했다.

실적 커트라인을 넘지 못했을 경우 뒤따르는 임금 삭감 부담도 영업직원의 몫이다. 증권사의 경우, 대부분이 기본급과 성과급이 통상임금으로 통합 산정되는 개별연봉제를 시행하고 있다. IBK투자증권의 경우, -25에서 +15까지 임금 폭이 달라진다. 정해진 실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최대 1/4가량 임금이 깎인다.

하이투자증권은 5·7·9제를 운영하고 있다. 증권 영업직의 경우, 3개월 연속으로 월 약정액(사원 5억, 대리~차장 7억, 부장 9억원)에 미달하면 그다음 달부터 급여의 50%만 지급하는 제도다.

‘임금동결을 대놓고 강요하는 회사도 있다. SK증권은 지난달 초, 임금 동결, 10% 임금 삭감, 20% 임금 삭감이 선택지인 설문조사를 실시해 직원들의 반발을 샀다. 직원들이 설문조사에 응하도록 강제해 임금 동결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업직원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자기매매, 과당매매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H증권 명동지점에 근무하는 김모 씨는 “실적을 올리지 못해 1억원의 자비를 털어 실적을 메꾸고 있다. 이자를 갚기도 벅차다”고 털어놨다.

회사 측이 일부러 파업기간을 장기화해 구조조정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골든브릿지투자증권은 15일 기준, 449일째 파업 중이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생계가 곤란해진 골든브릿지증권 근로자들은 하나둘 이직을 선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파업기간 동안 ‘무노동 무임금제’가 적용된다.

골든브릿지투자증권지부는 지난해 4월 23일, 창조컨설팅을 동원한 사측의 일방적 단체협약 해지, 개악된 단협 요구, 공동경영약정 무력화 등에 반발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사측은 당시 단협상 ‘정리해고 합의’ 문구를 ‘협의’로 변경할 것과, 다수의 해고조건 완화 조항을 노조 측에 요구했다.

골든브릿지투자증권 노조 관계자는 “임금 인상, 복지혜택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근로자의 최소 권리가 보장된 단체협약을 다시 체결하고, 회사가 정상화되길 바라지만 사측이 받아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