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책은 피에 굶주려 야윈 흡혈조

《흡혈귀의 비상:미셸 투르니에 독서노트》
-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은주 역- 현대문학 펴냄- 2002년
- 12-13쪽

발문
한 권의 책이 독자를 덮치면, 그것은 곧 독자의 체온과 꿈들로 부푼다. 그것은 활짝 피어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유용한 일입니다. 무료한 시간, 함께 벗할 수 있어서 좋고, 책 속의 멋진 구절 하나 인용하니 뽐낼 수 있어 좋고, 두툼한 책 베고 누워 잘 수 있으니 좋고, 사발면 뚜껑 위에 덮어 라면의 깊은 맛을 우려낼 수 있으니 좋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책을 읽어서 유용한 일 중 하나는 즐거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법정스님이 쓴 글 중에 허균의 《한정록(閑情錄)》에서 발췌한 멋들어진 구절이 생각납니다.
허균이 말하기를 책을 읽는 즐거움이 세 가지가 있답니다.

첫째 즐거움은 이렇습니다. “맑은 날 밤에 고요히 앉아 등불을 밝히고 차를 달이면 온 세상은 죽은 듯 고요하고 이따금 멀리서 종소리 들려온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정경 속에서 책을 펴 들고 피로를 잊는다.”
둘째 즐거움은 이렇습니다. “비바람이 길을 막으면 문을 닫고 방을 깨끗이 청소한다. 사람의 출입은 끊어지고 서책은 앞에 가득히 쌓여 있다. 아무 책이나 내키는 대로 뽑아 든다. 시냇물 소리 졸졸 들려오고 처마밑 고드름에 벼루를 씻는다. 이처럼 그윽한 고요가 둘째 즐거움이다.”
셋째 즐거움은 이렇습니다. “낙엽이 진 숲에 한 해는 저물고 싸락눈이 내리거나 눈이 깊이 쌓였다. 마른 나뭇가지를 바람이 흔들며 지나가면 겨울새는 들녘에서 우짖는다. 방안에 난로를 끼고 앉아 있으면 차 향기 또한 그윽하다. 이럴 때 시집을 펼쳐 들면 정다운 친구를 대하는 것 같다. 이런 정경이 셋째 즐거움이다.”
허균처럼 깊은 즐거움을 갖기란 어렵겠지요. 그러나 적으나마 책을 읽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책을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이런 어려운 시절에 조금은 쉬어갈 수 있는 아주 유용한 휴식처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한 권의 책은 한 명의 저자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수의 저자들을 갖는다. 그것은 그 책을 읽은 사람, 읽는 사람, 읽을 사람들 전체가 창조 행위에 있어서 책을 쓴 사람에게 마땅히 보태어지는 까닭이다.
쓰여졌으나 읽히지 않은 책은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半)존재만을 가졌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의 잠재성이며, 존재하기 위해 열심히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알맹이가 없이 텅 빈 불행한 존재이다.
작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한 권의 책을 출판할 때 그는 익명의 남녀의 무리 속으로 종이로 만들어진 새떼를, 피에 굶주려 야윈 흡혈조들을 풀어놓는 것이다. 그 새들은 닥치는 대로 독자를 찾아 흩어진다.
한 권의 책이 독자를 덮치면, 그것은 곧 독자의 체온과 꿈들로 부푼다.
그것은 활짝 피어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된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들과 독자의 환상들이 구별할 수 없게 뒤섞여 있는` `어린아이의 얼굴에 아빠의 모습과 엄마의 모습이 섞여 있듯이` `풍부한 상상의 세계이다.
마침내 독서가 끝나면, 소진되어 독자에게서 버림받은 그 책은 제 상상력을 수태시키려 다른 생명을 기다릴 것이며, 그 소명을 실현할 기회를 만나면, 마치 수탉이 무수한 암탉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듯,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나들 것이다.”
이현 지식·정보 디자이너, 오딕&어소시에이츠 대표
(rheeyhyun@gmail.com)

강혁 기자 kh@ermedi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