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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역사가 대한민국의 역사와 그 뿌리를 같이하고 그 영토문화가 대한민국의 영토문화와 동일하다는 것은 단순히 전 근대에 있던 일만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그 확실한 증거를 보여준 국제적인 사건들이 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되고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일본은 [그림3]과 같이 대한제국의 정안립을 내세워 만주에 대고려국의 건국을 추진했었다. 이 구상은 1921년 3~4월에 걸쳐 ‘다이쇼일일신문(大正日日新聞)’의 제1면에 5단 기사로 11회에 걸쳐서 연재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그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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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8.01.27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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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발상지이며 근거지가 되었던 만주와 한반도의 매장문화를 비교해 보는 것은 청나라와 조선의 문화를 비교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림1]은 고조선의 대표적인 매장문화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동검의 분포지역이다. 이것에 대해서 북한의 박진욱은 ‘비파형 단검은 형태가 비파처럼 생긴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지만 날이 비파처럼 생긴 것이라고 모두 비파형 단검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날의 형태가 비파모양으로 생겼을 뿐만 아니라, 검몸, 검자루, 검자루맞추개(가중기)를 따로 만들어서 조립하게 되어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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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8.01.2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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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토론과 영토문화론의 근거가 되는 것은 당연히 문화와 역사다. 따라서 먼저 문화와 역사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문화는 인류의 모든 삶과 사고를 통 털어 일컫는 것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문명과 문화를 동일시하고 있다. 인류가 생활해온 의·식·주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언어와 종교·사상 등 눈에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공동체가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생활해 나가면서 공통적으로 사고하는 모든 것이 문화다. 아주 먼 고대부터 시작해서 지금 이 순간이라고 일컬어지는 현재의 매 순간마다 벌어지는 인류의 생활방식을 비롯한 모든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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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8.01.13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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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청 국경회담은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이 어디인가를 논의한 것으로 을유감계담판(1885년)과 정해감계담판(1887년)을 함께 일컫는 것이다. 이때 조선 대표였던 이중하 토문감계사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 것이나 나라의 영토는 한 치도 줄일 수 없다.”고 한 말은 영토를 지키고자 하는 대한민국 선조들의 염원을 가장 대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로 지금도 우리에게 영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워주는 생생한 교훈이다.조·청 국경회담의 발단은 소위 백두산정계비라 불리는 비석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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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8.01.06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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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의 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필요가 없다. 시를 읽는 순간 언어의 감미로운 아름다움이 그대로 묻어 나오면서 던져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눈에 보이는 영상으로 확실하게 살아 움직인다. 그의 시를 평한다거나 쓰인 배경 등을 이야기 하는 것은 오히려 사족일 뿐이다. 시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시인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시인의 시와 함께 그분의 숭고한 뜻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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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7.12.30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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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는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상태의 기록이다. 세계사란 세계의 민족이, 조선사란 조선민족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라고 총론에 기록함으로써 역사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직전까지 일어난 인류의 모든 생활과 사상이 축적된 것으로 보았다.선생께서는 아와 비아를 ‘주관적 위치에 서 있는 자를 아라 하고, 그 밖의 것은 비아’라고 정의했다. ‘그것은 국적, 계급, 학문 등 모든 것에 존재하는 것으로, 반드시 본위(本位)인 아가 있으면 비아 가운데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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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7.12.24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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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은 를 남김으로써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는 대진국 발해가 생활터전으로 삼았던 만주까지 라는 것을 기록으로 남긴 분이다. 그러나 유득공의 이와 같은 위대한 업적은 정조대왕의 개혁적인 정치가 없었다면 세상에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조선시대의 가장 큰 패악이라면 양반과 상민이라는 계급과 일부다처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시대에는 지구상의 대부분 나라가 신분사회로 나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계급사회는 어느 정도 인정을 한다고 치더라도 일부다체제의 희생물인 서자(庶子)에 대한 차별에서 오는 인적자원의 손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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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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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가 성군이 될 자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용골대와 다이곤은 소현세자를 극진히 예우한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소현세자를 졸지에 독살당하는 상황으로 몰아넣게 된다.청나라에서 행하는 소현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보내진, 김자점의 끄나풀 신득연을 통해서 조선으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전달된 소식은 인조에게 보고되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왜곡되어 전달되고 있었다. 세자가 명나라와의 전쟁에 참여하여 용감히 싸운 것은 인조 자신에게 삼배구고두례의 치욕을 안긴 청나라에게 잘 보임으로써 세자의 왕좌를 굳건히 하기 위한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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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9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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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정에서 화친에 대해 우왕좌왕하는 동안 1월 1일 탄천에 결집한 청나라 병력이 30만이나 되는 것을 보게 되었고, 남한산성 안에서 얼마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조선 조정은 화친하기로 결정하고 청나라에 화친하자는 국서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그러자 기껏 생각해 낸다는 것이 용골대와 마부대에게는 각각 은 3천 냥을, 역관 정명수에게는 천 냥을 뇌물로 주어서 화친을 추진하게 해보자는 얄팍한 술수를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마저 통하지 않자 조선은 방법을 잃고 만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남한산성 안의 조정은 그나마 명목을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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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2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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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라는 이름을 들으면 왕위에도 오르지 못하고 아버지 인조의 묵인 하에 김자점에 의해 독살당한 애처로운 모습이 연상되어 나약한 왕세자로 그리기 쉽다. 하지만 그분의 실제 모습은 강인하고 지혜로운 분으로, 변해가는 주변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감각을 지닌 분이셨다.필자가 2011년에 펴낸 장편소설 에서 에 기록되어있는 사실들을 근거로 그려낸 소현세자의 모습이 그분의 실제 모습일 것이다. 필자는 비록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그렸지만, 그 소설에 의 관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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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7.11.2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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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역모를 꾸몄다지만 실제로 역모를 꾸몄는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만 그가 역모 이상의 혁명, 즉 조선이라는 국가를 병들게 만들던 신분제도를 없앰으로써 능력만 있으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을 실현시키려 했다는 것은 그가 스스로 자신을 고발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남대문 벽서 사건에서 알 수 있다.남대문 벽서사건은 광해임금 10년(1618) 8월 10일, 허균의 심복이던 현응민이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00이 온다.”는 내용의 벽서를 붙인 것이다. 정말로 허균이 역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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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7.11.1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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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시대에 광해임금을 다시 만나고 싶은 이유는 ‘광해임금의 백성사랑과 나라사랑의 정신이 그리워서’다.필자가 장편소설 에 소설의 형태를 빌려서 자세하게 서술한 바와 같이 광해임금은 진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사랑했던 왕이다.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에서 분조를 이끌고 전장에서 몸소 싸우며 체험한 결과를 통해서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을 몸으로 익히고 실천한 왕이었다. 그는 그 전쟁에서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깨우쳤다. 조정에서는 말끝마다 백성과 종묘사직을 위해서라던 양반․사대부들은 정작 전쟁이 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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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7.11.11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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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은 광해임금시절 대북에게 기득권을 모조리 잃어버린 서인들이 목숨을 걸고 기득권을 찾기 위해서 일으킨 반정이다. 일각에서는 광해임금이 어머니인 인목왕후에게 불효하여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학의 정신에 어긋남으로 서인들을 중심으로 일으킨 반정이라고도 하지만 역사를 올바르게 조명한다면 진실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우선 인목왕후는 광해임금의 친모가 아니다. 광해임금이 공빈 김씨의 몸에서 서자로 태어났으나 세자로 책봉이 되면서 중전의 아들로 입적되는 당시의 관행에 의해서 인목왕후의 아들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친모가 아니니 불효가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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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7.11.04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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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신분차별을 없애고 능력에 따라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상을 주장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옮겼으며, 종교에 대한 편견도 없애고 열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이다. 그 당시 양반들이 유학을 중시하고 불교를 천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절에서 참선을 하는 등 파격적인 행동을 하였고 그로 인해서 파직과 복직을 거듭한 인물이다. 그리고 1615년 동지 겸 진주부사 중국에 다녀올 때 명나라 문인들과 사귀면서 귀국할 때 많은 책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이 중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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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7.10.28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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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광해임금 때 역모를 꾸민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한 분이다. 그분께서 이라는 한글소설을 펴내신 것은 잘 아는 사람들도 그분께서 역모를 주동했다는 모함을 받아 능지처참을 당하신 사실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허균이 을 펴냈다는 그 자체가 당시 세대로서는 체제에 대한 저항이자 혁명 그 자체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역모를 꾸몄다는 모함으로 능지처참을 당했다는 것이 과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반상(班常)과 적서(嫡庶)의 구분이 엄격하여 양반이라고 하면 자신이 첩에게서 낳은 아들도 그 축에 들이지 않고 기득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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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7.10.21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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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 전 세계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사건들, 즉 모든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생활이라는 문화가 이 순간이 지나면서 쌓이고 쌓이는 축적을 거듭하여 이루어지는 탑이다. 그것은 인류가 생성된 시기부터 누리던 문화라는 횡축(橫軸)이 시간이 지나면서 수직으로 이어지는 종축(縱軸)으로 변환되어 쌓이고, 그 안에 지나온 모든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안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있다.인류는 그 많은 사건과 인물들 중에서, 인류의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건을 기록하고 또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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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7.09.30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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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소련은 아이누족의 생활터전이던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지배하는 것이 아시아 영토에 대한 목적 중 하나였다. 원래 사할린, 쿠릴열도, 홋카이도는 아이누족의 영토다. 그러나 홋카이도는 1869년 일본이 병탄했고, 쿠릴열도와 사할린은 일본과 소련이 각축을 벌이다가 1875년 소련이 사할린을, 일본이 쿠릴열도를 차지하기로 합의를 했다. 하지만 군국 일제의 힘이 강해지면서 일본이 모두 강점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사할린과 쿠릴열도는 소련이 강점한 것이다. 당연히 종전과 함께 아이누족에게 반환되어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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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7.09.23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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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지적문화의 경우에는 1868년 일본 메이지 유신 당시 대마도의 마지막 도주인 종의달이 쓴 봉답서에 “이번 서류부터는 조선에서 만들어준 관인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우리 조정(일본)에서 새로 만들어주는 관인을 사용함으로써 옛날부터 조선의 신하로 살아온 잘못된 점을 뉘우치겠습니다.(후략)”라고 쓰여 있는 것을 근거로 일본은 대마도가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봉답서에 명시된 바와 같이 대마도는 옛날부터 조선의 신하였음을 자인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대마도에 기근이 심한데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대마도에 어떤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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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7.09.16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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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문화를 살펴보면 ‘만주라는 지명은 본래 부족의 이름으로 만주(滿珠)라고 했었고, 지금은 만주(滿洲)라고 적는데, 주(洲)자의 뜻이 지명에 가깝기 때문에 가차하여 사용함으로써 서로 연관성이 있게 된 것’이라고 에 명시되어 있다. 또한 금나라의 역사를 기술한 에 '금의 시조인 함보는 고려에서 나왔다고 하였고, 금나라의 태조가 요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나서 발해인을 초유하면서 말하길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만주족은 여진족이라는 자신들의 족명을 개명한 민족으로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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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7.09.09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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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미 수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은 철저한 영토문화에 대한 검증을 통해서 만주국을 괴뢰국가로 건국했다. 그들은 만주가 고조선 이래 대한제국의 선조들이 생활터전으로 삼았던 곳으로 만주의 영토문화는 대한제국의 영토문화와 동일하며, 청나라와 대한제국은 뿌리가 같은 민족으로 만주가 대한제국 영토의 일부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따라서 만주국을 건국할 수 있도록 청나라의 후손들에게 도움을 줄 때, 북경까지 진출했던 장쭤린을 난하 동쪽으로 이동하게 한 후 그 영역을 설정하고, 훗날 그 영역에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추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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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소설가 겸 칼럼니스트
2017.09.02 1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