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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부자팔자] ‘붓 대신 칼’ 잡은 이순신, 작은 선택이 큰 역사 이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8자 : 유성룡이 이순신에게 ①

인무원려  필유근우(人無遠慮 必有近憂) - 사람이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가까운 날에 근심을 겪게 된다(<논어>)

[한자 풀이] 人 사람 인, 無 없을 무, 遠 멀 원, 慮 생각 려, 必 반드시 필, 有 있을 유, 近 가까울 근, 憂 근심 우

이번 호에는 아버지가 아닌 친구 또는 선배가 준 8자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한다. 비록 부자팔자는 아닐지라도, 학문적으로 스승 격이었던 동년배나 선배가 들려준 여덟 글자의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첫 번째가 임진왜란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과 서애(西厓) 유성룡(1542~1545)의 이야기다.

이순신은 음력 3월 8일생이다. 양력으로는 4월 28일생이다. 지금의 서울인 한성부(漢城府)  건천동(乾川洞, 현 서울 중구 인현동1가 40번지)에서 덕수 이씨 11대손 정(貞)과 초계 변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이 둘 있었다. 이름이 희신(羲臣), 요신(堯臣)이다. 아우가 우신(禹臣)이다. ‘신(臣)’자 돌림이었다.

돌림자 앞에 붙여진 한 글자들, 즉 희·요·순·우는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성군)에서 따온 것이다. 부친 이정이 사형제에게 각각 성군의 이름을 붙인 까닭이 있다. 현명한 임금, ‘성군의 신하’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오길 희망해서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아들들 이름에다 녹아낸 것이다.

중국 삼황오제 중 가장 성군인 '순(舜)' 이름을 따다

이정은 영혼에 상처가 많았다. 그의 아버지, 즉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李百祿)은 청운의 꿈도 펼치기도 전에 천수를 다하지 못했다. 조선 중종 때에 발생한 기묘사화(1519)가 원인이었다. 당시 개혁파 수장이었던 조광조를 따르는 명단에 올라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때부터다. 이정은 벼슬길 진출을 아예 포기했다.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꿈도 꾸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현명한 임금(聖君)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러다 중종이 죽었다. 조선 12대 왕 인종(仁宗)이 즉위했다(1544년). 인종은 성군의 자질이 다분했다. 그렇기에 같은 해에 임신한 아내(초계 변씨)가 사랑스럽고 무엇보다 복중(腹中) 태아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 다시 희망이 이정을 찾는 듯했다.

1545년, 봄이 왔다. 3월 8일에 셋째가 태어났다. 이정은 기뻤다. 아내도 그랬다. 그렇지만 아비의 기쁨은 아주 잠깐이었다. 성군이라 여겼던 인종이 젊은 나이(31세)에 서거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12살 명종이 즉위했다.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TV 인기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배우 전인화가 열연했던 주인공)의 수렴첨정이 시작됐다. 세상이 변했다.

다시 이정에게 희망은 죽었고 절망이 엄습했다. 영혼의 상처가 더 커졌다. 아물지 않았고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양반으로 딱히 하릴도 없어졌다. 과거를 본들 무슨 소용이랴.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쳇바퀴 같은 무료한 일상의 삶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방황하던 중에 방향이 보였다. 아버지의 역할이었다. 이것만은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다.

그래서일까, 삼황오제(복희씨·신농씨·헌원씨·소호·전욱·제곡·요·순) 중에서도 가장 이상적이었던 성군 ‘순(舜)’을 취하여 셋째 아들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둘째 아들에게도 이상적인 성군 ‘요(堯)’를 붙인 바 있다. 아버지로서 이정은 둘째와 셋째에게 기대가 컸다. 이름 지은 뜻에서 대강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어려서부터 학문적 성취가 깊었던 순신은 이정에게 있어 최고가 되었다.

이정은 두 아들이 속됨을 좇는 궐당(闕黨)처럼 식견이 얕아지고, 출세에 빠른 욕심을 내는 것을 항상 경계하라고 일렀다. 중국 북송(北宋)시대 역사가 사마 광(司馬 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등장하는 위(魏)나라 사람 왕창(王昶)을 보는 듯하다. ‘왕창의 자식 훈계’처럼 보여서다. 왕창은 자식들 이름을 각각 외자로 지었다. ‘묵(黙)·침(沈)·혼(渾)·심(深)’이 그것이다. 네 글자 뜻이 모두 ‘깊다, 고요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렇듯 네 글자로 이름을 지은 까닭을 설명하는 편지가 <자치통감>에 나온다.

“내가 이 네 글자를 이름으로 지은 것은 너희들에게 명예를 고려하고 정의를 생각하라는 뜻이므로 이를 어겨서는 안 된다. 무릇 만물은 빨리 성취하면 일찍 망하고, 늦게 나아가면 잘 마칠 수 있다. 아침에 피는 꽃은 저녁에 시들지만, 무성한 소나무·잣나무 잎은 겨울에도 쇠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군자는 궐당(厥黨)을 경계로 삼는 것이다.”(사마광 지음, 박종혁 엮어옮김, <자치통감>, 서해문집 펴냄)

‘궐당’이란 말은 <논어(論語)>에 보인다. 헌문(憲問)편 마지막 장에 등장한다. 궐당에 사는 한 소년이 공자의 심부름을 맡으면서 조속히 학문을 성취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실상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고, 학문한 사람처럼 남들에게 보이길 좋아했다. 이 때문에, 이로부터 일찍 성공을 바라는 자(欲速成者)를 일러 모두 ‘궐당’이라고 꼬집은 것이다.

소년 시절의 이순신은 건청동에서 자랐다. 유성룡(柳成龍), 원균(元均)과도 어울렸다. 이 시절을 지난 2004년에 KBS TV에 방영되었던 역사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1555년으로 그려냈다.

순신이 우리 나이로 11살이 되던 해다. 드라마에서 순신은 유성룡과 원균을 형님이라고 했다. 유성룡은 세 살 위(1542년생)였다. 둘째형 요신과 친구다. 하지만 원균은 순신에 비해 나이가 다섯이나 많았다(1540년생). 유성룡과 요신보다도 두 살이나 많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드라마는 유성룡과 원균을 친구로 등장시켰다. 이 역사적 허구는 시청자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서지 싶다. 여하튼 이때만 하더라도 유성룡이 문(文)에서 이순신보다는 앞길에 있었고, 원균이 무(武)에서 이순신보다는 앞길에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나이 차와 체격 등을 아주 무시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당시의 양반가 자제들은 보통 12살 안팎이 되면 <논어>와 <맹자(孟子)> 등 사서(四書)를 뗐다고 한다. 이순신도 그랬을 것이다.

선비 이순신, 종이와 붓 대신 말 타고 활을 쏘다

순신이 한성(서울)을 언제 떠난 것일까. 즉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牙山)으로 언제 내려 간 것일까. 이에 대해 순신이 여덟살이라는 말도 있고, 16세라는 설도 있다. 둘 다 정확치 않다.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아산으로 내려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곳에서 소년의 티를 벗으며 부모와 함께 기거했다. 그러면서 낮에는 농사일과 잡일 등으로 생계를 돕고 밤이면 책을 읽었다.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문인의 길을 걷고자 했다. 어느새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1565년)에 이순신의 나이가 21세가 되어, 전남 보성 군수 방진(方震)의 딸과 혼인한다. 혼인하기 전까지는 문인의 길을 걷다가 혼인을 한 다음에 무인의 길로 방향을 튼다. 왜 그랬을까.

무인으로 방향을 튼 이유를 말하자면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순신의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사정을 십분 고려해서다.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한 아버지의 영향 탓이다. 조정에 들어가는 것이 성격이나 기질에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임금을 모시고 정치를 하는 것에 전혀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舜) 임금 같은 성군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판단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하나는 이렇다. 이게 좀 더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처갓집 영향 탓이다.

장인 방진은 당대에 유명한 무인 출신이었다. 보성 군수를 지냈다. 그렇기에 집안 형편도 여유가 있고 좋았다. 게다가 순신은 처가살이를 했다. 자연, 아내 상주 방씨와 장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비가 종이와 붓 대신에 말 타며 활을 쏘는 무인이 되고자 한 것이다. 당시의 무과 시험은 많은 비용이 들었다. 주로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창을 쓰는 것이 정식 시험과목이었는데 준비물(말, 활, 창)을 모두 개인이 사서 구비해야만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문과 시험이 아니라 무과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현실적이다’라는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22세부터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여러 기록에서 보인다. 그러니 1년 동안이나 문인의 길과 무인의 길을 두고 최종 결론을 얻기까지 심사숙고를 꽤나 했던 것 같다. 드디어 28세 때, 첫 무과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마 사고로 다리에 골절을 입고 낙방한다. 4년 뒤인 32세 때(1576), 식년 무과에 응시하여 병과에 합격한다. 그해 12월에 동구비보(압록강 상류지역)의 권관이 되어 무관생활을 시작한다.

39세 되던 해 11월 오랑캐를 토벌한 공을 인정받아 훈련원 참관으로 승진을 하나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천리길을 밤낮으로 달려 귀향, 3년상(喪)을 치르기 위해 휴관(休官)한다.

탈상한 42세 때, 사복시주부가 되었다가 조산보 만호로 승진하는데 ‘유성룡의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 수차례 전공을 세웠으나 조정에서는 유성룡 말고는 이순신이란 이름 석자를 몰랐다. 45세(1589)가 되어서야, 무관으로는 처음, 문인이 독차지했던 정읍 현감자리에 오른다. 그럼에도 조정의 그 누구도 이순신을 주목하려 들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 빼놓고 말이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어릴적 같이 놀았던 서애(西厓) 유성룡(1542~1545)이다.

심상훈 고전경영연구가  |  ylmfa97@naver.com  |  승인 2014.07.01  11: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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